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89화 (289/303)

289화 #52 – 진가가 발휘되면 (2)

“오늘 대본 리딩,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부딪쳤고.

이곳에 있는 모두는 하나가 된 듯 소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짝짝-

작품을 향한 마음과 대본 리딩의 성공적인 자축의 의미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리고 배우들은 곧장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누었고.

내게 다가오는 후배 배우들.

“선배님,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연기 직접 보고, 너무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내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앞으로 같이 연기 잘 해봐요. 다들 고생했어요.”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요. 다음 촬영 때, 봅시다.”

그들은 내게 허리를 꾸벅 숙인 후, 박 감독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그때.

“저… 희성 씨.”

내게로 다가와 나를 부르는 사람.

다른 배우가 아닌, 투자사 장한민이었다.

의외의 인물의 부름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조금 더 당황케 만들었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연기 아주 잘 봤습니다.”

“아….”

장한민의 말에 바로 미소 짓거나 감사함을 표할 수가 없었다.

그전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남아 있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껏 내 연기에 대한 불신과 주연을 맡는 것에 대한 부정을 표했던 사람인 걸 알기에.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에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장한민은 곧바로 손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아까는 제가 희성 씨의 진가를 모르고 섣불리 말했던 것 같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아니 나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내 연기를 보고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다.

이 상황에 내가 그의 사과를 거절할 리도 없었고.

시작부터 그와 적대적인 관계로 출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곧바로 그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기… 정말 잘 봤습니다. 연기를 이렇게 잘하시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오히려 재치 있게 상황을 넘기려 애썼다.

“앞으로 제 진가를 더 보시게 될 겁니다. 장소에 구애를 받다 보니, 100프로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거든요. 하하.”

내 말에 장한민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영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주연 배우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한민이 나를 향해 보였던 불쾌한 행동들.

나는 그 행동의 원인을 잘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연기를 펼쳤고.

결국, 그와 나 사이는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아, 근데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장한민이 손을 놓으려는 나를 붙잡았고.

“예, 그럼요.”

“지금 소속사가 없으시던데….”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기획사 자체가 있기는 합니다. 근데 아직 공식 작업이 안 돼서….”

“아, 공식 작업이라면 어떤.”

그는 내 소속사에 대해 흥미로운지 질문을 이어갔고, 관심을 가지며 묻는 그에게 나는 답을 내놓았다.

“오래전부터 함께 일하던 실장님이랑 같이 회사를 나오게 돼서, 다른 소속사가 아니라 함께 일해 보려고요.”

“그럼 희성 씨가 1인 기획사를 차리시는 겁니까?”

“아니요. 저는 그저 같이 시작하는 멤버인 거고, 공식 기획사로 키우고 싶은 예정입니다.”

내 말에 그는 입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시구나.”

“예, 열심히 하면서 차차 만들어가 봐야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대단하십니다. 아무튼, 오늘 연기 너무 훌륭하셨습니다. 앞으로 작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대본 리딩이 끝난 이후,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시작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경찰.

즉, 액션 신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었다.

액션을 연습하게 위해 액션 스쿨은 꾸준히 다니며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날렵한 체중의 경찰을 표현하기 위해, 헬스장 또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할애하고 있었다.

“희성아, 오늘도 점심은 닭 가슴살이야?”

김 실장은 내 도시락을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퍽퍽한 닭 가슴살을 한 입 가득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목표 체중까지 가려면, 아직 조금 더 남았어.”

“근데 근육으로는 이미 된 것 같은데, 체중을 더 빼려고?”

“내가 말했던 내 대역 배우님이랑 비슷해 보이려면, 한 2킬로 정도 더 빼면 좋을 것 같아서. 게다가 그 체중이 더 날렵해 보여서 나을 것 같아.”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닭 가슴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데 잘되지 않을 수가 없지.”

“나 먹고, 오늘 액션 스쿨 가려고.”

“어제 갔으니까, 오늘 쉬어도 되는 날 아닌가?”

“그렇긴 한데, 코치님한테 연락해뒀어. 오늘도 간다고. 최대한 대역 없이 가야 좋으니까.”

액션 신이 많은 만큼, 가벼운 액션 신 몸을 날려야 하는 과격한 액션 신이 즐비했다.

보통 그중에 배우들이 소화할 수 있는 건, 상대 배역과 맞춰 진행하지만.

과격한 액션은 나와 몸이 비슷한 대역 배우를 이용한다.

스턴트맨이 나올 경우.

액션은 보기가 좋을 수는 있지만, 단점 또한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나와 체격이 비슷할지라도, 얼굴이 다르기 때문에 대역 배우가 나온다면 카메라를 먼 거리에서 잡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연기와 액션을 동시에 보여줄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액션은 즐길 수가 있지만, 관객들은 몰입이 깨질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그런 몰입이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대역을 쓰지 않고 내가 해내려고 했다.

그래야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몰입을 배로 만들 수가 있을 테니까.

“알겠어. 그럼 밥 먹고 액션 스쿨 갔다가, 바로 헬스장으로 가는 건가?”

“응, 액션 스쿨까지만 갔다가 이후 일정은 나 혼자 해도 괜찮아.”

“아니야. 같이 가서 체크도 해주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손을 휘이 저으며 답했다.

“형도 지금 사무실 준비하느라 바쁘잖아. 내가 혼자 해도 괜찮아. 형은 가서 일 봐.”

“그럼 나야 고맙지.”

내 촬영 준비와 함께, 김 실장은 소속사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서류를 떠나 회사를 키울 자금도 필요했고, 그러려면 투자도 받아야만 하기에.

여러 회사와 컨택 중인 것 같았지.

김 실장은 돈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굳이 내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내가 투자를 했지만, 이제는 그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마음을 알기에 굳이 김 실장에게 말을 묻지는 않았다.

“응, 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럴게.”

그때.

지이잉-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오랜만에 걸려온 최서빈의 전화.

나는 그를 확인하고 곧장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선배님!”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해?

“그럼요.”

-뭐 하고 있어?

“저는 이제 액션 스쿨 좀 가려고 합니다. 선배님은요?”

-나는 집이지. 이번에 작품 들어간다며?

“네, 역시 소식이 빠르십니다. 하하.”

-당연하지. 그래서 대본 리딩은 잘했어?

“예, 잘 끝나고, 이제 작품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배님은 요즘 뭐 하고 지내십니까?”

내 물음에 최서빈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 할리우드 진출해서, 나도 작품 준비하고 있다.

“정말요? 와아,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하하.

“당연히 축하할 일이죠. 언제 한 번 시간 내주십시오. 축하주 하셔야죠, 선배님.”

-좋지.

“할리우드 가시면 한참 또 못 뵐 거 아닙니까. 언제 시간 가능하세요?”

-그럼 내일 한 번 볼까. 가능해?

“예, 가능하죠. 내일 연락드릴게요.”

* * *

다음 날, 찾은 최서빈의 집.

할리우드 진출을 앞두고 있는 최서빈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장소는 술집이나 파티 할 장소가 아닌, 그의 집이었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최서빈의 집이었기에, 선물을 양손 가득 챙긴 채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열리는 문.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니, 최서빈이 양팔을 벌려 나를 환영했다.

“희성아, 왔어?”

“네,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어서 들어와.”

그의 손에 끌려 들어간 현관.

나는 집 입구부터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빠르게 굴렸다.

현관이 어찌나 넓은지 신발을 벗고도 몇 걸음을 걸어야 집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그리고 길게 펼쳐진 집, 복도.

“우와….”

감탄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태어나 본 집들 중에 ‘가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진희성의 몸으로 본 집 중에서는 단연코 엄청난 집이었다.

송유나의 집을 보고도 감탄을 쏟아냈지만, 최서빈의 클래스를 다시 실감하게 만드는 집이었지.

내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자, 최서빈은 그런 손님의 반응이 익숙한지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와. 집 구경 시켜줄게.”

“아, 네!”

거실로 가는 길게 뻗은 복도.

그 끝에 다다르자 고개를 젖히게 만드는 천장이 보였다.

아파트에서 나올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층고.

복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맨 위층.

그러니까 팬트하우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접했던 집이었다.

압도할 만큼 커다랗고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거실을 밝히고 있었고.

최서빈은 미소를 지으며 집을 소개했다.

“여기가 거실이고. 뭐… 집 소개는 여기 있으면서 하나씩 보여줄게.”

“네? 아… 알겠습니다.”

하나씩 보여 주겠다는 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집이 얼마나 크고, 방이 여러 개이기에 차례로 보여준다는 건지.

“아, 선배님. 여기 선물입니다.”

나는 미리 챙겨온 선물을 그에게 건넸고.

최서빈은 눈썹을 찡그리며 내게 답했다.

“빈손으로 오라니까, 뭘 이렇게 챙겨왔어.”

“에이,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요. 하하.”

“고마워. 우선 저 방으로 가자. 내가 세팅해뒀어.”

“네.”

그를 따라 들어간 곳.

당연히 주방일 거라 생각했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최서빈만의 술집 같은 룸이었다.

“이야….”

‘서빈 bar’라고 적힌 커다란 방.

그곳에는 양주, 샴페인, 와인 등 술이 벽면 가득 세팅되어 있었다.

“여기는 내가 가끔 지인들 불러서 술집처럼 놀고 싶어서 세팅한 방이야. 너도 알잖아. 우리가 어디 가서 편하게 술 마시지는 못하는 거.”

“그렇죠. 근데 선배님은 술집 못 가시겠습니다. 여기가 워낙 좋아서, 술집 갈 필요가 없겠는데요?”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내게 술을 건넸다.

“그런가? 그렇다고 내가 집에 배우들이나 지인을 많이 초대하지는 않으니까, 여기서 같이 마시는 배우도 네가 세 번째야.”

“영광입니다, 선배님.”

“영광은. 하하.”

챙-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고.

집에서 흔히 낼 수 없는 분위기 속에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선배님, 이번에 할리우드 가시는 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근데 어째 미국에서는 내가 희성이 네 뒤를 따라가네?”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제가 잘 닦아 뒀습니다. 저만 잘 따라오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이 자식아.”

최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너는 잘 되어가?”

“예,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그렇고. 작품 내용도 그렇고 느낌이 좋습니다.”

“다행이네. 내가 미국 쓸어올 테니까, 한국에서 연기 잘 하고 있어.”

“넵, 한국은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부딪치던 우리.

최서빈이 발그레해진 두 볼로 내게 말했다.

“우리 노래나 부를까?”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요?”

“이리로 와봐.”

최서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끌었고.

복도를 지나 끝 방으로 향하자, 방음벽으로 이루어진 방이 나타났다.

“여기 노래방 기계랑 다 있거든.”

“와아… 진짜 선배님 집은, 집이 아니라 천국 아닙니까?”

“그럼, 열심히 돈 벌어서 내가 다 만든 거야.”

“근데, 이 시간에 노래를 해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아파트인데….”

“여기 방음벽 설치하느라 돈 꽤 줬어. 새벽에 불러도 끄떡없어.”

최서빈은 방을 자랑하며, 노래방 기계 전원을 켰다.

“그리고 바로 옆방은 모니터링하려고, 스크린이랑 스피커 설치해 뒀는데. 거기서도 풀 사운드로 봐. 같이 방음 부스 설치해뒀어.”

“와아, 선배님 스케일은 진짜….”

내가 엄지를 치켜들자, 최서빈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자, 편하게 불러도 돼. 방음은 끄떡없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노래를 시작했다.

“그럼, 제가 한 곡 뽑겠습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최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네, 선배님.”

“너… 노래 좀 한다?”

“하하, 정말요?”

그를 바라보고 웃으며 답하자, 최서빈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어, 진짜로. 사실 나는 노래에 재능은 없어서 그냥 집에서 스트레스 푸는 용인데. 너 정도면 뮤지컬 해도 되겠는데?”

“뮤지컬이요?”

최서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뮤지컬….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고 좋습니다.”

“아냐, 뮤지컬 쪽이 진짜 재미있어. 나는 노래 때문에 포기하기는 했지만.”

“근데 뮤지컬은 매일 똑같은 공연을 반복해야 하니까, 힘들지는 않아요?”

내 물음에 그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매일 공연이 새로워. 나는 뮤지컬은 아니고, 노래 때문에 연극으로 해봤는데. 관객들이 매번 바뀌잖아.”

“그렇죠.”

“그래서 호응도 매번 다르고, 진짜 전율이… 말로 표현 못 해. 근데 주변에 뮤지컬 하는 배우들 보면, 그 짜릿함이 몇 배는 된다고 하더라.”

그의 말에 나는 웃음기가 호기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최서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조언했다.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뮤지컬 둘러보면서 고민해봐.”

“네,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분야라… 다음에 관람하러 가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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