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51 – 누구를 위한 배려 (4)
박 감독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내가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유.
그러니까 박 감독과 애초에 미팅을 잡게 된 이유가 ‘송유나’였다.
박 감독의 차기작에 송유나가 주연 출연을 약속하면서, 내가 이번 작품 캐스팅 물망에 오른 것이지.
송유나의 덕이었다.
그리고 송유나의 탓이었고.
그래서 나는 더욱 이 작품에 출연하기가 싫었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지.
여자 친구인 그녀의 캐스팅을 내가 쥐고 흔드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좋은 의도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 좋은 의도가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그 의도 그대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부담을 떠나, 이렇게 영화를 찍게 된다면 나는 매 촬영 때마다, 그리고 매 신마다 그녀를 떠올릴 터였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오롯이 내 힘이 아닌 송유나의 덕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영화였지만, 포기하려고 했던 이유였다.
하루라도 빨리 내 의사를 밝혀 영화 촬영이 밀리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박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유나 씨가 아니라, 희성 씨를 보고 캐스팅한 거라고요.”
“그럼… 유나가 제 캐스팅을 철회한 것도 맞는 거고요?”
그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자신이 제안했던, 희성 씨 캐스팅… 없던 거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아….”
나는 박 감독의 말에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이 자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송유나가 나와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그대로 진행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 표정과 말투를 보고, 박 감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혹시… 그거 때문에 오늘 보자고 한 건가요?”
“예, 저는 혹시나 박 감독님께서 송유나 배우의 차기작 제안으로 저를 써주신 거라면, 작품에 제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곳이 울릴 만큼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그게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네.”
박 감독은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서는 나를 비웃는 게 아니라.
어쩌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박 감독은 웃음을 모두 털어냈는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희성 씨.”
“네, 감독님.”
“희성 씨, 좋은 배우입니다.”
“…….”
연기를 잘하는 배우.
자신들의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
마스크가 잘 맞는 배우 등등.
여러 이야기를 감독들에게 들어봤으나.
‘좋은 배우’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희성 씨, 좋은 배우라고요. 연기는 물론, 제가 생각한 배역에 딱 맞는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더군다나 그 위치에 있는 배우임에도 신인과 다름없이, 아니 저희가 놀랄 만큼의 열정도 가지고 있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감독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사실… 저희 투자자분들 쪽에서는 원하는 주연 배우의 성향이 있었어요. 현재 폼이나 커리어보다는 경력을 중요시하셨거든요. 물론, 희성 씨도 경력이 있는 배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 치의 거짓이나 장난기조차 섞이지 않은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투자자 측에서는 오래된 경력, 그거 하나 보셨어요. 당연히 그 경력의 시간은 희성 씨의 배를 원하신 분들이고요.”
박 감독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엑스트라, 단역부터 시작한다면 오래된 경력은 맞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경력은 내가 언제 배우의 길에 발을 들었느냐가 아니었다.
이미 업계에서 이름을 날린 후부터의 경력을 인정하지.
그리고 나는 업계에서 말하는 경력으로 따지자면, 그리 오래된 배우는 아니었다.
운이 좋게도, 그리고 내 노력으로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스타덤에 오른 배우였다.
단역에서 조연, 이후 주연과 할리우드까지.
결코 ‘운’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 수가 절대 없는 라인이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투자자 측에서 생각하는 배우의 폼 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은 맞는 말이지.
박 감독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담아내며 말했다.
“그런데 저희가 설득했습니다.”
“네?”
“희성 씨가 보여주신 연기와 열정. 그간 희성 씨가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더라고요.”
나에 대한 박 감독의 생각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의 말에 경청했다.
남의 입에서 나에 대한 평가와 의견을 듣는 건, 생각만큼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날 보여주신 대본에 대한 고찰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배우라면, 뭐든 보여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어요.”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박 감독의 이야기에 나는 얼떨떨한 마음이 가장 먼저였다.
오늘 나는 이 영화를 끝내러 온 것이었으니까.
“송유나 배우도, 투자자분들도 모두 제 캐스팅에 관여하지 않으셨어요. 희성 씨와 함께 가고 싶은 건 제 확신입니다.”
그는 손을 뻗어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맞잡은 채 흔들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대작 한번 만들어 봅시다!”
* * *
박 감독과의 미팅을 마친 후.
나는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목을 가다듬으며, 곧장 송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감독을 만나러 오기 전.
그녀의 말을 오해한 건 나였으니,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송유나는 신호가 몇 번 울리지 않았음에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리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필수였다.
내게 잔뜩 화가 나 있었을 터.
나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나,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사과가 먼저였지.
“유나야, 미안해.”
-갑자기 전화해서 웬 사과야. 그렇게 화낼 때는 언제고.
“나는 네가 날 생각해서 박 감독님께 말씀 안 드린 줄 알았어. 방금 박 감독님 만나서 이야기했고. 내가 오해했어, 정말 미안해.”
-거봐. 내가 말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근데 나는 영화 측에서 계속 나랑 작품을 하자고 하니까. 당연히 네가 날 배려해서 말 안 했다고 생각했어. 오빠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녀는 내 말에 서러웠는지 숨을 꼴딱꼴딱 넘기며 답했다.
-봐, 내가 말했다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믿어!
“미안해, 오해했어.”
-흥, 진짜 미워, 짜증 나….
그녀의 말에 서러움이 섞여 있었지만, 절대 나를 향한 적대적인 마음은 없었다.
내가 아는 송유나는 그러했다.
“뭐 해, 집이야? 오빠가 갈게.”
-몰라….
“지금 갈까?”
-그러든가… 근데 뭐야, 박 감독님 방금 만났다는 건….
“응, 작품 하기로 했어.”
-정말?
“응, 최종적으로 합류하기로 했어. 대본 리딩 날짜 잡혀서, 확정 짓고 왔지.”
그녀는 언제 슬픈 목소리를 내뱉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우와, 진짜 잘됐다. 거봐, 내가 잘될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고마워.”
송유나는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어디야?
“나 방금 미팅 끝나고 나왔지. 나오자마자 전화한 거야.”
-아니, 우리 집 온다며. 언제 와.
“하하, 알겠어. 얼른 갈게.”
-빨리 와. 우리 파티하자!
“파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분주하게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어, 오빠 작품 들어가는데, 당연히 파티 해야지. 빨리 와… 아니, 천천히 와. 나 파티 준비해야 해.
송유나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파티씩이나?”
-당연하지! 오빠 WG 엔터 나와서 하는 첫 작품이잖아. 이 정도는 해줘야, 힘나서 작품하지. 아무튼, 얼른 끊어. 나 파티 준비할 거야.
“천천히 해. 금방 갈게, 가서 같이하자.”
송유나의 밝아진 모습.
그리고 다시 웃는 우리의 모습에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져왔다.
* * *
펑-!
코르크 마개가 샴페인 병에서 멀어지며, 경쾌한 소리를 뿜어냈다.
“축하해!”
그녀는 터지는 샴페인을 보며 내게 소리쳤고.
“고마워.”
나는 그녀를 향해 화답한 뒤, 술잔에 샴페인을 곧장 채웠다.
챙-
그런 후 우리의 술잔은 하늘 높은 곳에서 청아한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언제 준비했는지 테이블을 가득 메운 음식들.
한눈에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딸기가 가득한 생크림 케이크까지.
완벽한 파티 테이블이었다.
나는 샴페인을 들이켜고, 테이블을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언제 이렇게 빨리 준비했대?”
내 말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답했다.
“나 송유나야, 한다면 하는 여자라고.”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고마워. 이렇게 챙겨줘서.”
“뭐… 남자 친구 파티 정도야.”
챙-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맞추며 잔을 부딪쳤고.
한 모금의 샴페인을 더 들이켜자, 감회가 새로웠다.
“작품 확정 받고 이렇게 파티 하니까, 신인 시절로 돌아온 것 같다.”
“그래?”
“응, 예전에는 작품 하나 따는 게,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아무튼 파티 하니까 신인 때로 돌아간 것 같고, 좋다는 말이야.”
내 말에 송유나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뭐… 진희성 배우는 그럴 만하지. 나는 워낙 스타라, 작품이 앉아 있기만 해도 쏟아지거든.”
그녀의 장난기 어린 말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럴 만한 배우라는 것에 대한 게 아니라.
송유나는 대한민국 배우계를 뒤흔드는 배우였으니까.
“그게 내 여자 친구야.”
눈썹을 들썩이며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짜 대단한 여자 친구 뒀다는 것만 알아둬.”
“네, 감사해요. 송유나 배우님. 저랑 만나주셔서.”
“그럼요.”
그녀의 너스레에 장단을 맞춰주며, 우리는 그저 앞에 있는 서로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좋다.”
송유나는 샴페인 잔을 든 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내 시선 역시 그녀의 눈을 향해 있었다.
“그러게. 이렇게 있는 게 진짜 꿈같네.”
1만 년의 시간을 거치며 진정으로 사랑한 그녀를 앞에 두고.
그녀와 서로 사랑하고 애틋한 사이가 된 이 순간.
단순히 좋다고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아무런 근심 고민 없이,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
아니, 이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적은 지금껏 없으니까.
그녀와 함께 대화를 하고,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이 장면이 내게는 정말 꿈만 같은 순간들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벅찬 감정.
자꾸만 입에서는 미소가 스르르 번지고.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지금 이 순간이 마냥 소중했다.
그렇게 매시간, 매초를 소중하게 보낸 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럼 이제 대본 리딩 곧 들어가는 거야?”
송유나는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이제 캐스팅도 끝나서 날짜도 다 잡혔어.”
“이야… 그럼 이제 바빠지겠네.”
“그렇지. 그래도 틈틈이 유나 만나야지.”
송유나는 턱을 치켜들며 내게 말했다.
“그건 당연하지!”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물었다.
“아, 근데 작품에서 무슨 역할이야?”
“나… 천재인 척하는 사업가.”
“천재면 천재지, 천재인 척은 뭐야?”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며 물었고.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데시벨을 낮춰 입을 열었다.
“어떤 역할이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