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75화 (275/303)

275화 #50 – 책임감 (3)

영화 ‘턴테이블’ 일정이 밀린 후.

그 원인이었던 최 전무와 박 대표.

WG 엔터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최 전무에게는 애초에 믿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박 대표만큼은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대본 리딩 후 대표실에서 언성을 높이다가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 역시 박 대표를 전적으로 믿고 맡겼기 때문이지.

그런데 결국 절반에 가까운 배우들이 턴테이블에 캐스팅이 된 채 남아 있었고.

자꾸만 떠오르는 대본 리딩의 현장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역과 맞지 않는 배우들.

억지로 남의 옷을 입힌 것만 같은 어색한 연기.

물론 그들 중 연기가 출중한 배우들도 있었다.

다만, 연기력과는 별개로 배역과 그 배우의 캐스팅이 맞지 않음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지.

그걸 극복해내는 게 배우라지만.

연기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더라도, 뚱뚱한 사람이 마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목소리가 굵은 사람이 하이 톤의 얇은 목소리를 연기하는 것 또한 할 수가 없는 일.

그런 점에서 나는 미스 캐스팅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미스 캐스팅이 일어나면 안 되는 이유는 당연했다.

맞지 않는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한다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회사에서는 나와 최 전무의 절충안을 찾기 위해 절반의 배역을 잘라냈지만.

나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기에, 결국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옮기고만 싶었다.

“그때 재계약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단순히 이번 일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이 어렵지, 다음 작품에도 이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천 감독을 통해 WG 엔터의 배우 절반이 잘려 나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왜 전체 배우를 잘라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회사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계약서에 있는, 내가 원하는 조건 대로 연기를 하게 해달라는 조항.

그것과 이미 틀어진 첫 번째 작품.

당장이라도 회사를 옮기고 싶었지만, 회사와 최소한의 ‘정’을 생각해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막무가내로 내 멋대로 연예계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배우로서 좋은 작품을, 좋은 컨디션에서 펼치고 싶다는 것일 뿐.

어려운 조항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첫 단추부터 꼬여 버린 이 상황이 내게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이 일을 벌인 최 전무.

나는 그에게로 발길을 향했다.

“희성 배우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최 전무는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고.

주변을 쓰윽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김 실장은?”

“저 혼자 왔습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내 말에 그는 의자를 바라보며 답했다.

“뭘 확인하고 싶으실까…. 우선 앉아.”

“네.”

우리는 마주 보고 자리를 잡았다.

그와 시시콜콜한 대화는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턴테이블. WG 엔터에서 들어갔던 배우들, 절반만 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변명조차 늘어놓지 않는 그의 태도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에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들어간 이후로 꽂아 넣은 배우들은 전부 빼달라고요.”

최 전무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 그래서 다 뺀 거야. 지금 남은 애들은 실력으로 캐스팅이 된 거니까.”

실력으로 캐스팅이 됐다는 배우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천 감독에게 상황을 다 들은 후였기에,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바로 증명되어 버렸지.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그에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다.

“전부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한마디의 말에는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최 전무, 당신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당장 배우들 캐스팅을 원상 복구해 놔라.’

‘더 이상 내가 출연하는 작품에 장난질하지 말아라.’

이 모든 속뜻을 최 전무가 모를 리 없었다.

내 말에 최 전무는 잠시 고민은커녕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희성 배우가 나를 의심하네. 걔들은 자기 실력으로 들어갔는데, 내가 무슨 수로 캐스팅을 엎을 수 있겠어. 안 그래? 하하.”

음흉하게 찢어진 입꼬리.

욕망이 가득한 두 눈.

나는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찾지 못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네, 최 전무님 뜻 잘 알았습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회사를 빠져나왔다.

* * *

똑똑.

“어, 들어와.”

박 대표실을 찾은 최 전무는 문을 열고 허리를 깊게 접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어?”

최 전무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진희성 그 자식이 다녀갔습니다.”

“뭐? 너한테?”

“네.”

박 대표는 심각해진 얼굴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에 마주 앉은 둘.

그는 최 전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희성이 와서 뭐라고 했어. 하나도 빼지 말고 다 말해봐.”

“그게….”

최 전무는 자신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전부 보고했고.

이야기가 끝나자 박 대표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고 나간 거야?”

“예.”

“최 전무, 네 마음은 다 알겠는데, 진희성 너무 자극하지는 마.”

그의 말에 최 전무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희성을 잡으려면, 지금뿐입니다.”

최 전무는 검지를 들어 허공에 휘이 저으며 박 대표에게 말했다.

“진희성, 송유나랑 만나더니 대가리가 너무 커졌어요. 기세등등해져서는 자기가 뭐라도 된 양 행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더 날뛰기 전에 잡아야죠. 솔직히 회사에서 후배 배우들 끼워 파는 거,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최 전무의 말에 박 대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진희성이 원하는 조건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그리고 우리가 배우들 절반은 안 빼고 놔뒀잖아. 서로 한 발짝씩만 양보하자고.”

“아니, 대표님… 이렇게 소속 연예인들 원하는 대로만 해주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최 전무의 열변에 박 대표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 얼굴을 본 최 전무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최 전무.”

“…네, 대표님.”

“네가 한국 와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알아. 근데 어쨌든 진희성은 지금 이 영화계에 영향력 있는 배우잖아. 힘들게 재계약했고.”

“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최 전무를 지그시 바라보며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희성이 지금은 우리 회사 간판이라고. 괜히 성질 건들면서 너무 찍어 누르지 마. 나도 최 전무랑 같은 생각인데, 지금은 때가 아니야.”

최 전무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 * *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폰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

나는 송유나임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문을 벌컥 열었다.

“유나야, 왔어?”

“응, 어제오늘 스케줄 없다면서 왜 집에만 있어?”

그녀는 내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온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스캔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LA에서 연락이 되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던 그때가 떠올랐는지.

송유나는 내 양팔을 붙잡고 말했다.

“아프거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알겠어.”

“나… 공개 연애하는 중인데, 오빠 무슨 일 생겨서 불화설이라도 피어오르는 날에는… 죽는 줄 알아.”

그녀는 작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내밀었고.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거실 소파에 앉은 우리.

나는 며칠 내내 하던 고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내 고민을 그녀에게 말해 걱정을 덜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이 이야기를 확정 짓기 전에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지.

“유나야.”

“응?”

“나… 회사 나갈까 생각 중이야.”

내 말에 화들짝 놀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디로 가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옮길 회사를 묻는 그녀.

“놀라지도 않네?”

“응, 놀랄 게 뭐 있어. 오빠가 회사를 옮긴다고 해서, 연기하는 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맞지. 내가 연기하는 건 똑같으니까.”

“오빠가 어느 회사를 가든, 그 선택과 결정을 응원해. 내가 도울 거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오빠 여자 친구, 그 정도 능력은 충분하잖아?”

송유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에 나 역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비록 내가 따라서 회사를 옮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WG 엔터에 남아서도 충분히 오빠 도와줄 수 있어.”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라고 할 생각도 없고, 거기에 남는다고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지. 우리가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일에서는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니까.”

송유나 역시 나와 회사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WG 엔터에 더 남았으면 하는 바람은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나가는 것을 더욱 응원하는 것 같았지.

“애초에 우리, 회사에서 마주치는 일도 없잖아.”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그러니까 최 전무가 문제이긴 하네. 왜 배우가 싫다는 짓을 그렇게 하는지….”

송유나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회사를 옮기는 것에 대한 고민을 끝낸 상태였지만, WG 엔터에 남은 최 전무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 전무가 문제지…. 내가 나가고 나면, 최 전무가 분명 나를 깎아내리려고 애를 쓸 텐데.”

내 말에 송유나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엔터가 뒤끝이 있는 스타일이긴 해.”

“보복이라도 하려고 할 텐데, 미리 대안이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송유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응?”

“나 있잖아.”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WG 엔터에 남아 있고, 오빠 여자 친구인 거 아는데. 오빠를 건들기라도 한다? 그럼 나도 가만히 못 있지.”

송유나가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 회사에 버티고 있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회사에서는 나를 건들기 쉽지 않을 터.

그녀의 말뜻을 알고 있었지만, 내 고민이 향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박 대표가 냉정하기는 해도 똑똑한 사람이라 잠자코 있을 거 같은데, 문제는 최 전무지.”

“아오, 최 전무…!”

“그 인간은 워낙 충동적이기도 하고, 박 대표만큼 냉철하지가 않은 사람이잖아.”

하지만 최 전무가 저지를 행동을 생각해 회사에 남을 수는 없었다.

이미 그로 인해 WG 엔터를 나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니까.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는가.

최 전무가 내게 어떠한 행동을 취하더라도, WG 엔터에 남아 그와 함께하느니.

회사를 옮겨 그와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몇 시간 뒤.

송유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집.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

하루라도 빨리 계획을 실행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곧장 김 실장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여보세요?

“형, 나 할 말이 있어서.”

-응, 무슨 일인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수화기 너머에 김 실장이 듣도록 입을 열었다.

“형, 독립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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