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51 –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1)
똑똑.
“어, 얼른 들어와.”
박 대표는 최 전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표실 문 앞까지 다가와 문을 벌컥 열었다.
“대표님.”
최 전무는 심각한 듯 굳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묘하게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는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최 전무를 향해 물었고.
최 전무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영화 ‘턴테이블’, 천 감독이 WG 엔터 배우들 캐스팅 다 뺀 거 맞습니다. 그 빈자리에 오디션 공고도 올라온 상태고요.”
“미친,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애들을 잘라?”
“그러니까요.”
“천 감독은?”
“지금 전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냥 무시하는 거죠.”
박 대표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최 전무는 그런 박 대표의 반응에도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말했다.
“이거 분명 진희성 짓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시잖습니까. 진희성이 이 캐스팅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거.”
그의 말에 박 대표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애들 반이나 뺐고, 최 전무가 진희성 신경 쓰이지 않도록 잘 이야기하라고 했잖아.”
“네, 했죠. 근데 저번에….”
최 전무는 진희성과의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머릿속에서 편집했고.
박 대표에게 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뭔데?”
“언론전으로 가시죠.”
그는 최 전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진희성 대가리가 너무 컸다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죠.”
최 전무의 말에 박 대표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고.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래서 계획 더 말해봐.”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진희성과 천 감독 뜻대로 조용히 진행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희성도 머리가 더 크기 전에, 보여줘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엔터와 배우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요.”
최 전무는 입꼬리를 음흉하게 찢었고.
박 대표는 잠시 고민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신 진희성은 잘 챙겨. 쟤 몸값 계속 오를 거야. 재계약까지 한 마당에, 앞으로도 데리고 있어야 하니까.”
“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최 전무는 고개를 꾸벅 숙였고.
박 대표는 그런 그에게 경고하듯 검지를 치켜들었다.
“분명히 말했어. 진희성한테 뭘 보여주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애 날뛰게 만들지 마. 우리한테도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최 전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김 기자 통해서 기사 내보내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몇 시간 뒤.
진희성이 짜놓은 그림에 최 전무가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장 올라오기 시작한 기사들.
[영화 ‘턴테이블’, 하루아침에 캐스팅 파기?]
[영화 ‘턴테이블’ 캐스팅 후 일방적인 파기를 외친 천지호 감독. 과연 무슨 일?]
[캐스팅 확정 → 며칠 뒤 캐스팅 오디션 공고? 영화 ‘턴테이블’ 크랭크인 전부터 논란….]
[진희성 주연의 영화 ‘턴테이블’. 일방적인 캐스팅 파기로 시작도 전에 논란의 중심…!]
[영화 ‘턴테이블’ 캐스팅 파기 – 캐스팅이 파기된 배우들은 전부 ‘WG 엔터’….]
최 전무는 하나씩 올라오는 기사에 입꼬리를 올렸고.
기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성… 네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야. 내가 똑똑히 보여줄게.”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언론과 대중의 반응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지이잉-
지이잉-
연속해서 울리는 진동음.
천 감독의 휴대 전화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그의 휴대 전화는 아주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전화와 문자가 쏟아지고 있었고.
내용은 모두 같은 주제였다.
WG 엔터 배우들의 캐스팅 파기.
그 이유와 천 감독의 생각을 묻는 이야기.
“와아… 이렇게 언론전으로 가시겠다?”
천 감독은 수없이 올라오는 기사들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는 화는커녕 서둘러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래, 이렇게 나오셔야지. 그럼 다음 스텝으로…!”
그러곤 독기를 가득 품은 듯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감독님.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진희성의 음성.
“희성 씨, 기사 확인했어요?”
-예, 안 그래도 방금 확인하고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회사와 이야기는 되신 건가요?”
-아니요. 저한테 따로 이야기도 없이 기사부터 냈더라고요. 천 감독님은 어떻게 되어 가십니까?
“오디션 공고 올라가자마자 최 전무에게 연락이 오고 있는데, 따로 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네, 회사에서 이렇게 바로 기사로 대응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이것 또한 제 예상에 있기는 했었으니까요. 저희도 대응 시작할까요?
진희성의 말에 천 감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렇지 않아도 협회 측과 이야기는 마쳐둔 상태입니다.”
-천 감독님, 그럼 저희도 언론전 시작하죠.
“그래야죠.”
그들은 WG 엔터에서 보인 반응에 크게 심경이 요동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해 두었던 사람들처럼.
그리고 이내 대수롭지 않게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캐스팅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끝낼 거 같고, 대본 리딩은 번거롭더라도 다시 진행하려고 하는데. 일정 나오는 대로 전달 드릴게요.”
-저희 회사 때문에 괜한 고생이 너무 많으십니다, 감독님.
“아닙니다. 감독 생활하다 보면, 세상에 별일이 많은걸요. 하하.”
-대본 리딩 두 번 하니까, 열심히 연습해 가서 지난번보다 더 잘해보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주연 배우님 연기 잘하시는 거 세상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더 노력해야죠. 촬영이 늦어진 만큼, 시작 전부터 논란에 휩싸인 만큼. 더 준비를 철저히 해놔야죠.
천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최 전무 덕분에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이 돼서 작품 잘될 거 같은데요?”
지이잉-
통화 중에 걸려오는 전화에 천 감독은 휴대 전화를 확인 후 말했다.
“희성 씨, 저 기자님한테 전화 들어오네요. 우선 급한 불 끄고, 저희는 늦어진 만큼 더 철두철미하게 영화 찍어봅시다.”
전화를 끊은 뒤.
천 감독은 앉은 자리에서 한참 동안 통화를 이어갔다.
영화 협회 관계자들.
그리고 여러 명의 기자들.
그는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사실만으로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천 감독의 이야기는 기사를 통해 최 전무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언론전의 대응이 시작된 것이지.
[[단독] 영화 ‘턴테이블’ 천지호 감독 – 캐스팅 일방적 파기에 대한 그 이유…?]
-영화 크랭크인이 시작되기도 전, 논란에 휩싸인 ‘턴테이블’.
캐스팅 확정이 된 배우들은 하루아침에 일방적인 통보로 캐스팅이 불발….
.
.
.
이에 천지호 감독은 자신의 입장을 내놓았다.
“애초에 이 캐스팅은 제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WG 엔터테인먼트의 강압적인 캐스팅 압박으로….”
천지호 감독은 WG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압박에 대해 털어놓았고, 배역과 맞지 않는 캐릭터의 배우들로 인해 난감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
.
.
영화 협회 측은 ‘엔터의 캐스팅 압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으면, 조연, 단역 배우는 그 회사에서 캐스팅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생긴 것을 타파해야….”
이처럼 업계에 자리 잡은 불편한 캐스팅.
캐스팅 압박에 영화 협회와 감독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 * *
하루 내내 ‘WG 엔터’, ‘영화 턴테이블’, ‘천 감독’으로 인터넷은 뜨거웠다.
WG 엔터에서는 강압적인 캐스팅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기사를 연이어 쏟아내고 있었고.
대형 엔터테인먼트답게 여론을 이끌어갈 줄 아는 듯 보였다.
그로 인해 대중들은 WG 엔터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지만.
천 감독이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 반박 기사로 나오자, 또다시 떠들썩거렸다.
지금까지 영화계에서도, 그리고 영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보고 있는 내용들이었으니까.
대형 엔터테인먼트에서 급 높은 연예인을 작품에 출연시키면.
자연스레 그 회사에서 유명하지 않았던 배우, 가수 등 연예인이 그 작품에 출연하는 게 허다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굳이 따져 묻는 시청자도 적었고.
감독들도 받아들이고 활동을 이어갔지.
하지만 터질 게 터진 듯한 ‘부정 캐스팅’에 대중들의 반응은 완벽하게 갈렸다.
-원래 톱 급 배우 쓰려면, 연기하려고 넘어온 가수들이 나와줘야지ㅋㅋ
-배우 끼워 팔기 하는 거 내내 짜증 났는데, 이제야 터진 거지.
-그래ㅋㅋ 생각해보면, 연기 못하는 배우, 가수 왜 쓰나 했는데 다 소속사에서 꽂은 거였구나 ㅉㅉ
-어차피 감독도 오케이했으니까, 그동안 출연했던 거 아님? 왜 이제 와서 영화 협회까지 난리;;
-그럼 턴테이블도 진희성 출연하니까, WG 엔터에서 우르르 배우들 꽂은 거였네. 어쩐지, 왜 이렇게 WG 엔터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나 했네ㅋㅋ
-WG 엔터에서는 배우들 캐스팅 확정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자르니까 억울할 듯. 저건 감독이 너무한 거 아님?
-서로 윈윈하는 거지. 감독이 갑자기 배우들 캐스팅 왜 자름?
-그래서 WG 엔터에서 하는 말이 진실인 거야, 감독 말이 진실인 거야?
└거짓말하는 사람 누구냐!
└여기서 진실 말할 사람은 진희성밖에 없을 듯.
└그러네. 진희성만이 가운데 있는 사람이니까. 진실을 말해줘라!
└이 싸움 끝내줄 사람 언제 나타나나요.
반나절이 넘게 뜨거운 감자로 논란 중인 ‘부정 캐스팅’.
이 사실 여부를 밝힐 사람은 진희성뿐이었다.
진희성 역시 이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입을 여는 중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기자를 통해 내뱉지 않았다.
WG 엔터에서 인터넷을 가득 메운 기사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천 감독의 몇 개 안 되는 기사들.
이 사이를 비집고 기사를 낸다고 해서 이슈가 되기는 힘들 수도 있을 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곳인 연예 기획사였기에.
그들과 똑같이 기사를 내서 목소리를 높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기자 회견은 해당 소속사에 있는 진희성이 펼치기에 어려움이 있었지.
그래서 진희성이 선택한 방법은….
사람들의 관심이 가득한 ‘SNS’였다.
-안녕하세요, 배우 진희성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된 건, 현재 ‘부정 캐스팅’이라는 말로 떠들썩한 영화 ‘턴테이블’ 때문입니다.
이에 관련해 직접 입장을 밝히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긴 글에 앞서, 저는 제 배우 생활을 모두 걸고 진실만을 말씀드립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란 중인 턴테이블의 WG 엔터 배우들의 캐스팅은 저 ‘진희성’으로 인해 이루어진 게 맞습니다.
제가 주연으로 출연을 하게 되자, 회사 측에서는 영화감독님에게 캐스팅 압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바로잡길 요청했습니다.
저 역시 엑스트라, 단역부터 시작해 올라온 배우였기에.
이러한 부정 캐스팅은 다른 배우의 기회를 빼앗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정 캐스팅으로 출연하게 되는 배우들의 꿈 또한 짓밟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그 출연이 기회가 될 수는 있지만.
오히려 연기 논란, 부정 출연으로 각인될 수 있으니까요.
.
.
.
…그래서 저는 회사에 바로잡기를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부를 당했습니다.
다시는 업계에 이러한 ‘부정 캐스팅’이 사라지는 깨끗하고 정직한 연예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희성의 글이 SNS에 올라오자, 사람들은 그 글을 여러 사이트로 퍼다 나르기 시작했고.
글은 기자들에게로 전해져 기사가 수없이 쏟아졌다.
논란은 확실한 진실로 덮였지만.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관심에 합류한 건, 영화 ‘턴테이블’의 새로 출연할 배우들이었다.
논란이 많은 영화가 된 만큼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WG 엔터 박 대표 또한 진희성이 올린 SNS 글을 확인했다.
“이런…!”
자신의 소속사에 있는 배우의 폭로.
그는 모든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지이잉-
[발신인: WG 엔터 진희성]
사건의 중심인 진희성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박 대표는 숨도 쉬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어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저 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