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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72화 (272/303)

272화 #49 – 미스 캐스팅 (5)

30분 전.

“김 실장이 희성이 잠깐 데리고 가서 열 좀 식히고 대표실로 올라와. 그리고 최 전무는 지금 바로 나 따라오고.”

박 대표의 말에 김 실장과 진희성은 옥상 테라스로.

그리고 최 전무는 박 대표를 따라 대표실로 위치를 옮겼다.

박 대표는 자신을 따라오는 최 전무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최 전무.”

“네, 대표님.”

“아니, 왜 소속 연예인이랑 언성을 높여서 이야기를 해.”

그의 말에 최 전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실에 도착한 둘은 곧장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박 대표는 최 전무를 향해 본론을 펼쳤다.

“그래서 저번에 블랙 코미디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작업이 그거야?”

“네, 솔직히 저희가 블랙 코미디 들어가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최 전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설득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진희성이 고른 작품, 솔직히 흥행 가능성이 낮잖습니까. 그런데 회사에서 군말 없이 계약하게 해줬는데, 그대로 손 놓고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건 맞지.”

“지금 진희성이 다른 작품 골라서 차기작 들어갔으면, 무조건 흥행입니다. 떼돈 버는 거라고요. 근데 원하는 작품 하게 해줬으면, 회사에서 다른 배우들 넣어도 감사해야 하는 거 같은데….”

최 전무는 진희성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혀를 내둘렀고.

박 대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긴 한데, 당장 재계약을 하려면 진희성의 조건도 맞춰줘야 하니까.”

“턴테이블, 그 작품은 진희성 아니었으면 묻혀 버릴 영화입니다. 진희성 때문에 주목받을 텐데, 여기서 바이럴 느낌으로 소속 배우들 얼굴도 알리고, 인지도도 올리면 서로 윈윈 아닌가 싶은데요.”

박 대표는 최 전무의 말에 틀린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이득 봐서 나쁠 건 없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박 대표를 확인한 최 전무가 눈을 반짝였다.

“제가 진희성,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니야.”

“네?”

“최 전무, 자네 혼자 설득하긴 힘들 거야. 올라오면서 김 실장한테도, 그리고 아까 보니까 진희성 꽤 화났던데.”

최 전무는 그런 진희성의 분노를 직접 확인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박 대표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좋은 방안을 찾고 있었고.

최 전무는 쓰읍, 소리를 내며 그에게 물었다.

“근데 제가 한 본부장한테 듣기로 진희성, 순둥순둥한 캐릭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원래 저런 스타일이었습니까?”

그의 말에 박 대표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한 본부장 말이 맞아. 원래 이런 일이 있어도 늘 스무드하게 별 탈 없이 넘어갔는데. 이제 덩치가 커져서 그런지… 이런 일에 발끈하기도 하네.”

최 전무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연예인들 치고 올라올 때 눌러줘야 해요. 아니면, 다 제 세상인 줄 알잖아요.”

박 대표가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근데 이제 이런 건은 조심하게 움직여야겠어. 저렇게 난리인 거 보니까, 더는 함부로 하기 힘들 거 같고….”

“네, 주의하겠습니다.”

“응.”

그는 박 대표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대표님, 철회하실 겁니까?”

최 전무의 물음에 박 대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유, 철회는 무슨. 곧 올라올 테니까 설득해 봐야지. 아니, 설득시켜야지.”

“네.”

“최 전무는 우선 화난 진희성부터 어떻게 좀 하고.”

그의 말에 최 전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사과하고, 우선 이 상황은 넘겨보자고.”

* * *

“최 전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도 했고,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이번에는 넘어가고, 다음부터는 최 전무도 희성이 작품에 말없이 배우 넣지 말고. 알겠지?”

어물쩍 이 상황을 끝내려는 박 대표.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해 실소가 터져 나오려 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사과는 사과인 거고.

나는 이 일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고 따져 물은 게 아니었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지.

박 대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내 말에 박 대표와 최 전무는 놀랐는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박 대표가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뭐.”

“이번 작품 캐스팅. 이렇게 넘어가는 건 안 되겠습니다.”

박 대표는 앓는 소리와 함께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아니, 이미 캐스팅도 끝난 마당에 뭘 어떡하자고?”

“감독이 원하던 캐스팅이 아니었잖아요. 저희 회사에서 마음대로 넣은 배우들이고요.”

“그래서?”

나는 최 전무는 신경 쓰지도 않고, 박 대표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이후로 들어간 배우들은 다 빼죠.”

“뭐?”

박 대표가 놀란 얼굴로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제가 캐스팅된 이후에 넣으신 배우님들. 그 배역 다 빼주세요. 그게 맞잖아요?”

내 말에 박 대표는 웃음으로 무마하기 위해 사람 좋은 인상으로 내게 몸을 당겼다.

“에이,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배우들한테 이야기하기도 뭣하고.”

박 대표는 옆에 있는 최 전무를 툭 치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턴테이블 대본 리딩까지 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최 전무가 곧장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희 배우들도 몇 명 가서 대본 리딩 마쳤다고 했습니다.”

최 전무의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봐, 이미 대본 리딩까지 했는데 어떻게 캐스팅을 취소하겠어. 희성이가 이번 한 번은 넘어가주자.”

나는 이 일에 대해 대충 지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게 소속 배우들을 꽂아준다는 것을 상의했고, 안 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게 이 일에 대해 상의했다면?

당연히 동의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턴테이블에 들어온 배우들. 그 배우들은 자신들의 캐스팅이 제 덕분인 거 모릅니까?”

내 말에 박 대표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지.”

그의 말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대표님, 그러면 더 문제죠. 제 덕분에 작품에 출연하게 된 건데, 그게 자신들의 실력인 줄 알 거 아닙니까.”

“그렇게 기회도 한 번 가지게 되고 하는 거지. 회사 식구 좋다는 게 뭐냐, 안 그래?”

그의 말에 최 전무는 보태듯 입을 모았다.

“맞습니다. 그렇게 식구들 도와주고 하는 거죠. 이번에는 희성 씨가 양보하고….”

나는 최 전무의 말을 툭 잘라냈다.

“못 하시겠으면,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턴테이블에 꽂은 배우들 명단 주십시오.”

내 말에 박 대표는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고.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희성아,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의 표정에도 나는 흔들림 따윈 없었다.

“네,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건데?”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제가 주연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WG 엔터 소속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캐스팅이 된 거니까요.”

최 전무는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그들을 향해 내 생각을 내뱉었다.

“그 배우들로 인해서 기회가 박탈된 다른 배우들이 몇이겠습니까. 몇 날 며칠을 준비했을 텐데,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WG 엔터라는 이유만으로 캐스팅된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내 말이 끝나자 옆에 앉은 최 전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웃음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이런 웃음이 나온다고?

“뭐 하시는 겁니까?”

황당하게 그를 바라보자, 최 전무는 언제 웃었냐는 듯 웃음기를 싸악 지운 후 나를 쏘아보았다.

“아니, 뭐 미니시리즈도 아니고. 꼴랑 블랙 코미디 하나 찍으면서 이렇게 유세를 떨 일인가 싶어서.”

“뭐라고요?”

그의 말에 나는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내리깔아 보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최 전무님, 그러면 그 별것도 아닌, 블랙 코미디에 왜 배우들을 꽂아 넣습니까?”

“…….”

최 전무는 할 말을 잃었는지,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

“잘될 거 같으니까, 배우들 어떻게든 꽂은 거 아닙니까?”

나는 최대한 언성을 높이지 않고 그에게 팩트로 조곤조곤 따졌고.

내 말에 박 대표가 나를 막아섰다.

“알겠어, 희성아. 알겠으니까 그만해.”

나를 말리는 박 대표의 말투에는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 상황을 끝내려는 박 대표였기에.

계속해서 그와 반대 의견을 내는 내게 점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박 대표는 눈을 질끈 감았고.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내가 바로잡을 테니까, 희성이 너는 이만 집에 가.”

“…….”

그의 말에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인 최 전무가 여기 있었고.

더군다나 끝까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최 전무가 상황을 해결할 리는 없다 판단했으니까.

박 대표는 내가 아무 답이 없자, 감았던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시선 끝에 있는 최 전무를 확인했고.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 믿고 가. 최 전무는 몰라도 나는 믿을 거 아니야.”

박 대표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믿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희성아, 도착했어.”

김 실장과 함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그는 내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대표실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했을 테지만.

내 표정을 보고 애써 궁금함을 삼켜냈겠지.

집 앞에 멈춰 선 차.

김 실장은 차 안 라이트를 켜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바닥에 내려진 짐을 들고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 조심히 가.”

차를 열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

“희성아.”

그의 목소리에 나는 몸을 멈춰 세웠다.

“응?”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서 김 실장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앞뒤를 다 빼놓은 채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잘했다.”

하지만 그 빠진 앞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회사에 찾아가 이 부당한 일을 따진 것에 대한 그의 답이었지.

그런데 내가 생각한 김 실장의 생각과는 다른 답이었기에.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그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거, 형은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회사에 따진다는 건.

회사와 나 사이에 틈이 생기고, 불편해진다는 것.

그렇게 되면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김 실장뿐이었다.

그럼 가장 힘들고 불편한 사람은 당연히 김 실장일 터.

그런데 김 실장이 코를 찡긋거리며 내게 답했다.

“사실 조금 곤란한 건 맞는데… 뭐,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의 말에 나는 얼굴에 쌓였던 분노가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김 실장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라면 말 못 했을 거야.”

“그래?”

“응, 사실… 내가 알던 너라면 이렇게 안 했을 거 같고. 아마 회사에서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라, 이 일 너한테 이야기 안 했던 것 같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나는 이런 일에 오늘처럼 찾아가 따져 묻는 타입은 아니었다.

트러블은 어지간하면 피하자는 주의였으니까.

그런데 1만 년 기억이 한 번에 들어온 이후.

조금…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바뀐 것 같다.

뭐랄까, 부딪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달까?

이제는 하고 싶은 건 해야 하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렸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김 실장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쨌든 난 찬성이야.”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응?”

“네가 예전에는 뭔가 선(善)에 얽매이고, 필사적으로 무언가 해내야 하는 그런 느낌이었거든. 근데 지난 영화 이후로 네가 여유로워진 것 같아서 좋다고.”

김 실장은 그 말을 끝으로 닫혔던 차 문을 벌컥 열어 나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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