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76화 (276/303)

276화 #50 – 책임감 (4)

김 실장은 내 제안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집 앞으로 달려왔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독립’이라는 제안은 누가 들어도 놀랄 수밖에.

중요한 이야기에 우리는 술 대신 커피를 택했다.

김 실장은 묻고 싶은 말들이 혀끝까지 차오른 듯 보였지만.

우선 커피로 목을 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아까 전화로 한 얘기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대체 무슨 말이야?”

“형, 여기서 매니저로 일해도 팀장 달기 어려운 게 사실이잖아. 형의 실력과 경력이 문제가 아니라, WG 엔터의 구조상.”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승진이 쉽지가 않으니까.”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회사 그만두고 나가서 엔터 차리자고. 독립하는 게 가장 베스트일 것 같아.”

내 말에 김 실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즘 내가 알던 희성이가 아닌 것 같다?”

“그래?”

하긴, 지금까지의 나라면 이 상황에 회사를 옮기는 것도, 회사를 나가자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참다 참다 도저히 참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그제야 회사에 내 불만을 토로하고, 합의점을 찾아 원만하게 정리하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 상태였다.

내 위치나 상황은 이 달라진 내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단지 내가 달라질 수 있었던 건.

진희성의 몸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이유뿐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진희성의 몸에서 1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내 자리를 스스로 지켜야만 했고.

미래를 그리며 하나씩 나를 위한 것들, 내 주변 사람들을 내가 챙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모든 일들에서 내가 손해를 보면서, 참아내면서까지 감내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응, 뭐랄까… 단호해진 느낌이 아니라, 강단 있어졌달까?”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답을 보냈다.

“예전에는 강단이 없어 보였고?”

“아휴, 그 말이 아니지.”

김 실장은 내 팔을 툭 치며 경로를 벗어난 대화를 다시 끌어왔다.

“네 말대로 독립해서 회사 차리는 거 너무 좋지. 당연히 모든 로드 매니저들의 최종 꿈이기도 하고 말이야.”

“응, 하자. 꿈 이루면 되겠네.”

그는 코를 찡긋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회사 차리면 희성이 너도 넘어와서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 해줄 거야? 하하.”

그는 농담 섞인 말투로 내게 물었고.

그런 김 실장의 말에도 나는 미소조차 짓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히 나도 넘어가지.”

김 실장이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검지를 들어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정확히는 같이!”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 엔터 회사를 차리면, 나도 당연히 거기를 들어가야지. 형이 있는 곳인데.”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쓰읍 소리를 내며 걱정스런 어투로 입을 열었다.

“좋기는 한데, 내가 얼마 전에 결혼도 하고… 지금 당장 회사를 차릴 정도의 여유 자금이 없거든. 희성이 너도 잘 알잖아.”

“그건 내가 있지.”

“…응?”

김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고.

“당장 엔터를 차릴 자금. 그건 내가 가지고 있다고.”

“그건 희성이 네가 차리는 거잖아.”

“아니, 같이하는 거야.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형이 사장이고. 돈은 내가 형에게 투자할게.”

내 말에 김 실장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적잖이 놀란 듯한 김 실장은 곧바로 어떤 답도 꺼내지 못했고.

나는 그에게 내 계획에 대해 쏟아놓기 시작했다.

“형도 알잖아. 이번에 내가 들어가려는 영화 ‘턴테이블’. 거기에 WG 엔터 배우들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고,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최 전무를….”

김 실장에게 내 지금의 상황.

앞으로 김 실장이 엔터를 차리게 되면 어떠한 식으로 일을 이끌었으면 좋겠는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김 실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게 집중했다.

한참 우리의 대화가 이뤄졌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지?”

“응, 솔직히 너무 솔깃한 이야기고, 고마운 제안이기는 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물었다.

“그런데?”

“사실… 나한테는 이 좋은 제안 자체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김 실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독립을 제안한 건, 당연히 그를 위한 일이었지만.

받아들일 상대에게는 엄청난 변화일 테니까.

현실에 불만족을 가지고 있던 김 실장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의 이직도 아닌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다는 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그럼 충분히 생각해보고 이야기해줘.”

김 실장은 내 말이 끝나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럴게. 그리고 나한테 이런 값진 제안을 해줘 고맙다, 희성아.”

“에이, 그럼 내가 형 놔두고 혼자 나갈까 봐?”

그는 앞에 놓인 커피를 술잔 대신 들어 올렸고.

챙-

우리는 서로 마음의 단단함을 다시금 확인하며, 커피 잔을 부딪쳤다.

* * *

김 실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집으로 오자마자 침실이 아닌 서재로 향했다.

아직 김 실장에게 답은 듣지 못한 상태지만.

그 대답만을 기다리며 태평하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계획을 세워야 했다.

지금까지는 잘 차려진 회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배우의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됐었지.

하지만 이제 직접 엔터를 차리게 되면, 해야 할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을 터.

당장 회사답게 운영할 사무실도 구해야만 했고.

그 안에 들어갈 컴퓨터부터 작은 집기류.

연예인은 나뿐이라 내 자료를 따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돈이 들어갈 곳투성이일 것이다.

나는 휴대 전화를 열어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그러곤 여기저기 있던 여유 자금을 한데 끌어모았다.

“음… 지금 여유 자금이 한 10억 정도는 있네.”

여유 자금이 10억쯤 모이게 된 건, 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집, 차, 생활비를 제외한 것에 사치를 부린 적은 없었고.

차곡차곡 돈을 쌓아가다가 할리우드에 가면서 한 번에 큰돈을 벌게 되었다.

연예계 생활을 하게 되니, 생각보다 돈을 쓸 곳이 많지는 않았다.

당연히 물건을 사 모으고 사치를 부리게 되면 돈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위해 쓰는 돈은 많지 않았다.

나를 가꾸는 비용부터 의류, 식대 등 이 모든 것은 활동 중에 회사 돈으로 지불되었으니까.

뭐, 이 돈들이 단순히 나를 위한 호의가 아니라.

내 배우 생활을 위한 투자며, 내가 갚아야 할 돈이기는 했다.

배우들이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은 ‘취미 생활’이었다.

상대적으로 쉬는 기간이 있는 배우는 작품 촬영이 끝나고, 다음 작품이 잡힐 때까지 무기한 휴가를 받게 된다.

그사이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을 하기도 하고.

나만을 위한 여행, 또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느라 돈을 쓰기 마련이다.

그런 생활이 보편적이지만, 나는 달랐다.

그 쉬는 틈이 워낙 적은 배우였기에, 돈을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

한 작품이 끝나자마자 다음 작품을 찾아 나섰고.

운과 더불어 노력의 결실로 나는 휴식기 없이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돈이 자연스레 통장에 쌓여갔던 것.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지금 내 통장에는 내가 보고도 놀랄 정도의 돈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 돈을 고스란히 새롭게 만들 회사에 투자할 수는 없었다.

성공시킬 자신은 있으나, 전 재산을 쏟아붓는 건 당연히 무리였고.

이 중 여유 자금 10억으로 시작하려는 것.

노트북을 두드려 사무실 시세와 부대 비용들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소규모 엔터로 몇 년간 버틸 수 있는 금액은 되겠네.”

당장 건물을 살 것도 아니었고, 적당한 사무실을 얻어 시작할 정도는 충분했다.

다만, 소규모 엔터라고 해도 오래 버틸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음… 여기에 새로운 연예인들을 데려올 계약금이나 몸값까지 하기에는 부족하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 그래도 내가 일하면서 자동으로 경제적인 건 충당될 거니까. 자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조금씩 머릿속에서 가닥이 잡혀가는 독립 계획.

수많은 플랜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한참 서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 * *

며칠간 내 머릿속의 계획을 열심히 그려냈고.

그 계획이 확고해질 때쯤.

영화 ‘턴테이블’의 천 감독과 약속을 잡았다.

이제는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도 된다고 판단했으니까.

“감독님!”

대본 리딩을 했던 건물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천 감독의 모습.

나는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어, 희성 씨. 오랜만이에요.”

그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고.

이제 다시 내게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오느라 힘들었죠?”

우리는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아닙니다. 차로 오는데 제가 힘들 게 있나요. 하하.”

천 감독은 웃으며 미팅실로 나를 안내했다.

잠시 뒤.

미팅실에 도착한 우리.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저야 턴테이블 대본을 달달 공부하고 있죠.”

천 감독과 나는 근황과 안부를 물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오고 가던 중.

천 감독이 나를 바라보며 본론을 던졌다.

“근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전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 뵙고 여쭤볼 게 있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끌어당겼고.

나는 조심스레 천 감독에게 물었다.

“지금 턴테이블에 캐스팅되어 있는 WG 엔터 배우들 말입니다.”

“네.”

“혹시… 그 배우들 뺄 수 있다면 빼고 싶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천 감독은 내 말이 끝나자 곧바로 동공이 흔들렸다.

이것에 대해 고민이 있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그는 표정과는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번에 희성 씨가 도와주셔서 절반 정도는 빠졌으니까요.”

천 감독의 말에도 나는 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솔직히 말해주셔도 됩니다. 아니, 숨김없이 천 감독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미팅실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그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천 감독은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생각 정리하는 듯 보였고.

이내 나를 향해 물었다.

“근데 WG 엔터의 배우들의 캐스팅이 그대로 유지되어야만, 희성 씨도 주연으로 함께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천 감독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내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진희성 씨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 턴테이블에 투자한 투자자들도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고요.”

그의 말에 나는 천 감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WG 엔터 배우들, 그리고 WG 엔터와 저는 별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편하게 말해주세요.”

“…그렇다면, 그 배우들 모두 저희 작품에서 빼고 싶습니다. 역할과 더 잘 어울리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싶고요.”

천 감독의 진심을 듣고, 나는 곧장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는 내 말이 끝나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저야 좋긴 한데, 희성 씨가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도 WG 엔터의 입김이 있는데, 그 배우들을 다 뺀다고 하면….”

“저는 이 작품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가 천 감독님을 찾아뵙고 싶었던 거고요.”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하고 싶은 작품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던 거고.

“WG 엔터 배우들을 뺀다고 하더라도, 저는 회사의 의견과 달리 이 작품에 무조건 출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감독님 보호는 못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가 최대한 힘을 쓸 수 있는 선에서는 노력할 테지만. 천 감독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게는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뒤에는 영화 협회가 있잖습니까. 하하.”

그는 너스레를 떨 듯 내게 말했고.

미팅실 뒤에 있는 영화 협회 자료를 손으로 가리켰다.

“영화 협회도 이런 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절 도와줄 겁니다.”

천 감독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좋네요. 그럼 부당하게 들어온 WG 엔터 배우들 빼는 거로. 전략 한번 잘 짜보죠.”

“예, 저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꽉 잡고 허공에서 눈빛을 부딪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