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77화 (277/303)

277화 #50 – 책임감 (5)

김 실장에게서 확답이 오지 않은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독립의 제안을 한 건.

나를 위한 것도 있지만, 그를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니까.

김 실장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그에게 서운한 마음이나, 그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내가 기획사를 옮긴다면 김 실장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일 뿐.

연예계 생활을 할 거라면, 쭉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형 생각이 궁금하기는 하네….”

김 실장의 행보에 궁금하던 찰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번호를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게 내 제안의 답을 하기 위한 전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생각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으니까.

나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아이고, 양반은 못 되시겠네.”

내 말에 김 실장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뭐야, 내 생각하고 있었어?

“뭐… 좋은 생각은 아니고.”

-거짓말 치시네. 우리 희성이는 형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형은 결혼도 했는데.

“됐습니다. 저도 여자 좋아하거든요?”

-하하, 그래서 다행이야.

“근데 형은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나는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생각 좀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네. 저녁은 먹었어?

“응, 대충.”

-그럼 나랑 잠깐 만날까?

“지금?”

-어. 그때 네가 나한테 했던 제안 말이야.

김 실장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답을 재촉하려던 건 아니지만, 답을 듣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그런 제안 해줘서 고마워. 해보자, 기획사!

한 시간 뒤.

집에서 대충 옷을 걸쳐 입은 후에 김 실장을 만날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김 실장에게서 답이 온 건,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고민을 하긴 했지만, 불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내게 답을 해준 것이니까.

지난 1만 년의 긴 과거에서 많은 직업을 가졌었다.

김 실장과 같은 매니저부터 경찰, 의사, 간호사, 교사, 영업 직원, 사무직 회사원 등.

입으로 하나하나 나열하기에도 너무나 많은 직업이었지.

물론 나는 1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었기에.

그 직업을 벗어나 다른 직업을 택하거나.

혹은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 역시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었다.

그때그때 모든 삶에 치열하게, 그리고 노력하며 살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에 충실할 뿐.

다른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하던 삶에서는 더더욱.

그만큼 몸을 담고 있는 회사를 옮기는 건 직장인에게 어려운 일이었고, 모험이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내 회사를 차리는 것?

회사에서 독립을 하는 건, 직장인에게 흔히 펼쳐지는 상황은 아니다.

더군다나 김 실장처럼 가정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그래서 김 실장에게는 좋은 제안임을 알지만.

그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성공시킬 확신이 있지만.

김 실장 입장에서 모험을 하는 건, 나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형!”

김 실장을 보자마자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어, 희성아. 일찍 왔네?”

우리는 룸으로 이루어진 조용한 카페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한 잔씩 앞에 놓은 후.

우리는 사담 없이 곧바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형, 그래서 깊게 잘 고민한 거지?”

내 물음에 그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 이 고민한다고 며칠 동안 잠도 설쳤어.”

“이제 준비하기 시작하면 돌릴 수 없잖아. 그래서 형이 확신이 있나 해서. 물론 나는 성공시킬 자신이 있어. 그만큼 열심히 할 거고.”

그는 내 말투에서 불타오르는 의지를 느꼈는지, 덩달아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그럼, 나도 가볍게 생각하고 뛰어드는 거 아니야. 잘된다는 보장으로 시작하는 거 아니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잘되게 만들어야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

그 덕에 목구멍은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고.

WG 엔터를 나와 성공하고 싶은 갈망에 그가 더욱 불을 지피게 만들었다.

“좋아. 그럼 바로 내 계획을 들려줄게.”

“응.”

김 실장은 늘 그렇듯 주머니 속에 품고 있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메모를 하는 건 김 실장의 오랜 습관이었다.

“우선 회사 사무실을 마련해야 하는데, 위치는….”

내 말에 그는 귀를 쫑긋 세우며 경청했고.

그는 연신 볼펜을 끄적이며 내게 말했다.

“어, 거기 위치 좋은 것 같아. 사무실은 내가 내일부터 바로 알아볼게. 너는 작품 준비해.”

“얼른 회사 몸집 키워서, 내 매니저 새로 구하자.”

“나 없이 되겠어?”

그는 한쪽 눈썹을 힘껏 올리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내게 물었고.

그런 김 실장의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형 없으면 좀 심심하긴 할 거 같은데… 그래도 뭐, 견뎌봐야지.”

커피를 한 모금 쭈욱 들이켜며 얼굴의 미소를 지워냈다.

“이렇게 회사 나와서 엔터 차리는 게, 형도 이제 로드 매니저 그만하고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하려는 건데. 그렇게 만들려면 얼른 회사를 키워야지.”

내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생각해줘서 진짜 고맙다, 희성아.”

그의 촉촉한 눈빛을 본 나는 어색하게 불어오는 낯간지러운 공기에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고는 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회사에 내 지분이 있으니까. 회사가 커질수록 돈 투자한 나한테 이득이잖아? 하하.”

내 말에 김 실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네. 매니저도 더 뽑고, 연예인들이 많이 들어오고 돈을 벌어야 투자한 보람이 있지.”

웃으며 그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김 실장은 내 마음을, 그리고 나는 김 실장이 내게 감사를 표하는 마음을 눈빛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길을 쓰윽 옮겨, 괜스레 커피 잔을 빙빙 돌리며 읊조렸다.

“내가 보답하기 위해서 진짜 열심히 할게.”

아직 WG 엔터를 나오지도, 우리의 회사를 차리지도 않았지만.

이미 김 실장과 내 관계는 가족만큼이나 더욱 끈끈해지고 있었다.

* * *

다시 찾은 영화 ‘턴테이블’의 대본 리딩실.

이곳은 천 감독과 미팅을 하는 공간이었다.

이 대본 리딩실에만 온 게 벌써 세 번째.

기존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대본 리딩실 이 공간에 이렇게 자주, 그리고 많이 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애정이 있는지,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굴뚝같은지 말이다.

“희성 씨, 왔어요?”

“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요즘 우리 자주 보네요?”

“그러게요. 자주 뵈니까 좋습니다. 하하.”

그는 웃으며 앞자리를 가리켰고.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천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날짜는 대충 나왔을까요?”

내 물음에 그는 옆에 놓인 탁상 달력을 당겨와 내게 설명했다.

“오늘 희성 씨랑 이야기하고, 확정 짓고 나면 WG 엔터 배우들 다 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 캐스팅하고, 완료된 다음에 크랭크인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천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 작품에 임하는 내 태도와 계획에 대해서.

“감독님, WG 엔터에서 제 이름을 타고 낙하산으로 들어온 배우들. 다 빼셔도 됩니다. 제가 회사를 나올 겁니다. 더 이상 회사의 압력으로 배우들 캐스팅에 문제는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내 말에 천 감독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WG 엔터의 배우들을 빼도 된다는 뜻이, 내가 WG 엔터를 나오겠다는 말인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단지, 회사와 협의해 해결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럼 희성 씨, 엔터를 옮기시는 거예요?”

“예, 이후 이야기는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실한 건, 저로 인해 들어오는 낙하산 배우가 없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천 감독님도 작품을 위해 배역에 어울리는 캐스팅 하셔도 되고요.”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검지를 치켜들었다.

“아니,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거. 그걸 감독님이 하시는 게 원래 당연한 거니까요.”

내 말에 천 감독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함께 작품을 그려나갈 배우님이 든든해서 너무 좋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감독님과 함께 좋은 작품을 만들 생각에 설렙니다.”

천 감독은 오늘 날짜를 확인하며 달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럼 당장 캐스팅 공고를 띄워도 되겠죠?”

그의 물음에 나는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이제 작품 진행에 더 지체하지 않고, 실행하시죠.”

그는 그제야 묵은 체증이 사라진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 배우를 따라, 엔터 회사에서는 조연, 단역 등 배우들을 끼워 팔는 게 종종 있기는 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점을 알고도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오더라도, 배역과 맞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배우가 아닌, 다른 분야의 연예인이 새로운 발판으로 시도하는 경우가 꽤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그런 연기력과는 별개로 캐스팅에 힘을 쏟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오래 준비한 감독, 작가, 스태프, 배우들은 그런 미스 캐스팅 하나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몇 시간 뒤.

천 감독과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집.

그 짧은 사이에 새롭게 캐스팅 공고가 올라왔다.

이렇게 빨리 진행한 것을 보면, 주춤했던 시간이 아까워 빠르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천 감독이 얼마나 캐스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게는 WG 엔터에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캐스팅, 그 절반의 배우가 나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던 천 감독.

하지만 그 역시 그대로 영화를 찍고 싶지는 않았던 거겠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부딪쳐 울며 겨자 먹기로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 현실을 바로잡기 시작하자, 천 감독은 영화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 * *

한편, WG 엔터 최 전무실.

최 전무는 다리를 꼬고 등이 높게 올라온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내가 한국에 들어오니까 일이 술술 풀리는구먼.”

그의 입꼬리는 길게 휘어졌고.

그 웃음을 방해라도 하듯 책상 위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 여보세요?”

-최 전무님, 영화 ‘턴테이블’에 참여하는 저희 배우들이요. 전무님이 다시 빼신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 박 팀장.”

-지금 턴테이블에 캐스팅됐던 배우들 다 빠졌다고 연락 왔습니다.

“뭐라고?”

-캐스팅 취소요. 그리고 그 자리에 오디션 본다는 공고도 올라왔고요. 자료 메신저로 보내드렸는데, 확인 좀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X발…!”

평화롭던 전무실은 폭풍이 휘몰아친 듯 분주해졌고.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천 감독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하지만 그가 애타게 찾던 천 감독은 답이 없었다.

쾅-

최 전무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이런 미친… 이거 분명 진희성이랑 짠 거네. 진희성만 배역에 남겨두고… 감히 내 제안을 말없이 잘라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한참 화를 식히던 그는 이내 다른 수를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분명 진희성한테 경고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명함 통을 엎어, 원하는 명함을 찾기 위해 손으로 휘저었다.

“진희성… 덩치 좀 커졌다고 나대는데, 그럼 내가 밟아주는 수밖에.”

곧 명함을 뒤적이던 그의 손에 걸린 명함 하나.

최 전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바라보았다.

“찾았다, 김 기자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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