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50 – 책임감 (1)
박 대표와 영화 ‘턴테이블’의 캐스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WG 엔터 내에서 턴테이블에 무임승차를 했던 배우들이 하나둘 하차 절차를 밟고 있었다고 한다.
대본 리딩 때 내 눈으로 본 WG 엔터의 배우만 해도 5명.
듣기로는 이 5명 외에도 조연과 단역으로 출연하는 배우까지 여럿이 더 있다고 했고.
그 배우들까지 전부 회사에서 다시 조율하는 중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WG 엔터에서 꽂은 배우를 전부 빼내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3분의 1 정도의 배우는 천 감독과 타협해, 출연을 확정 지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걸려온 전화.
[발신인: 천지호 감독]
천 감독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반가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내가 WG 엔터의 배우들을 이 작품에 강제로 넣어 달라 한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소속한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여보세요?”
-희성 씨, 잘 지냈어요?
“그럼요. 감독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나야 늘 똑같지. 다름이 아니라, 우리 크랭크인 일정이 좀 미뤄져서 연락했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매니저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러겠네. 그래도 우리 주연 배우님한테는 내가 직접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지.
“감사합니다. 하하.”
-희성 씨도 알다시피, 배우들을 다시 캐스팅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예, 알죠. 죄송합니다, 감독님.”
내 말에 천 감독이 놀란 목소리로 급히 답했다.
-아이고, 희성 씨가 뭐가 미안해요. 희성 씨도 모르던 일이던데.
“그래도 저희 회사 내에서 그런 거라… 죄송하죠.”
-아닙니다. 그래도 희성 씨가 회사에 이야기한 덕에 재캐스팅하게 됐습니다.
“원래 들어갔던 배우들이 다 빠지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네, 전부는 아니고, 한 절반 조금 넘게 빠졌어요.
“하아….”
천 감독의 이야기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회사에 이야기했음에도, 여전히 작품에 남은 배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달래듯 웃으며 말했다.
-이쯤하면 저도 괜찮아요. 전부는 아니라도, 그래도 처음에 구성했던 캐릭터들로 캐스팅할 수 있게 돼서… 진짜 고마워요.
“아닙니다. 애초에 그게 당연한 거잖습니까.”
-에이, 뭐 이 바닥이 그렇죠. 좋은 배우님 모셔가려면, 흔한 일이니까요.
천 감독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지 못했고.
그는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이어갔다.
-추후 일정은 빠르게 잡을 텐데, 정해지는 대로 연락 또 할게요.
“네, 고생하십니다. 감독님.”
-미뤄진 만큼 우리 더 잘 찍어봅시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 감독과 전화를 끊은 후.
나는 회사를 향한 분노와 답답함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1만 년의 기억.
모든 것이 되살아나면서 상상치도 못할 만큼의 방대한 경험이 쌓였다.
덕분에 젊은 진희성의 나이에도 모든 이들의 머리 굴리는 소리와 검은 속내가 뻔히 보였지.
특히, 최 전무가 어깃장을 놓는 그의 속셈이 내게는 훤히 드러났다.
그렇다고 최 전무만을 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전무의 직책에 있다고 해도, 그 안건을 승인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으니까.
그 위에 있는 박 대표.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WG 엔터… 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회사라 다를까 했는데. 다른 곳이랑 다를 게 없네.”
연예계 3대 엔터, 5대 엔터고 뭐고.
그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려는 연예 기획사는 그 어떤 곳과 비교해도 나은 곳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대기업이라 불리는 WG 엔터가 더할지도 모를 일이지.
자신만 믿고 가라던 박 대표 역시.
회사의 이익을 위해 결국 발을 빼는 게 아니라, 한발만을 물러설 뿐이었으니까.
* * *
‘턴테이블’의 일정이 미뤄진 후.
더욱 작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매일 연습에 몰두하며 보내던 중.
송유나와 휴식 날이 겹쳐 오랜만에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직장인들의 주말과 같은 휴식을 취하던 평범한 오후.
다른 연인들과 별다를 것 없는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다만, 데이트 장소가 그녀의 ‘집’ 혹은 우리 ‘집’이라는 것 빼고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데이트를 할 수 없는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그녀와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소파에 널브러져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소가 국한되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너무 평온하고 행복한 데이트였다.
내 모든 일상생활을 통틀어 송유나와 같이하는 이 시간이 가장 나다운 것 같았으니까.
그러던 중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물었다.
“커피 마실래?”
“그래.”
송유나는 싱긋 웃으며 커피를 가져왔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한강을 바라보았다.
“맞다, 그래서 영화 시작은 언제야?”
“아직. 이제 캐스팅 다시 하니까, 아마 시간 좀 걸리지 않을까 싶어.”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들이켰다.
“하여튼 그 새로 왔다던 전무가 문제야, 문제.”
“그러게. 이런 일로 머리가 아플 줄은 몰랐지.”
내 말에 송유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게 말했다.
“근데 이런 일 종종 있어.”
“유나도 많이 겪었어?”
내 말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과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야 너무 많은 작품에서 겪어서 뭐….”
그녀는 한숨과 함께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메인 배우 힘으로 얼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 막무가내로 집어넣는 거, 많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어떻게 했어?”
송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들어온 배우들한테 관심도 없고.”
“그래도… 그 배우의 연기력이나 능력으로 들어온 게 아니잖아.”
송유나는 관심 없는 눈빛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연기를 못하면 감독, 시청자들한테 욕먹을 거고. 나는 내 배역만 영향 없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에 굳이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이건 누가 맞고, 틀린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저 생각과 관점의 차이일 뿐.
아주 작은 단역부터 올라온 나는 이러한 일들을 그저 모른 채 넘길 수가 없었다.
수많은 다른 배우의 기회를 앗아가는 대기업의 횡포였으니까.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한숨과 함께 커피를 들이켰고.
송유나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응, 뭔데?”
“오늘 정산금 들어오는 날이다.”
그녀의 말에 나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네. 곧 들어올 시간이네.”
“같은 회사 다니니까, 우리 돈 들어오는 날짜랑 시간도 똑같네.”
다 똑같은 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대기업이라 투명한 건, 정산금이었다.
얼마의 출연료가 있었고, 떼어가는 비율과 정산 내역은 거짓이 없었으니까.
그때.
딩동-
송유나의 휴대 전화에 알람이 울렸다.
딩동-
동시에 내 손에 들린 휴대 전화에도 입금 알람이 울렸다.
그 소리에 송유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정산됐네.”
“그러게.”
나는 휴대 전화 화면에 뜬 입금액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김 실장을 통해 정산 금액을 알고 있었기에.
알고 있던 금액이 맞게 들어왔는지 확인할 뿐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마지막 작품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는 찍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광고와 출연료의 정산이 남았기에, 수입은 꽤 만족할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 전화 화면을 껐고.
송유나는 그제야 테이블에 놓인 휴대 전화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굳이 내게 수입을 숨기려는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연 것인지.
테이블 위에 놓인 채로 휴대 전화 화면을 열었다.
“음… 이번 달엔 얼마나 들어왔을까….”
그녀는 자신의 정산액을 모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금액을 확인했다.
나는 애써 그녀의 입금액을 몰래 보려 하지 않아도, 그냥 눈앞에 있는 그녀의 휴대 전화를 통해 금액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으려 슬쩍 그녀의 전화를 보았고.
……?
그 화면을 보자마자 떡 벌어진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어… 어…?”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 나오는 액수.
내게 꽂힌 입금액에 자릿수가 하나 많은 숫자였다.
쏟아질 듯 커진 내 눈동자에 송유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오빠 내 금액 봤어?”
“아니… 훔쳐보려고 한 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보던데 그걸 어떻게 못 봐….”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휴대 전화를 가리키며 감탄을 쏟아냈다.
“근데 어떻게 나보다 금액이 이렇게나… 클 수가 있는 거야….”
내 말에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쓰윽 넘기며 얄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잊었나 본데. 나 송유나야.”
그녀의 말에 나는 손뼉을 부딪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다. 내 여자 친구 송유나였지.”
송유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오빠는 조금 더 노력해. 나만큼 올라오는 거 쉽지 않다.”
그녀의 장난기 섞인 말투에 나는 화답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게 노력했는데 멀었다니, 억울하네.”
송유나는 웃으며 나를 품에 안았다.
* * *
“형이랑 오랜만에 둘이 술 마시네.”
김 실장과 찾은 단골 술집.
우리는 가득 채워진 잔을 높이 올리며 부딪쳤다.
챙-
한입에 술을 들이켠 김 실장은 안주를 먹기도 전에 내게 물었다.
“그러게. 우리 둘이 마시는 건 진짜 오랜만이야.”
“맞아. 다른 사람들 껴서는 많이 마셨는데, 둘만은 오랜만이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갑자기 왜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김 실장은 나를 걱정하듯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별일은 없고. 그냥 형이랑 오랜만에 마시고 싶어서 연락했지.”
“좋지.”
김 실장이 웃으며 내 빈 잔을 채웠고.
우리는 간만에 일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의 대화를 이어갔다.
“형은 요즘 어때, 결혼하니까 너무 좋아?”
내 말에 김 실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 아는 형들이 결혼은 늦게 할수록 좋다, 아니 하지 말아라 그러는데. 나는 진짜 좋아.”
“하긴, 형 결혼하고 나서 얼굴 진짜 좋아졌어.”
김 실장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내게 물었다.
“희성이 너는 결혼 생각 없어?”
“에이, 나는 연기해야지.”
“결혼하고 연기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렇긴 한데… 아직 생각은 없네?”
늘 10년마다 새로운 생을 살아온 나였기에.
‘결혼’이라는 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떠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도 억누르고 살았으니까.
김 실장이 내 눈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조언을 하듯 입을 열었다.
“희성아, 유나 씨든 누구든. 이 사람이다 싶으면 결혼해. 평생 내 편, 내 사람, 내가 지켜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는 거. 그거 말로 표현 다 못 한다.”
그의 말에 나는 순간 송유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지켜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사람….
앞으로 1만 년을 더 살아도 그런 사람은 송유나뿐일 것 같았다.
“희성아?”
그녀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자,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불렀고.
나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형, 결혼하더니 완전 사랑꾼 다 됐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말했다.
“희성아, 사실….”
말을 망설이는 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고.
김 실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내게 말했다.
“나… 아빠 된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헐, 진짜?”
김 실장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와아… 진짜 축하해. 결혼식한 게 엊그제 같은데, 형이 아빠가 된다니.”
챙-
우리는 곧장 축배를 들었고.
쓰디쓴 알코올을 넘기자마자 김 실장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뭐야, 좋은 일 이야기하자마자 웬 한숨?”
내 말에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말했다.
“걱정이 많아서.”
“아빠 될 사람이 당장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는 한숨과 함께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매니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