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80화 (280/303)

280화 #51 –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3)

지루한 싸움이 될 뻔했던 WG 엔터와의 계약 해지.

하지만 여자 친구인 송유나 덕에 수월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가 끝났다.

김 실장의 사표 역시 내가 계약 해지를 하자 생각보다 빠르게 수리되었다.

며칠 내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부정 캐스팅’ 논란.

WG 엔터와 천 감독의 각자 반대 입장에 논란이 붉어졌지만.

내가 SNS에 올린 입장 표명으로 진실이 밝혀진 후.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지핀 듯 떠들썩했다.

연기자로 전환하려는 가수들의 연기 논란.

누가 봐도 캐릭터와 맞지 않았던 배우들.

이 외에도 많은 과거 캐스팅이 언급되며, 인터넷에서는 며칠 내내 영화 ‘턴테이블’이 뜨거운 감자로 남았지.

그러나 이 주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WG 엔터에서 계약 해지를 하며 박 대표와 했던 약속.

이 일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도록 묻겠다는 말.

대형 엔터에서 이슈를 덮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이 많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우습게도 이슈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내 이름 언급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눈을 의심했다.

“이야… 귀신같이 순식간에 묻었네?”

어떻게 이 이슈를 뚝딱 없앨 수 있었을까….

서둘러 인터넷을 뒤적였고,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준♥한나 – WG 엔터테인먼트에서 한솥밥 먹는 사이….]

[이강준-김한나, 예쁜 만남 이어가는 중….]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더니, 이거였네.”

전혀 열애설의 꼬투리도 잡히지 않았던 배우 이강준과 가수 김한나.

배우와 가수의 열애설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톱 급 배우와 가수는 아니었지만.

신비주의 컨셉으로 사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김한나였기에.

그런 아이돌과 배우의 열애설에 사람들의 관심이 휩쓸렸다.

공교롭게도 두 연예인 모두 WG 엔터.

즉, 박 대표가 그들의 열애설을 터트린 것이지.

내부 연예인의 새로운 연애 스캔들로 금세 ‘부정 캐스팅’은 잊혀져 갔다.

참 우습게도 사람들은 새롭게 올라온 이슈에만 관심을 갖는다.

영화 턴테이블에 관한 캐스팅 논란이 터지자마자, 다들 부정 캐스팅에 관해 고민하고 있던 것처럼 관심이 쏟아졌지.

부정 캐스팅, 낙하산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열심히 준비한 배우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등 이 일에 주목했지만.

열애설 하나에 캐스팅 논란의 관심은 차디차게 식어버렸다.

“회사에서 대체 터트릴 이야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걸까….”

괜스레 박 대표, 그리고 수많은 엔터의 판도라 상자에 무서움이 느껴졌다.

이번 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영화 턴테이블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짧고 굵게 논란에 있었으니까.

이후 영화가 개봉한다면, 사람들은 이번 일을 떠올리며 영화에 관심을 가질 터.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지금은 논란의 중심에서 사라졌지만.

사실, 내가 여기서 장작만 넣는다면 다시 타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만 WG 엔터나 나를 위해, 서로 깔끔한 마무리를 해야 했기에 장작은 넣어두었다.

혹시나 박 대표가 이슈로 이슈를 덮지 못했다면.

또는 내 계약 해지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트렸다면.

나는 바로 장작, 아니, 기름을 들이부었겠지.

아침부터 완벽하게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한 후, 집을 나섰다.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김 실장과 함께 독립의 꿈을 가지고 세웠던 계획들.

벌써 독립을 향한 걸음은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WG 엔터를 벗어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해낸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 엔터를 설립하기 위해 다음 스텝으로 진행해야 했고.

다음 단계부터는 김 실장의 도움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고, 김 실장과 모인 후.

누가 먼저 운을 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아침에 새로 뜬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 열애설로 덮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러게. 거기서 나한테 불리한 기사를 내는 건 아닌가 생각도 했거든.”

그는 내 이야기에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들이지.”

“맞아. 근데 예상보다 너무 깔끔하게 여론을 정리해서 의외였어.”

김 실장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WG 엔터에서도 쫄았던 거지. 유나 씨까지 합세했잖아. 굳이 너랑 유나 씨 신경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겠지.”

“맞아. WG 엔터에서 유나가 나가면, 진짜 큰일일 거야. 유나가 WG 엔터 대표 배우잖아. 아니, 가수까지 다 통틀어서 유나가 톱 급이지.”

“팔불출 다 됐다 하려고 했는데, 유나 씨 톱 급인 건 너무 극명한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하하.”

김 실장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솔직히 유나 씨가 WG 엔터 기둥 몇 개는 세웠지. 그런 연예인이 나간다고 하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다 따라줄 수밖에.”

“응, 형이나 나나 깔끔하고 빠르게 정리돼서 다행이야.”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주제를 바꿨다.

“형, 이제 우리 다음 단계로 올라가자.”

내 말에 그 역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이어리를 펼쳤다.

독립 후 우리의 첫 회의인 셈이었다.

“응, 뭐부터 시작할까?”

“이제 형은 사무실부터 알아봐 줘. 나는 턴테이블 영화 시작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짜를 확인했다.

“어. 천 감독님이랑 연락했는데, 크랭크인 날짜 곧이더라.”

“맞아. 우리 독립하고 첫 작품이니까, 꼭 대박 나야지. 촬영 열심히 할 테니까, 형은 회사랑 서류들 작업 좀 해줘.”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잠깐만. 그럼 너 현장 왔다 갔다 하는 거랑 현장에서 케어는 어떻게 하지?”

그의 말에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내가 작품 한두 번 찍는 것도 아니고. 형이 회사 준비할 동안 나 혼자 해도 충분해.”

“아니지. 주연에다가 경력 짬도 있는데, 혼자 현장에 어떻게 보내. 차라리 내가 너 매니저를 하면서 같이 준비할게.”

“형, 사무실 알아보는 것부터 등록 서류에… 할 일 어마어마하게 많을 텐데, 난 괜찮아. 형도 바쁠 거야.”

그럼에도 김 실장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아니야. 그럼 내가 너 매니저만 하고 나서, 작품 끝나고 회사 설립을 준비하는 건 어때. 어차피 이번 작품은 계약된 거니까 굳이 회사, 서두를 필요 없잖아.”

“음… 그런가?”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했고.

김 실장 역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것보다 회사가 있는 게 낫겠다. 크랭크인 전에 급하게 찾아서 끝내버려야 하나?”

“너무 급하면 체해. 실수하느니 늦더라도 천천히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리는 한참 동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천 감독님한테 크랭크인 확정 날짜 다시 한번 확인을….”

그렇게 대화를 하던 그때.

지이잉-

천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 딱 맞게 천 감독님한테 전화 왔다.”

“오오, 크랭크인 날짜 확정됐나, 얼른 받아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네, 감독님.”

-어, 희성 씨 통화 가능해요?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매니저 형이랑 감독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딱 감독님에게 전화 와서 놀랐어요. 하하.”

-제 이야기요?

“예, 저번에 말씀해 주셨던 크랭크인 날짜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래서 날짜가 확정된 건지 여쭤보려고요.”

-아… 날짜.

나는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장난스런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천 감독에게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진심을 전했다.

“감독님, 아시죠?”

-네? 어떤….

“저 이제 WG 나오고 하는 첫 작품이잖아요. 저는 이번 작품에 제 소속사까지 걸었습니다. 아니, 매니저 식구까지 저희 모든 걸 다 걸었어요. 하하.”

내 말에 앞에 앉은 김 실장이 음소거로 웃음을 터트렸고.

수화기 너머 천 감독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할 테니까, 천 감독님이 저희 잘 키워주셔야 합니다?”

-아, 그게….

천 감독은 내 농담에도 웃거나 되받아치지도 않고, 말끝을 흐렸다.

평소에도 진중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늘 나와 농담도 주고받았던 천 감독이었기에, 웃음기를 지워내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천 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말을 입으로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혹시 만나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 *

천 감독의 연락을 받고 김 실장과 지체할 것 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래?”

“모르겠어. 우선 만나서 이야기하자는데… 설마 크랭크인 더 미뤄진 거 아니겠지?”

나는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며 말했고.

김 실장은 그런 나를 위로하듯 답했다.

“혹시나 일정이 미뤄진 거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자. 그사이에 회사 준비도 좀 하고.”

그의 말에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조금 더 여유롭게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뭐.”

“만약에 당겨진 거라면, 아까 우리 계획했던 대로 내가 매니저 일하고. 이번 작품 끝나면 그때 내가 바로 회사 차리는 거 준비할게.”

“그러자.”

김 실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현장에서 연기할 때, 나는 비교적 시간이 있으니까 틈틈이 준비해둘게. 그래서 빠르게 진행하자고.”

“응, 당장 나는 작품 준비해야 해서 같이 알아봐 주지는 못하니까, 형이 고생 좀 해줘. 이번 작품, 진짜 꼭 성공해야만 하잖아.”

천 감독에게 소속사까지 걸었다는 말.

농담처럼 했지만 실제로 나와 김 실장의 전부가 걸려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 거액을 건 투자를.

결혼까지 한 김 실장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을.

우리의 모든 사활이 걸린 첫 작품이었으니까.

이번 작품이 블랙 코미디 장르였고, 이 장르 자체가 위험성이 있었다.

내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것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성공을 꼭 해내야만 했다.

대형 엔터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망하는 작품이 된다면.

지금까지의 내 작품 성공이 전부 WG 엔터의 영향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투자한 돈을 떠나,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내 노력의 결실이었으니까.

나는 천 감독을 기다리며 손에 들린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형, 나 이번 작품 진짜 잘해보고 싶어.”

그는 타오르는 내 의지를 느꼈는지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풍자가 한껏 들어간 작품이기에, 내용이 가볍게만 보이지 않으려면 연기가 너무나도 중요한 작품이었다.

영상미, 복선 이런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연기’ 그 하나로만 익살스러움과 대본에 굴절된 현실을 표해내는 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지.

그래서 더더욱 내 역할이 컸다.

내 연기력 하나로 이 작품의 성공 여부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들 오셨네요.”

그때, 천 감독이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나와 김 실장은 밝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네, 오늘 뵙자고 한 이유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우선 앉으시죠.”

그를 반가워하는 우리와는 달리, 천 감독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 모습에 나와 김 실장은 알 수 없는 싸한 기운을 느꼈고.

우리의 얼굴에도 심각함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감독님, 크랭크인 날짜가 더 미뤄진 겁니까?”

나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고.

천 감독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자꾸만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을 망설였다.

그 모습에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그에게 답을 재촉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천 감독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출연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고.

천 감독은 마른침을 삼키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턴테이블… 작품이 엎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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