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84화 (284/303)

284화 #51 – 누구를 위한 배려 (2)

“형, 데려다줘서 고마워.”

나는 차가 집 앞에 멈춰 선 것을 확인하며 그에게 말했고.

김 실장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희성아, 혹시 미팅 때 무슨 일 있었어?”

미팅을 끝내고 내려와 차에 타자마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미팅 룸 문을 뚫고 나오는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고.

그 대화 내용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었다.

어지러운 마음에 김 실장에게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내 표정을 보고, 그리고 꾹 다문 입을 통해 김 실장은 미팅이 망한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휘이 저었다.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열심히 준비한 미팅이니까,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서 좀 쉬어.”

“어, 고마워.”

나는 그에게 내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려 문을 열었고.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가자마자 김 실장이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희성아!”

그 목소리에 나는 발길을 멈춰 세웠고.

“응?”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고민할 일 있으면 몇 시든지 연락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말없이 손을 높이 뻗어 흔들었다.

터덜터덜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박호찬 감독의 작품 대본.

그 대본을 빤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열정을 펼쳤던 미팅.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다시 올라갔던 미팅 룸.

그 앞에서 우연히 듣게 된, 캐스팅의 비밀….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 나를 혼란에 가뒀다.

대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작품… 진짜 하고 싶었는데, 하는 게 맞는 건가….”

사실 눈 딱 감고 이 작품에 들어간다고 해도 나쁠 건 없었다.

실제로 내게 주어진 조건도 너무 좋았고, 더군다나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끌렸으니까.

송유나로 인해 내가 캐스팅에 올랐다고 하지만,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내가 조연급 배우가 아닌 주연급 배우이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박 감독 쪽에서도 내가 급이 떨어지는 배우라고 생각했다면.

송유나가 차기작을 하겠다는 조건을 던졌을 때, 그 딜을 받지는 않았겠지.

박 감독 역시 타당한 딜이었기에, 오케이를 했을 터.

무엇보다 지금 내 소속사는 1인 소속사나 다름없었고.

이미 WG 엔터 때문에 한번 작품이 엎어진 상황 아닌가.

여기서 박 감독 작품의 주연을 맡게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기회였다.

“그래, 어차피 저들은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줄도 모르잖아. 눈 딱 감고… 하자.”

나는 감았던 눈을 번뜩 뜨고, 앞에 놓인 대본을 집어 들었다.

대본을 바라보자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 마음까지 뒤흔들었던 대본.

이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상상만으로도 벅차왔다.

그 정도로 나는 수없이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지.

“해도 돼. 확실히 좋은 기회잖아…!”

송유나의 이야기로 시작된 작품.

하지만 다짐하면 할수록 나를 붙잡는 건, 송유나였다.

엄청난 기회라는 건 알지만, 근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차라리 송유나가 제작비를 투자했다면 또 모를까.

그녀가 이번 작품에 참여한 기여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기작의 주연으로 송유나를 걸고, 이번 작품의 주연을 나로 쓴다라….

생각하면 할수록 작품에 다가서려는 나를 스스로 붙잡았다.

“하아… 그래, 이건 진짜 아니지.”

사람 대 사람의 인연이 완전히 대등할 수는 없다.

특히나 그게 사랑하는 사람인 연인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런 연인 관계에서 한쪽에 폐를 끼치는 상황이 되면, 그 관계는 평화롭게 유지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폐를 끼친 사람은, 그러니까 나는 계속 이 상황을 떠올리게 될 거고.

송유나를 만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유나를 걸고 작품에 들어가는 건 안 돼.”

탁-

나는 대본을 뒤집어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냈다.

어떻게든 대본을 향한 마음을 떨쳐내려 애쓴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안 되는 건, 욕심내지 말자. 이건… 진짜 아니야.”

미팅 룸에 두고 왔던 휴대 전화.

나는 그걸 꺼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대 전화만 쳐다보아도 그들의 대화가 떠올랐으니까.

“그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말하자.”

곧장 송유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이 울림과 동시에 내 심장 박동도 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

-여보세요?

“유나야, 통화 가능해?”

-응, 나 촬영 아까 끝났지. 오빠도 미팅 끝나고 왔어?

그녀의 밝은 목소리.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나는 그녀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어, 끝나고 집에 왔어.”

-뭐래, 박 감독님이 완전 좋아하시지? 당장 계약하자고 했어? 대본은 어때?

송유나는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유나야, 박 감독님 작품 주연, 이거 네가 만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박 감독님이 날 원한 게 아니라, 네가 날 원하게 만든 거… 맞아?”

내 말에 송유나는 음 소거라도 한 듯 입을 꾹 닫았다.

“이 작품 주연 배우가 내가 된 게, 모두 유나 네 뜻이냐고.”

-…아니야.

송유나는 조용히 읊조렸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 주연하게 해주면, 유나 네가 차기작 같이한다고 했다며.”

이 일에 대해 발뺌하던 송유나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유나야, 나 이런 거 바라지 않아. 너한테 바란 적도 없었고.”

-하아…. 박 감독님이 이야기한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 이 작품 안 해, 아니 못 해.”

송유나는 내 말이 끝나자 나를 말리듯 소리쳤다.

-왜 안 해?

“뭐?”

-그냥 해도 되잖아. 아니, 해도 되는 거잖아.

“내가 이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해.”

-못 할 건 또 뭐야?

“내가 이 작품 하면, 네가 차기작을 하기로 한 거잖아. 널 인질로 삼아 하는 건데,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하겠어?”

송유나는 내 말에 울분을 터트리듯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나 어차피 차기작, 박 감독님이랑 하기로 했어. 그 차기작 대본 보고서 마음에 들어 내가 주연하기로 결정한 거고. 기왕 할 거, 이번 작품은 오빠가 하면 좋지 않나 싶어서 제안한 거야.

“유나야, 내가 언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

-아니…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기왕 내가 차기작 할 거니까, 오빠 이야기해본 거지. 나는 좋은 의미로 한 건데.

“아니, 넌 좋은 의미로 말한 건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나 끼워 팔기 된 거잖아.”

-끼워 팔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더 화가 나는 건 뭔 줄 알아? 솔직히 좋은 기회인 거 알고, 그래서 알고도 혹했고… 그런 내 자신한테 쪽팔리고 자존심 상해.”

나는 답답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푹푹 누르며 말했고.

송유나는 내 말에도 언성을 높였다.

-연인끼리 서로 돕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그냥 좀 오케이 해도 되잖아. 그게 안 돼?

“어, 나는 안 되겠어. 그냥 취소해줘.”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남자라고 자존심 지키는 게 아니야. 그냥 연인 대 연인으로 이렇게 되는 거 너무 싫어. 내가 너한테 피해 주는 입장이 되는 거 같거든.”

서로 굽히지 않는 대화가 오고 갔다.

송유나는 계속되는 내 확고한 생각에 결국, 높였던 언성을 낮췄다.

-피해 주는 거 정말 아니고… 말했잖아. 진짜로 나 차기작 주연하기로 했다고.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나 작품 넣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알겠어, 그렇게 싫다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았어.

뚝-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깔린 대화였지만, 결국 그 배려는 서로에게 닿아 이해를 맺지는 못했다.

높아진 언성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끝내 우리는 언성을 낮추지 못한 채 전화를 끝맺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애써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면, 송유나는 분명 내게 작품의 주연으로 설득하려 할 테니까.

나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맞지.”

책상에 밀어뒀던 대본.

나는 그 대본을 다시는 보지 않기 위해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 * *

“진짜 어이없어!”

송유나는 진희성과 통화를 끝낸 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억지로 밀어 넣은 것도 아니고, 차기작을 하니까 겸사겸사 박 감독한테 말한 건데. 이게 이렇게나 거부할 일이야?”

그녀는 진희성에 대한 서운함을 침대에 놓인 곰 인형에게 토로하듯 소리쳤다.

“완전 서운해. 내가 여자 친구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송유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박 감독한테 돈을 줬어, 뭘 했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손등을 가린 잠옷으로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힘든 거 아니까… 직접적으로 해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도와주고 싶었던 건데. 나 진짜 무리해서 한 거 아니고, 내 위치 이용한 것도 아니고, 정말 차기작 하니까 추천한 건데….”

송유나는 억울함을 곰 인형에 쏟아냈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훌쩍였다.

“진짜 억울해…. 내 마음 하나도 모르고.”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송유나는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진희성… 짜증 나. 진짜 미워.”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

송유나는 심호흡을 내뱉으며 안정된 호흡이 되자,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진희성이 아닌, 박 감독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감독님, 저 송유나예요.”

-네, 유나 씨.

“감독님, 있잖아요….”

* * *

박 감독의 작품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작품이 떠오를 때마다 송유나를 떠올렸다.

그러면 작품은 감쪽같이 눈앞에서 흩어졌다.

다른 대본으로 그 대본을 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수많은 대본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희성아.”

김 실장이 회의실에 앉아 대본을 살피는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재촉하듯 말했다.

“형, 나 이 대본들 다 봤는데, 이거 말고 다른 것들은 더 없어?”

“더?”

“응, 영 끌리는 게 없네. 있는 대로 좀 더 가져다줬으….”

김 실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희성아, 그게….”

“무슨 일 있어?”

그는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 박 감독님 작품 말이야. 그거 정말 안 하는 거야?”

김 실장에게 박 감독 작품에 송유나가 연계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그 이야기를 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저 작품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고, 미팅 또한 잘 풀리지 않았다는 핑계로 둘러댔었다.

“응, 말했잖아, 미팅도 잘 안 됐다고. 괜히 떠나간 버스 붙잡지 말고, 빠르게 다른 버스 찾아야지.”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나 방금 박 감독님한테서 연락 왔어.”

“연락이 왔다고?”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되물었다.

“그 작품, 대본 리딩 날짜 알려주셨어. 당연히 주연은 너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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