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51 –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2)
진희성의 계약 해지 선언에 박 대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희성아. 갑자기 그게 무슨….”
-아시잖아요. 그때 대표님이 분명 최 전무가 아니라, 대표님 믿고 들어가 보라고. 처리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결국….
진희성의 말에 박 대표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아섰다.
“그건… 우선 만나서 이야기하자.”
-네, 그렇지 않아도 전화드리고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박 대표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쾅-
“이런 X발…!”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책상 위 서류 더미를 손으로 밀쳤고.
그 탓에 대표실 바닥에는 서류가 나뒹굴었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 있는 전화기.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한 번의 연결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표….
“최 전무 지금 어디 있어.”
-아, 최 전무님 조금 전에 전무실에 있다고 들었….
박 대표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전무를 향한 분노에 소리쳤다.
“최 전무, 그 새끼 당장 내 방으로 달려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박 대표의 호통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심각한 일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최 전무에게 연결했다.
최 전무를 호출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을 무렵.
똑똑.
대표실의 문이 두드려졌고.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대표님, 부르셨….”
“야, 이 새끼야!”
노크에 문을 연 건, 최 전무가 아닌 박 대표였다.
그는 최 전무를 기다리며 잰걸음으로 대표실 문 앞을 서성였다.
당연했다.
당장 진희성이 계약을 파기해 달라는데, 그의 마음이 평화로울 리가.
누구보다 진희성의 재계약에 진심이었던 사람이 박 대표였으니까.
박 대표의 소리에 최 전무는 몸을 움찔거렸지만.
이미 알고 있던 행동이었다.
진희성이 SNS에 글을 올린 것도.
그를 찾던 호통의 목소리도 비서를 통해 들은 후였으니까 말이다.
최 전무는 그저 문 앞에 들어선 이후로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가 잘 처리한다며. 이게 잘 처리한 거야?”
박 대표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어디 그 계획 좀 들어보자. 계획에 여기까지는 없었니?”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박 대표의 말에 최 전무는 침 먹은 지네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봐. 네가 처리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더니, 이 사태를 만들어?”
“…죄송합니다.”
최 전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 그래도 진희성의 뜻대로 순탄하지는 않게….”
어둠에 빠진 와중에 한 줄기의 빛을 찾으려는 최 전무였지만.
박 대표는 그 빛을 온전히 차단시켰다.
차단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야, 최중현. 진희성… 지금 계약 해지하러 온단다.”
“…네?”
그의 말에 최 전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에게 기어오른다고 생각했던 진희성을 이 기회에 누르려고만 했지, 그가 회사를 나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가 그 잘난 진희성을 누르겠다고 해서, 겨우 재계약해 놓은 놈. 계약 해.지. 하러 온다고!”
“…….”
최 전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입을 열면 오히려 박 대표의 화만 돋울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그의 면전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검지로 툭툭 밀며 읊조렸다.
“일 잘한다고 칭찬해 줬으면 뭐라도 해왔어야 할 거 아니야. 일본에서도 뚜렷한 성과는 못 내더라도 해내기는 하더니, 여기서는 왜 이 모양이지?”
“…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죄송하다면 어떡하지?”
최 전무는 지금껏 본 적 없던 박 대표의 살기 어린 모습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박 대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네가 똥 싸놓은 걸, 대표인 내가 왜 치워야 하냐고. 네가 WG 대표야? 대표냐고.”
주변 공기가 싸하게 얼어붙었고.
최 전무는 박 대표의 손가락에 뒤로 주춤 밀려나 허리를 깊게 접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희성이 이렇게 나올 줄…. 제가 진희성 만나서 어떻게든 설득하겠습니다.”
“내가 이제 널 뭘 보고 맡겨. 뭐…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붙잡게?”
박 대표의 싸늘한 말투 함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차가운 냉기 같았다.
최 전무가 입을 꾹 다물자, 박 대표는 그를 비아냥대듯 말했다.
“봐, 그럴 깜냥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제가 어떻게든 진희성 설득시키고, 계약 해지는 안 되게 만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어 주십시오.”
그때.
똑똑.
대표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박 대표와 최 전무는 대표실 문 바로 안에 있었기에.
그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저 한 본부장입니다.”
진희성이 온 줄 알았던 박 대표는 짧은 한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왜.”
한 본부장은 문 앞에 서 있던 박 대표와 최 전무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이야기 중이신데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뭔데, 더 이상 놀라울 일도 없다.”
박 대표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고.
한 본부장은 최 전무를 쓰윽 바라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 실장, 사표 냈습니다.”
그의 말에 박 대표는 감았던 눈을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에 김 실장이 한둘이야?”
“김지훈 실장이요. 방금 사표를 냈는데, 바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한 본부장의 말에 박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매니저가 근무 중이었기에, 이름을 듣고 한 번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지.
그들에게는 담당 연예인을 대는 게 빠를 정도였다.
그런 박 대표의 표정을 읽었는지, 한 본부장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진희성 매니저입니다.”
그의 말에 박 대표는 1초의 틈도 없이 대표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뭐, 진희성 매니저가 사표를 써?”
그렇게 한 본부장은 사표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보고했다.
몇십 분 뒤.
대표실에 남은 사람은 박 대표와 최 전무, 둘뿐이었다.
아주 조금은 차분해진 박 대표의 모습.
아니, 어쩌면 분출하려는 화를 겨우 참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표실에 앉은 둘.
그들은 소파에 앉아 아무런 대화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최 전무에 대한 분노를 삭이는 중은 아니었다.
최 전무 또한 그에게 사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지.
그들이 기다리는 건, 진희성이었다.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었지.
최 전무는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겠다며 대표실을 지키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던 대표실에 문이 열렸다.
* * *
대표실 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발견한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네, 지금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내가 계약 해지를 한다는 말에 박 대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었다.
비서가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일어난 것을 보면 충분히 상황을 알 수 있었지.
이제 키는 내게 쥐어졌다.
그리고 이 키를 이용해 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것도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너무나 확고했으니까.
똑똑-
비서는 대표실 문을 두드리고, 곧장 입을 열었다.
“대표님, 진희성 씨 오셨습니다.”
“어.”
박 대표의 짧고 굵은 대답.
그의 한마디에 비서는 문을 열어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나는 박 대표에게 인사를 하기 전, 그녀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옅은 미소로 내게 답했고.
뒤를 돌아 박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어, 희성아 왔어?”
박 대표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반기기 위해 일어나 다가왔고.
내 시야에 들어온 또 한 사람, 최 전무였다.
이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
‘뭐야, 최 전무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그에게 닿았던 시선을 쓰윽 옮겼다.
“희성아, 얼른 앉아.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
박 대표는 내 팔을 잡아끌며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최 전무.
나는 그를 곁눈질로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내 말의 뜻은 최 전무가 나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지만.
박 대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싶은 말 허심탄회하게 하면서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하자.”
그와 그동안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나가겠다는 말에 벌써부터 설득을 시작한 박 대표였다.
그리고 박 대표는 최 전무를 향해 눈치를 주듯 눈을 찡긋거렸고.
곧장 최 전무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저… 내가 천 감독에게 WG 엔터 배우들을 넣겠다고 한 건 다 회사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를 위해서라…. 저를 위한 건 아니었잖습니까. 더군다나 제 이름을 팔아서 하는 거라면, 적어도 저에게 상의는 하셨어야죠.”
“그건 내가 그때도 말했다시피….”
나는 최 전무의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아니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최 전무님을 찾아가 남은 부정 캐스팅 배우들도 빼야 한다고요. 하지만 최 전무님은 그때도 제 말은 듣지 않으셨고요.”
최 전무는 내 말에 벌리고 있던 입을 닫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박 대표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가 한숨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분 상했다면, 내가 사과할게. 혹시 내가 오해하게 만들어서 계약을 해지하는 거라면….”
나는 다시금 그의 말을 끊었고, 박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저 전무님 없이 대표님과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박 대표가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하지만 최 전무도 이 일에 책임도 있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희성이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하니까 내가 불렀어.”
“아니요. 제가 이 회사를 믿고 계약한 건, 박 대표님이지 최 전무님이 아닙니다. 최 전무님의 사과를 듣자고 계약 해지를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요.”
그러고는 최 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시죠. 대표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내 말에 최 전무는 박 대표의 눈치를 살폈고.
그는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최 전무는 그대로 대표실을 빠져나갔고.
박 대표가 나를 향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일로 많이 속상했지?”
그는 내 계약 해지를 막기 위해 설득하듯 물었지만, 나는 시시콜콜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이미 김 실장은 이곳에 사표를 던졌고.
내 계획은 시작되었으니까.
나는 그의 물음에도 확고하게 답했다.
“저 계약 해지하겠습니다.”
내 단호한 말에 박 대표의 동공이 흔들렸다.
“화가 났으면 대화로 풀고, 오해도 풀고 해야지. 그렇게 감정적으로 해지를 한다니까, 평소 희성이답지 않네.”
“저는 분명 최 전무에게도 정정을 요구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박 대표님도 아시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충분히 희성이 네 마음을 헤아려서 절반 배우들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도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최 전무가 아니라, 대표님 믿고 가자고요. 그런데 결과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박 대표는 내 말에 온화하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요구한 계약 사항은, 딱 하나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시겠다고요.”
“그랬지. 그래서 최 전무가 사과를 한 거고.”
“제가 여러 차례 요구했음에도 시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회사의 계약 위반으로 계약 해지를 요청드리는 겁니다.”
박 대표는 그제야 입술을 잘근 깨물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 계약 해지하면 누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냐?”
박 대표는 분노의 단계를 순순히 밟아가고 있었다.
내 계약 해지에 대해 부정했고, 분노를 표하기 시작했지.
나를 협박하듯 말하는 그였지만, 나는 결코 굴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참고로 계약 위반에 따른 조치이므로 계약금 반환은 없는 거 아시죠?”
내 말이 끝나자 박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고.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진희성, 너 보자 보자 하니까 계속 기어오르는구나?”
“아니요. 저는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대표님과 재계약하면서 요구한 게 이거 하나인 거 아시잖습니까. 제게 확실하게 지켜주시겠다고 했는데, 첫 작품부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야, 너 이대로 나가면 이 바닥에서 무사할 것 같아?”
그의 알량한 협박에도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네, 무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잖습니까.”
“뭐?”
“혹시 잊으셨나 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박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타이밍에 맞춰 대표실 문이 열렸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은, 송유나였다.
그녀의 등장에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혀 그녀를 가리켰고.
송유나는 저벅저벅 걸어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대표님, 희성이 건들면, 저도 나가려고요. WG 엔터.”
그녀의 말에 박 대표는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이 막혔고.
송유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시죠? WG 엔터에서 희성이 하나 나가는 건 살짝 주춤해도, 저까지 나가면 파급력이… 아휴, 괜찮으시려나 몰라.”
그녀 특유의 자존감 표현.
그만큼 송유나는 연예 업계에서 엄청난 위치를 자랑했다.
송유나 자신 또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배우로서의 위치가 문제가 아닌, 연예계 경력과 인맥까지.
송유나라는 아이콘의 힘은 생각보다 더욱 어마어마했다.
박 대표는 송유나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알겠어.”
어찌나 이를 꽉 깨물고 말하는지, 모든 발음이 뭉개질 정도였다.
박 대표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대신 조용히 나가. 더 이상 입장 표명으로 뒤흔들지 말고.”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러죠. 아, 근데 이미 벌어진 일은 어떻게 수습하실 건가요?”
내 물음에 박 대표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답했다.
“그건 우리한테 맡겨도 돼.”
박 대표의 말에 나는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