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52 – 진가가 발휘되면 (1)
대본 리딩 당일.
유독 떨리는 대본 리딩이었다.
이 작품으로 들어오기 전, 블랙코미디 작품 대본 리딩까지 마친 상황에서 엎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후우… 떨린다.”
내 말에 김 실장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주먹을 들었다.
“잘하고 와. 이번에는 그럴 일 없으니까.”
파이팅을 외치듯 든 주먹.
그리고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블랙코미디 작품이 엎어졌던 것을 내내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응, 잘하고 올게.”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차 안에 훌훌 털어버린 채 대본 리딩실로 향했다.
[영화 ‘언더커버’ 대본 리딩]
문 앞에 붙여진 커다란 안내판.
나는 종이에 적힌 영화명을 다시금 확인하고, 긴 심호흡을 내뱉었다.
“후우… 잘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자 몇몇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고.
나는 밝은 미소를 장착한 채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인사에 상대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배우 손민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허벅지에 쓰윽 문지른 후, 내 손을 맞잡았다.
“함께 작품 찍게 되어 영광입니다.”
손민형의 말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저도 영광입니다. 앞으로 같이 잘해 봐요.”
“네!”
그와 짧은 인사를 마친 후, 옆에 앉은 배우들과 차분히 인사를 이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배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등장할 때마다 나를 비롯한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눴고.
몇몇 배우의 등장에 나는 감탄을 쏟아냈다.
너무나 탄탄한 배우들의 라인업.
조연이지만, 엄청난 경력의 배우들로 캐스팅이 되어 있었다.
감초 역할로 너무나 유명한 배우들.
그런 배우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보통은 한 작품에 그런 배우가 한 명 정도만 등장해도, 이목을 끄는데.
그러한 배우가 이 작품에만 벌써 세 명이 있으니, 감초 역할의 조연은 너무나도 탄탄했다.
더군다나 다른 작품에서 주연을 할 만한 배우들 또한, 이 작품의 조연으로 캐스팅되어 이곳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캐스팅만으로도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음이 확실할 정도였지.
나는 같은 장소에 모이기도 힘든 이 배우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배우 라인업… 장난 아닌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박 감독.
“안녕하세요.”
그의 등장에 배우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박 감독은 자신과 함께 들어온 중년의 남성을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 ‘언더커버’를 제작하게 해주시는, 투자사의 장한민 님이십니다.”
그의 말에 장한민이 곧장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장한민입니다. 저희 모두 한 배를 탄만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
장한민의 말에 우리는 박수로 화답했고, 박 감독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인사도 나누고, 준비한 뒤에 대본 리딩 시작하죠.”
“네.”
이어진 준비 시간.
배우들은 곧 시작할 대본 리딩에 앞서, 목을 풀기도 했고 대본을 펼쳐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박 감독은 장한민과 함께 우리의 옆을 지나치며, 인사를 나누고 배우들을 소개했다.
박 감독이 굽실거리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런 모습은 당연했다.
투자사에서 투자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만들어질 수가 없었을 테니까.
당연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골라 투자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감독이 투자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건 이 업계의 이치였다.
그가 ‘갑’이었고, 감독은 ‘을’인 관계.
박 감독은 가장 먼저 장한민을 데리고 내게로 다가왔다.
이유는 내가 주연이었기 때문일 터.
내게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박 감독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기는 이번 저희 작품에 주연을 맡은 배우입니다. 미리 미팅했는데, 연기는 말할 것도 없는 배우입니다.”
장한민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주연 배우에 내가 있음이 탐탁지 않다는 것을.
“아… 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장한민이 억지로 올린 입꼬리로 내게 답했다.
“예, 뭐… 박 감독님이 계속 푸시하신 배우님이라…. 연기는 잘하시겠죠?”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내 연기력에 대한 의심.
거기에 내가 주연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드러냈고.
그의 말투와 표정은 일부러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훑어보는 그의 태도.
이 상황을 중재라도 하듯, 박 감독이 너털웃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진희성 배우가 할리우드 진출까지 하고, 저번 시상식까지….”
박 감독의 말에 장한민은 한쪽 입꼬리를 휘며 답했다.
“할리우드… 좋죠. 근데 거기서 계속 버틴 게 아니라,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셨나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고, 그 질문에 결국 내 입이 열렸다.
“예, 할리우드에 진출했다고, 계속 할리우드에서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 좋은 작품이면 어디든 가서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하게 된 거고요.”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답했다.
사실 장한민의 태도가 불쾌하고 불편했지만.
이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
사람을 면전에 대고, 저런 태도와 말을 내뱉는 게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저 인간이 여기서만큼은 절대 갑이니까.
그리고 저자를 설득해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으니까.
장한민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애써 답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박 감독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
장한민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오늘 연기 잘 보겠습니다.”
“…예.”
그는 곁눈질로 나를 쓰윽 바라보고는 바로 옆에 있는 배우에게로 향했다.
그런 장한민을 보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단 하나.
여기서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법, 그뿐이었다.
내가 아닌 경력이 월등히 많은 배우를 주연으로 세우고 싶었다는 투자사.
그 생각을 사라지게 만들려면, 내가 연기로 보여주는 수밖에.
나를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 * *
대본 리딩실에서 나와 복도로 향하는 두 사람.
박 감독과 장한민이었다.
장한민은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박 감독님.”
“네.”
“제가 박 감독님 설득에 지금 저 주연 자리에 진희성을 앉히기는 했는데….”
그의 입에서 언급된 ‘진희성’의 이름.
박 감독이 황급히 복도 문을 닫으며 답했다.
“예, 한 번 믿어봐 주십시오. 연기는 확실한 배우입니다.”
“알죠. 근데 저희 회사 내부에서 이야기했을 때, 아무래도 이 작품에는 연기 경력이 탄탄한 배우를 원하는 거 아시잖아요. 믿고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좀 불안해서요.”
그의 말에 박 감독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한번 보시죠.”
“이번 작품이 특히나 주인공 연기가 8할인 작품 아닙니까. 저희 이번 투자금이 꽤 커요. 저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어서.”
“네, 저도 사활을 걸 작품입니다. 그래서 주연을 진희성으로 캐스팅한 거고요. 믿고 한번 봐주시죠.”
박 감독의 말에 장한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오늘 대본 리딩에서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캐스팅은 다시 고려할 생각입니다.”
“네, 그러시죠.”
박 감독은 진희성의 연기력에 확신이 있었지만.
너무나 완강한 투자사의 태도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나 진희성의 연기력이 부족해, 자신과 투자사 사이의 신뢰가 깨질까 두려운 것이다.
박 감독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본 리딩실로 발길을 옮겼다.
* * *
진희성과 박 감독에게 부담감이 실린 대본 리딩.
그리고 투자사 장한민의 따가운 눈빛 속에서 대본 리딩은 시작되었다.
첫 신의 포문을 연 건, 주연인 진희성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 마약은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의 연기에 배우들은 빠르게 몰입하기 시작했고.
진희성은 대본을 모두 암기했는지, 대본을 보지도 않은 채 연기를 이어갔다.
“저희가 꼭 해내겠습니다. 믿고 맡겨만 주신다면….”
“아직 조직의 꼬리도 못 잡은 놈들한테, 마약 단절은 무슨.”
“딱, 6개월만 믿고 맡겨주시면 저희가 어떻게든 잡아 오겠습니다.”
진희성은 간절한 표정과 함께 연기를 이어갔고.
상대 배역인 중년의 배우 역시 진희성을 바라보며 연기에 몰입한 채 호통을 쳤다.
“6개월? 아니, 3개월 안에 끝내.”
“그렇지만 서장님….”
“3개월 안에 대가리를 잡아 오든, 마약 조직을 없애든 뭐라도 해내.”
“…예, 알겠습니다.”
쾅-
그는 진희성을 쏘아보며 책상을 내려쳤다.
“3개월 안에 뭐라도 하지 못하면, 너네 팀이 해체될 줄 알아!”
그의 호통에 진희성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첫 번째 신이 끝나자마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고.
다음 장면의 배우들이 연기를 펼쳐나갔다.
그리고 박 감독의 시선은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 배우들이 아닌, 장한민에게로 말이다.
그의 눈치를 보듯 곁눈질로 장한민을 쓰윽 살폈고, 이내 장한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에 진희성의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점수는 후하지 않다는 것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장한민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그의 시선 끝에는 진희성이 닿아 있었다.
장한민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연기야 잘하기는 하는데. 저 정도 실력으로는… 흐음….’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대본 리딩.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영화 ‘언더커버’의 핵심 장면.
박 감독부터 장한민까지 눈여겨보고 있는 신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은 한참 이어진 대본 리딩에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현장감까지 가미할 정도로 몰입해,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회장님은 곧 오신다고 하니까, 여기서 기다리시죠.”
다가온 진희성의 차례.
진희성은 이 신을 오래 연습하고 공들인 만큼, 차분하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요?”
“워낙 쉽게, 아무나 보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요.”
“아무나라…. 그래서 물건은?”
진희성은 턱을 치켜들고 상대 배역을 내리깔아 보며 말했고.
상대 배역 역시 진희성을 쏘아보며 음흉하게 입을 찢었다.
“물건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회장님 오시기 전에, 테스트 한번 하시죠?”
순간 빠르게 흔들리는 진희성의 동공.
그리고 진희성의 옆에 있는 배우는 그에게 마약을 전달하듯 자신의 앞에 노트를 내밀었다.
그런 모션을 단번에 알아챈 진희성은 노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테스트… 해야지.”
“이 정도 물건은 직접 확인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왜요, 안 되시겠습니까?”
진희성을 의심하듯 묻는 상대.
그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희성은 마약을 해야만 했고.
곧장 앞에 놓인 노트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정말 마약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흡입을 하는 모션을 취했다.
“흐읍… 흡!”
그의 소리에 대본 리딩실의 배우들은 놀라 진희성을 흘긋 바라보았고.
박 감독과 장한민 역시 진희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으아아…!”
진희성은 울부짖듯 소리치며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고개를 천장으로 홱 젖혀 목이 꺾일 듯 흔들었다.
“헐….”
그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배우는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고.
순간 자신이 내뱉은 소리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정도로 진희성의 연기에 놀란 배우는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희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약을 흡입하는 연기를 이어갔다.
“X발…. 으으윽!”
몸을 주체할 수 없이 흔들고, 뒤틀리는 몸짓에 의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진희성의 팔다리.
이건 연기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묘사를 표했고.
그 모습에 배우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영화를 보듯 진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악… 으으….”
계속해서 떨리는 몸에 진희성은 결국,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쿵-
책상 위에 힘이 풀린 몸을 축 늘어트렸다.
잠시 몇 초의 정적이 흘렀고, 이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짝짝짝-
“와아… 미쳤다.”
“헐, 진짜 이게 연기라고?”
너 나 할 것 없이 배우들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고.
박 감독은 입을 떡 벌린 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읊조렸다.
“…됐다!”
짝짝-
다시금 손뼉 부딪치는 소리에 진희성은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
다름 아닌 장한민이었다.
그는 진희성의 연기에 놀랐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진희성을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와아…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장한민은 진희성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곧장 부딪치던 손뼉을 멈추고 그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