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51 – 누구를 위한 배려 (3)
의아해하는 건 김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네가 미팅도 망치고, 그 작품에 관심 끊어버린 것 같기에, 아예 다른 작품으로 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박 감독이 날 주연으로 뽑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황당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황당한 사람은 내가 아닌, 김 실장일 터.
분명 박 감독의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나였으니까.
“그랬는데….”
내가 작품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 오로지 송유나 때문이었다.
그녀로 인해 화가 나서 작품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송유나 그녀를 위해서였다.
그녀의 차기작을 핑계 삼아, 내가 이번 작품의 주연공이 되는 게 싫었고.
그로 인해 그녀가 발목이 잡힐 것 같은 게 용납되지 않았지.
김 실장은 이런 일을 알 리가 없었기에 나를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그랬는데, 박 감독님이 희성이 너를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싶으신 거잖아, 지금.”
“…….”
“고민할 게 있나?”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형, 나 이 작품은 안 하려고.”
“대체 왜. 감독, 작가, 투자사, 대본까지 완벽한데?”
그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이 작품이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서.”
“희성이 너도 이 작품 끌린다고 했었잖아. 느낌이 좋다고. 미팅이 잘 안 된 것 같아서 포기했던 건데. 캐스팅된 거면 대박인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김 실장은 도무지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박 감독님이 희성이 네가 마음에 든 건데, 뭐가 고민인 건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박 감독이 주연 배역에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지금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가 지금 대본 리딩 연락을 받은 건… 송유나일 것이다.
그녀가 박 감독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렇게 송유나와 언성을 높여 가면서까지 내 뜻을 전했는데.
결국, 송유나는 박 감독에게 자신의 제안을 접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흘러온 상황에 그녀를 향한 서운함이 아니라, 화가 날 것만 같았다.
내가 했던 이야기를 무시한 건가?
차기작에 송유나가 걸려 있음을 알고도 내가 이 연기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섭섭함이 들 정도였다.
내가 송유나를 떠올리며 김 실장에게 답하지 않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아…?”
“아, 응.”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김 실장에게 일에 대해서는 거짓 없이 진실만을 털어놓았지만.
이 이야기는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송유나를 위해서도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송유나로 인해 이 작품을 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이 상황을 그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지.
나는 애써 굳은 표정을 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형, 미안한데 나 잠깐 통화 좀.”
“그래.”
휴대 전화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 실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야. 여기서 통화해. 나 사무실 업무 좀 보고 올 테니까.”
“고마워.”
김 실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송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감독에게 사실을 묻기 전에, 그녀에게 묻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절 의사를 전달한 건, 박 감독이 아닌 송유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이 상황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난 통화처럼 송유나와 언성을 높이며, 감정이 격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건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 연인 사이인 우리에게 득이 되는 건 없었지.
신호음은 얼마 울리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전히 차가운 그녀의 말투.
지난 일로 내게 상했던 감정이 깨끗하게 풀리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 일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깊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다.
서로 피하기에 급급했었지.
그 주제가 나오면 서먹해지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이 주제는 다시 우리의 대화에 불을 지폈다.
“유나야.”
-어.
“내가 박 감독님한테 말씀드리라고 했잖아.”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을 내뱉었고, 그녀는 내 말에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근데, 뭐.
“근데가 아니라. 하라고 했는데, 왜 안 해. 그때 우리 그렇게 통화하면서 내 마음 솔직히 다 말했잖아.”
-알아. 나도 그래서 알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네가 무슨 마음으로 배려한 건지 다 알겠어. 그래도 유나 너 걸고,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해?”
송유나는 내 말에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싫다며. 그래서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오빠 뜻 알겠다고 한 거고.
“응, 근데 대체 왜 박 감독님한테 이야기를 안 한 건데?”
-진짜 무슨 말이야. 나 그날 바로 박 감독님한테 전화했어.
“뭐?”
-전화했다고!
“정말 했어?”
-그래, 이것도 내가 오빠 배려해서 숨기는 것 같다는 거야?
송유나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고.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그녀였지만, 나 역시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박 감독에게 말을 전하지 않았으니, 내가 캐스팅됐을 터.
“그런 거 아니야? 유나야, 이건 배려가 아니야.”
-어이없어. 나 통화했다고. 뭐, 통화 내역이라도 보내줘?
“근데 왜 내가 대본 리딩을 해. 네가 전달을 안 했으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가 수화기 너머로 소리쳤다.
-나야 모르지. 그렇게 내 말 안 믿을 거면, 오빠가 감독님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든가!
송유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안 믿는 게 아니라, 유나 네가 나를 또 생각한다고 일부러 이야기를 안 했을까 봐 물어보는 거지.”
-됐어. 오빠 진짜 미워.
그녀는 잔뜩 삐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박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는 그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지.
박 감독에게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나를 주연으로 써달라는 제안을 정확히 거둬들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하아… 그래. 더 이상 유나랑 이러지 말고, 박 감독님이랑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
결국, 나는 송유나가 아닌 박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주말 오후.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며 휴대 전화를 뒤적이는 그녀.
박순희는 오늘 하루도 빠짐없이 진희성을 검색했다.
“우리 희성 오빠, 턴테이블 엎어진 이후로 영 소식이 없네.”
이제 진희성을 검색하면 뜨는 기사는 작품이 아닌, 송유나와 관련된 열애설이었다.
“아오, 저거 둘이 커플 티 아니고, 희성 오빠 데뷔 때부터 입던 옷인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자꾸 송유나랑 기사 내는 거야.”
박순희는 심통이 난 얼굴로 송유나와 진희성의 공식 석상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송유나랑 사귀는 거… 그래, 우리 오빠도 사람이니까 연애는 해야지…. 나이도 있고, 응원은 하기는 하지.”
말과는 달리 박순희의 입에서는 한숨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하아… 자꾸 오빠가 아니라, 송유나만 나오니까 덕심이 예전 같지가 않다….”
이제 진희성의 사진을 보아도, 예전처럼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녀는 인터넷을 끄고, 찜찜한 기분을 풀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뭐 해?”
-나 바빠.
“아, 왜. 너 오늘 집이라고 했잖아.”
-응, 언니 지금 우리 트윈스 보느라 바쁘시다.
“트윈스?”
-어, 이번에 데뷔한 트윈스를 모른다고?
“가수야?”
-하아… 우리 순희, 너 너무 진희성한테만 꽂혀서 음악 방송 안 본 지 꽤 됐구나…. 안타까워라.
“아, 뭐야. 나도 볼래.”
-그래, 너네 희성 오빠 연애도 하잖아. 이제 트윈스로 갈아타라. 진짜 귀엽다고. 나 벌써 앨범 n차 구매 중이시다.
“트윈스… 오케이. 끊어, 나도 봐볼래.”
-그래, 빨리 끊어주세요. 우리 트윈스 음악 방송 보러 가야 해.
“알겠어, 끊어.”
전화를 끊자마자 박순희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장 가수 트윈스를 검색해 그들의 무대 영상에 집중했다.
“뭐… 귀엽긴 하네.”
그렇게 트윈스의 영상 두 개가 끝나가고.
박순희의 마우스는 트윈스 다음 영상이 아닌, 진희성의 연기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진희성의 얼굴.
그 모습에 박순희는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쏟아냈다.
“와아… 나 이 영상 벌써 100번도 더 본 것 같은데, 보고 또 봐도 설레잖아….”
박순희는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진희성의 영상을 몇 시간 내내 보았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희성 오빠를 어떻게 벗어나.”
박순희는 다시 진희성의 팬 카페 ‘진희성수기’를 클릭해 그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 너무 잘생겼잖아.”
카페에 사진을 올리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진 한 장.
진희성과 최서빈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맞다, 최서빈 해외 연예 기획사 업체랑 미팅 중이라던데, 이제 할리우드 가는 건가?”
그녀는 진희성과 평소 친분이 있는 최서빈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우리 오빠, 최서빈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좋았는데… 연애하더니 최서빈이랑 잘 만나지도 않는 거 같네. 이번에 할리우드 가면, 더 멀어지는 거 아니야?”
박순희는 문득 떠오르는 송유나의 존재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그냥 연애잖아. 뭐… 결혼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진짜 결혼을 하지는 않겠지?”
* * *
박 감독과 통화 후,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대본 리딩 날짜가 다가오기 전, 하루라도 빨리 그와 이야기를 끝내야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전화로만 할 수는 없었기에, 박 감독과의 자리를 급히 만들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네, 희성 씨. 대본 리딩 날짜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 보자고 해서 놀랐어요.”
그의 말에 나는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본론을 꺼냈다.
굳이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뒤, 작품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 대본 리딩 날짜 오늘 매니저한테 전달받고, 바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급히 연락드렸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들썩였다.
“네, 매니저분과 날짜도 다 협의했는데, 날짜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대본 리딩 직전에 이렇게 말씀드리게 돼서 죄송한데, 작품 캐스팅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박 감독은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캐스팅하신 이유가 유나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거라면, 마음 써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출연을….”
박 감독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어 내 말을 막았다.
“아, 유나 씨한테 그거 아직 못 들었나?”
“예?”
내 말에 놀라기는커녕, 박 감독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유나 씨한테 이미 연락이 왔었는데. 자기가 했던 제안, 그러니까 희성 씨 주연으로 써달라는 부탁 철회하겠다고. 그러지 말아 달라고.”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눈꺼풀을 깜빡였다.
뭐야….
송유나가 이미 통화를 했다는 게 사실이었잖아?
그럼 대체….
분명 나를 주연으로 쓸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그럼, 대본 리딩 날짜는 왜….”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흐름에 박 감독에게 물었고.
그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답했다.
“그거랑 별개인 거죠. 우리가 이것저것 따져봤는데, 이 배역에 희성 씨가 제일이더라고요.”
“…네?”
“유나 씨랑은 상관없이, 내가 희성 씨를 캐스팅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