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51 – 누구를 위한 배려 (1)
이른 아침.
오늘 출근은 서재가 아닌, 사무실로 향했다.
이젠 어엿하게 생긴 사무실.
김 실장의 빠른 준비로 사무실이 갖춰졌기에.
연습은 집에서 하더라도, 김 실장과 일 이야기는 더 이상 집에서 나눌 필요가 없어졌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WG 엔터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공간이지만, 있을 건 모두 있는 회사였다.
사무실 직원부터 나누어진 공간들까지.
이제 막 시작한 엔터 회사치고는 꽤 갖춰졌다고 할 수 있었다.
“희성아, 왔어?”
“응, 사무실이 갈수록 더 회사다워지는데?”
내 말에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도 엔터 회사처럼 보이잖아. 하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형, 진짜 고생 많았겠네.”
내가 다음 작품을 고르는데 매진해 있는 동안.
김 실장이 회사를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쓴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에이, 고생은 뭐. 너도 같이 고생했지.”
“천천히 해도 되는데, 형이 빨리 자리 잡느라 꽤 고생 많았지.”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코를 찡긋거렸다.
“아니야.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지. 그래야 희성이 너 다음 작품 들어가기 전에, 어엿한 소속사를 가지고 가지.”
“그래서 그렇게 서두른 거야?”
“그럼, 그래서 형님이 무리 좀 했지. 아무도 내 연예인 못 건들게 만들어야 하니까.”
김 실장의 말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런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WG 엔터를 나와 작품이 엎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실장이 문득 술을 마시고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에게 내가 힘이 돼주지 못해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배우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WG 엔터에서 어떠한 압력도 쓰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여러 생각에 내가 더 힘을 키워야겠다, 다짐하며 앞을 향해 달리려 하고 있었는데.
김 실장은 그런 내게 자신이 WG 엔터를 막아주지 못해 미안함을 항상 담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의 마음에 나는 성공에 대한 의지를 조금도 풀지 못했다.
오히려 성공에 대한 갈망에 목이 말라왔다.
같은 마음으로 한곳을 향해 달려 나가는 우리는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해내야만 했다.
김 실장과 짧은 사무실 투어를 마친 후, 우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테이블과 여러 개의 의자들.
그리고 벽면을 가득 메운 스크린 등등.
있을 건 다 있었다.
“와아, 회의실 잘 만들었다.”
“그럼, 내가 회사들에서 보던 회의실, 그중에 좋은 점만 쏙쏙 빼서 만든 곳이야. 하하.”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감탄했고.
이내 우리는 회의에 들어갔다.
“형, 내가 말했던 건, 확인 다 끝났어?”
“박호찬 감독님 작품?”
“응.”
그는 오늘도 늘 그렇듯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어, 이번에 들어간다는 작품 알아봤는데. 박호찬 감독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님도 라인업 좋고.”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자사가 아주 탄탄하더라.”
어느덧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투자사.
WG 엔터의 압력으로 빠진 투자이기는 했지만.
투자사의 투자 회수로 영화가 엎어지는 게, 또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확인을 하고는 했다.
“좋네. 대본만 확실하면, 안 갈 이유가 없겠는데?”
“응, 박호찬 감독님이 워낙 요즘 대세니까.”
아직 감독과 미팅을 하기도 전이었지만, 느낌이 좋았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의 울렁임.
“형, 근데 이거 나한테 따로 섭외 들어온 적은 없지?”
내 물음에 김 실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
“…어.”
“이 작품 시놉시스는?”
“받아뒀어. 가져다줄게.”
“형이 볼 때는 어땠어?”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이 드러났다.
“응, 내용도 좋더라….”
그를 오래 봐왔기에, 그의 표정만 보아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뭔가 있다는 것을.
“형, 근데 이 작품에 뭐… 있어?”
“아… 그게.”
쓰읍 소리를 내며 답을 망설였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의 앞에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미리 알아야지.”
“확실한 건 아닌데, 내 기억으로 이 작품… WG 엔터에 있을 때 봤던 것 같아서.”
“진짜?”
“응.”
“그때 나한테 들어왔던 작품이야?”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느라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그랬으면 내가 확실히 기억할 거야. 다른 배우한테 왔던 것 같은데….”
“누구?”
“그것까지는 기억이 안 나. 근데 박 감독님이 너한테 관심 있다고 했다며. 그럼 다른 배우랑 엎어졌을 거야. 오히려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조금 찜찜하기는 했지만, 이내 그 마음을 털어냈다.
작품에서 주연 배우를 고르는 게, 단숨에 정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여러 배우를 거치고 거쳐서 정해지는 게 캐스팅이지.
어떤 배우에게 갔던 대본인지는 내게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지금 내게 이 작품이 왔고,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래, 뭐 그게 중요한가. 시놉시스 좀 봐야겠다.”
“응, 바로 가져다줄게. 내용 대박이더라.”
김 실장은 대본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고, 그의 미소에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김 실장 표정만으로도 작품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 * *
시놉시스를 읽자마자 나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작품을 만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대본을 보고 또 봤구나 싶었으니까 말이지.
작품에 대한 요약만 보아도, 내 심장은 쿵쾅거렸고.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곧바로 박호찬 감독과 미팅 날짜를 정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고만 싶었다.
작품이 마음에 들면 들수록, 나는 궁금증이 쌓여만 갔다.
이 장면에서는 내가 어떤 연기를 펼쳐야 하고, 어떤 모습을 화면에 담고 싶은지.
여기서는 이러한 디테일이 추가되어도 되는지.
내가 생각한 캐릭터와 감독이 추구하는 캐릭터의 모습이 동일한지.
질문이 쌓인 학생처럼 종이에 빼곡하게 궁금증을 적어, 미팅 장소로 향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박호찬 감독과 제작사 사람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박호찬입니다. 반가워요.”
“감독님,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말에 박 감독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이런 인사는 수없이 들은 말일 터.
“저도 진희성 배우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지난 작품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박 감독을 비롯한 제작사 직원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들의 앞에 앉았고, 곧바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대본은 어떻게… 괜찮으셨어요?”
박 감독의 물음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마다요. 대본 보내 주시자마자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내용이 탄탄하고 흥미로운 건 당연하고, 흡입력도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내 말에 박 감독과 제작사 직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작품에 아주 자신이 있어요. 다만, 이번 작품은 배우가 아주 중요해요.”
어느 작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유독 이 작품에서 주연의 역할은 큰 것 같았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아주 뚜렷한 대본이었지.
“네, 그래서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철두철미하게 모든 신을 분석하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습니다.”
나는 말과 동시에 빼곡하게 적어온 질문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제가 생각한 캐릭터와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캐릭터가 같은지, 여쭤보고 싶기도 했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 감독과 제작사 직원은 입을 떡 벌렸다.
“이렇게 궁금하신 게 많으신 거예요?”
“우와, 대본 보면서 이걸 다 적어오신 겁니까?”
그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네, 아직 배역을 제게 맡겨 주시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맡을 배역에 대해 먼저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박 감독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완전 연구원이시네. 이래서 진희성, 진희성 하는군요?”
그의 칭찬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진희성 배우님과 함께 찍는 상상만 했는데도 벌써 든든하네요. 하하.”
박 감독은 내게 대본 한 페이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럼 우선 여기 이 부분 연기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나는 재빨리 배역에 몰입했고.
카메라 앞에 서 있다는 상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뒤.
연기가 끝나자 박 감독과 제작사 직원들은 감탄을 쏟아내며 손뼉을 부딪쳤다.
“이야, 잘 봤습니다.”
“역시 진희성 배우님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네요.”
그들의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듯, 박 감독이 대본을 덮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너무 열정 넘치는 배우님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그 질문… 작품 시작하기 전에 따로 만나서 자세하게 분석해 보자고요.”
박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그래요. 오늘 미팅하느라 고생했고, 매니저님 통해서 연락드릴게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박 감독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한 뒤, 나는 미팅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긴장감이 풀리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배역에서 떨어질까 걱정되어 떨리는 게 아니었다.
이 작품을, 이 캐릭터를 너무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리고 너무나 원활하게 이루어진 미팅에 가슴이 떨려왔다.
“…됐다!”
* * *
건물을 빠져나와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려는 그때.
주머니를 뒤적여도 보이지 않는 휴대 전화.
“아… 맞다!”
질문지를 꺼낼 때, 빠졌던 휴대 전화가 떠올랐고.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다시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래도 집 가기 전에 생각나서 다행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미팅 룸.
아직 그곳은 정리가 되지 않았는지, 박 감독과 제작사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노크를 하기 위해 문 위에 손을 올렸고.
그 순간.
“근데 진희성… 괜찮나?”
그들의 입에 언급된 내 이름.
나는 노크를 하려던 손을 멈춰 세웠다.
“하긴, WG 엔터에서 나오면서 좀 이슈였잖아요.”
“그렇죠. 진희성이 잘못해서 논란이 된 건 아닌데, 그래도 기사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좀… 아슬아슬하지 않나?”
들려오는 내 이야기에 차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나에 대한 평가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지.
“근데 진희성 연기력은 대박이긴 하던데.”
“연기력은 좋아도 더 좋은 조건의 배우도 있긴 하잖아요.”
“음… 특히 투자사의 선호를 생각하면… 진희성은 좀….”
“아무리 그래도 진희성으로 가야죠. 확실한 이유가 있잖아요.”
“맞네. 이번에 진희성으로 가야, 송유나가 다음 작품 주연으로 할 거 아닙니까.”
“그러네. 다음 작품을 위해서 진희성으로 가시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귀에 꽂히는 이름 ‘송유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에 내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