292화 #53 –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1)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거실.
서규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규리야. 뭘 그렇게 봐. 얼른 밥이나 먹자.”
서규리와 함께 걸 그룹 핑퐁의 멤버였던 최세나.
그녀는 서규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바닥에 내려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배고프다. 우리 밥 먼저 시키자.”
“그래, 밥 시켜.”
최세나는 TV를 흘긋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너는 무슨 드라마를 이렇게 오래 보냐?”
“이거 재밌어.”
“나 이번에 나온 예능이나 모니터링 좀 해줘라.”
그녀의 말에 서규리는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다 봤지.”
“이번 주에 나온 것도?”
최세나의 말에 서규리는 당황한 듯 입을 벌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것도 볼게. 저번 주까지만 본 것 같네.”
“그래, 다른 멤버들은 이제 다 탈퇴해서 연예계 생활 안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은 평생 이 업계에서 살아야지.”
그 말에 서규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TV가 아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야지. 이대로 우리 포기할 수는 없잖아.”
“응, 너도 이렇게만 있지 말고, 회사에 이야기해서 뭐라도 시작해 봐.”
최세나의 진심 어린 조언을 서규리도 느끼고 있었다.
다른 멤버에 의해 무너져버린 그룹.
자신들은 학교 폭력과 관련이 없었지만, 한 멤버의 학폭으로 인해 그룹이 해체되었고.
그렇게 대중들에게서 잊혀가고 있었지.
같은 멤버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숙 아닌, 자숙에 들어갔고.
그 어둠에서 이기고 나온 건, 가장 먼저 최세나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래가 아닌, ‘예능’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최세나의 마음을 알기에, 서규리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세나, 너는 계속 예능만 찍을 거야?”
“나라고 예능만 찍고 싶겠어? 애초에 꿈을 키웠던 건… 노래잖아.”
“그런데 왜 계속….”
그녀의 말에 최세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이렇게라도 이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이렇게 인지도를 올리고, 살아남으면… 다시 노래할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르잖아.”
최세나의 말에 서규리는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런 서규리를 바라보며 최세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른 멤버들처럼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 너도 그러니까 어떻게든 WG 엔터에, 이 숙소에 남아 있는 거 아니야?”
서규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선을 떨궜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자신의 욕망을 끌어 올렸다.
“난… 노래가 아니어도 좋아. 그냥 연예계… 이 바닥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뭐가 됐든, 우리 살아남아 보자. 억울하잖아, 몇 년을 이렇게 버티고 또 버텼는데. 이렇게 떠나기는.”
그녀들은 그동안 담아뒀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설움을 폭발시켰다.
그렇게 한참 눈물 섞인 대화를 이어나가던 그녀들.
몇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들은 어느새 서로에 대한 조언과 함께 주제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나는 연기에 도전해 보려고.”
서규리의 말에 최세나는 공감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너는 연기에 늘 관심 있었잖아. 매일 드라마, 영화 붙잡고 살기도 했고.”
“맞지.”
“그래서 자꾸 그 작품 보는 거야?”
최세나는 서규리가 항상 보는 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건, 저 배우 때문에 보는 거야.”
그녀들이 바라보는 TV 화면에는 한 배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정지된 화면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읊조렸다.
“워낙 저 눈… 세상 다 살아서 무미건조한 것 같은 눈이야. 근데 저 눈이 너무 매력적이야.”
서규리의 말에 최세나가 눈썹을 들썩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저분 얼굴 자체가 매력적이기는 하지.”
“그냥 잘생긴 느낌이랑은 달라. 영혼이 없는 것 같다가도, 연기할 때는 눈빛이 무섭도록 살아나.”
그녀의 말에 최세나는 멈췄던 화면을 재생시켰다.
화면 속에 멈춰 있던 배우는 연기를 펼쳤고.
그녀들은 말없이 영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터진 탄성.
“와아… 그러네. 역시 배우는 다르다. 연기가 미쳤는데?”
“응, 내가 말했잖아. 연기가 장난이 아니야. 눈빛 좀 봐. 진짜 저런 역할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 같아.”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몸을 구부정하게 앉은 서규리의 모습.
그 모습에 최세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규리야, 너 이 정도면 저 배우 연기를 좋아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녀의 말에 서규리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진희성을 실제로 한번 만나보고 싶기는 해.”
“진짜?”
“어, 실제 성격도 매력적일 것 같은데?”
최세나가 박규리의 어깨를 툭 치며 외쳤다.
“큰일 날 소리. 저분, 송유나 선배랑 사귀잖아.”
그녀의 말에 박규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지. 근데 보아하니, 송유나 곧 퇴물 될 것 같던데.”
“뭐… 그렇긴 해. 송유나도 정상까지 올라가긴 했으니까, 이제 내려올 때 됐지.”
“어, 솔직히 송유나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착하지도 않고.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녀의 말에 최세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우리 규리가 송유나보다 낫지. 근데 어차피 너 진희성 저 배우 진짜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최세나의 말에 서규리는 의뭉스레 웃으며 읊조렸다.
“당연하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진희성이랑 엮이면… 뜨기 좋을 거 같아서.”
그녀는 화면 속에 가득 담긴 진희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 * *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박 감독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그럼, 희성 씨도 잘 지냈고?”
박 감독과의 만남도 여러 번이었고, 앞으로 그를 만날 날은 너무나 길었기에.
이제 박 감독은 편하게 내게 말을 놓았다.
물론 내가 그에게 요청한 사항이었지.
“네, 감독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보낸 액션 신 봤는데. 와이어 신도 그거면 충분하니까, 너무 무리해서 연습하지 않아도 돼.”
매일은 아니어도, 박 감독에게 액션 연습이나 연기 연습에 대한 영상을 보내고는 했다.
연습을 하는 건 당연했고.
그에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박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대로 내가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의 방향성대로 꺾어 연습을 해야만 했으니까 그에게 내 의견을 보냈던 것이다.
“아닙니다. 오늘도 다녀왔는데, 아직 부족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와이어 신이나 단체 격투 신에서 대역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미소 끝에 걱정스러움이 한 스푼 묻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영상 찍기가 좋기는 하지만, 희성 씨 몸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저도 제 몸 다치는 거 걱정됩니다, 감독님. 하하.”
내 농담에도 그는 내 팔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희성 씨, 이번 작품에서 워낙 몸 쓸 일이 많으니까, 잘 챙겨. 연기야… 당연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하고.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으로 몸만 잘 챙겨줘.”
그는 신신당부하며 내 몸을 바라보았다.
“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제 건강 때문에 촬영에 피해가 가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그래, 그것보다 우리 오래도록 같이 일해야지.”
박 감독은 웃으며 내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팬 미팅한다며?”
“네, 이번 주에 합니다.”
“이야, 잘하고 와. 나도 희성 씨 팬이라 가야 하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장난스레 눈썹을 치켜세웠다.
“감독님, 저 이래 봬도 팬 미팅 표 잡기 힘든 연예인입니다?”
“아휴, 너무 잘 알지. 하하.”
“농담입니다. 감독님 제 팬 미팅 오시면, 주목받으실 텐데. 제 팬분들이 거의 여자분들이라서요.”
박 감독은 내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네. 내가 여자라도 희성 씨 광팬이 됐을 거야. 얼굴 잘생겨, 연기 잘해, 성격도 착해.”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나는 박 감독과 대화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몇십 분이 지난 후에야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크랭크인 날짜가 다가오니까, 한번 보자고 한 거지.”
“네, 맞춰서 잘 준비하겠습니다.”
“팬 미팅도 있다고 해서, 크랭크인 날짜 촉박하지 않은가 싶어서.”
박 감독의 배려 깊은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팬 미팅이야, 팬분들 만나서 소통하는 거라 끝나고 바로 준비하면 되니까. 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래? 촬영 시작하면 바쁠 테니까, 충분히 휴식도 취하고 만나자고.”
“네, 첫 촬영 날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 * *
“저 어제 설레서 한숨도 못 잤잖아요.”
진희성수기의 운영진 중 한 명인 김선미, 그녀는 박순희를 바라보며 말했고.
박순희 역시 충혈된 눈으로 답했다.
“저도요. 희성 오빠의 팬 미팅 전날인데,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어요. 오늘 진짜 눈에 가득가득 담아가요.”
“그러니까요. 아, 너무 떨려.”
그들은 진희성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입구에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팬 미팅에 오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긴 줄에 맞춰, 스태프들이 나와 사람들을 안내했다.
“30분 뒤에 입장하실 거니까, 조금만 대기해 주세요!”
스태프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그 누구도 긴 줄과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자발적으로 진희성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진희성을 만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진짜 기대된다.”
“꺄아… 나 너무 설레.”
“우리 오빠, 당연히 노래는 불러주겠지?”
곳곳에서 사람들은 진희성 팬 미팅에 대한 기대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희성 오빠 잘 찍으려고, 오늘 대포 가져왔어요.”
“아, 필수지. 우리 오빠 모공까지 다 담아가야 한다고.”
“아니야. 희성 오빠는 모공도 없을 거야. 진짜 피부 장난 아니라니까?”
팬들은 진희성을 기다리면서도 그의 사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박순희는 맨 앞줄에 서서 미리 적어온 팬들 명단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오늘 팬 카페 인원들 거의 다 왔으니까….”
그때.
박순희를 지나치는 한 사람.
그를 발견하자마자 박순희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저기요!”
그녀의 부름에 발길을 멈춰 선 남성.
“아앗… 뭡니까?”
“줄 안 보이세요?”
박순희의 말에 남성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뒤에 늘어선 줄을 살펴보았다.
“아….”
“제가 입장 1번인데, 제 앞을 지나쳐서 가시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니… 아오….”
웅얼대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박순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러자 스태프가 다가왔다.
“죄송한데, 표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아아… 여기….”
남성의 표를 확인한 스태프가 손을 뻗으며 답했다.
“줄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 세 번째 라인 뒤로 가시면 됩니다.”
“…….”
스태프의 말에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표를 낚아챘다.
박순희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를 곁눈질로 쏘아보았고.
남성은 낮은 목소리와 작은 소리로 중얼댔다.
“아오… X발…. 이게 팬 미팅… 아이씨…. X 같네, 역시….”
욕설이 잔뜩 섞인 그의 중얼거림에 박순희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를 쏘아보던 눈길을 재빨리 거뒀다.
그가 한참 멀어져 가는 것을 본 박순희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뭐야, 저 미친 사람은? 진짜 음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