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49 – 미스 캐스팅 (4)
내 말에 김 실장은 놀란 듯 차 안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응.”
해가 떨어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회사에 윗선이 남아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오늘 오후 늦게 광고 미팅이 잡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 퇴근을 하기 전일 테고.
오늘이 넘어가기 전에 꼭 확인하고 싶었다.
대체 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인지.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는 룸 미러를 통해 심각한 내 표정을 보았고.
끼익-
이내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집에 가는 길이 아닌, 회사로 향하려면 반대 반향으로 가야 했으니까.
김 실장은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김 실장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형, 오늘 대본 리딩에 WG 엔터 배우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더라. 아니,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 WG 엔터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됐다는 말이지.”
어차피 회사 윗선을 만나기 전, 김 실장에게 확인을 하려 했다.
회사 내부의 일은 나보다 김 실장이 더 많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형도 알고 있었어?”
재차 묻는 내 말에 김 실장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닌 듯 보였으나.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아닌 듯했다.
애매모호한 태도에 나는 몸을 앞으로 밀며 그에게 다가갔다.
“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설명 좀 해봐.”
김 실장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꽉 부딪치며 한숨을 삼켜냈다.
“그게… 나도 확실한 건 아니고.”
“응, 아는 대로라도 이야기해줘.”
“저번에 회의에서 팀장님이 이야기하시더라고. 너 주연으로 들어가니까, 거기에 우리 회사 애들을 조연으로 넣을 수도 있다고.”
상황을 알고 있던 김 실장에게 나는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형도 다 알고 있던 거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말이 나오기는 했는데, 확정은 아니라고 했거든. 확정되면 다시 이야기해 주기로 했는데, 그 뒤로 말이 없길래 무산된 줄 알았어. 그래서 너한테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이용해서 회사 배우들을 강제로 캐스팅시키려고 했다는 정황은 있네.”
“그건 그렇지….”
김 실장은 난감한 듯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현재 가장 불편한 사이에 낀 건 김 실장일 터.
내게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숨긴 모양새가 된 듯했고.
회사에 화가 난 내가 옆에 있기에, 회사에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까.
더군다나 그런 김 실장을 나무라거나 이 분노를 그에게 조금이라도 표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 실장이 주도한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지.
“형,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이야기해 봐야겠어.”
“배우들 캐스팅을?”
“어. 오늘 대본 리딩에서… 하아….”
당시를 떠올리며, 미스 캐스팅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우선 난 회사로 좀 가야겠어. 오늘 오후에 큰 미팅 있어서, 다들 회사에 계시지?”
그는 시간을 확인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어. 아직 회사에 계실 시간이야.”
“회사로 좀 가자.”
* * *
WG 엔터테인먼트.
커다란 간판 아래 멈춰 선 차.
끼익-
주차장으로 향하기도 전, 입구에 차가 멈춰 서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형, 나 먼저 내릴게.”
“희성아…!”
김 실장의 부름에도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내려 로비로 향했다.
잠시도 망설일 틈이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윗선 인물들을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 윗선의 인물이 누구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일에 대해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건지,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내게 말도 없이 일을 벌였는지 말이다.
김 실장에게 회의 때 이야기를 해줬다는 팀장.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한 본부장?
아니, 나는 곧장 대표실이 위치한 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제 차례대로 하나씩 올라가며 확인을 해야겠는가.
망설일 것 없이 바로 대표실로 올라갔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반기는 건, 박 대표가 아닌 대표실 앞에 앉은 비서였다.
나는 대표실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진희성입니다. 대표님 좀 뵙고 싶은데요.”
내 말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어쩌죠. 대표님은 잠시 자리 비우셨는데요.”
“퇴근하신 건가요?”
“아니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가셨어요.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급한 일이실까요?”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속도 없이 대표를 찾아 올라온 소속 연예인.
더군다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올라왔기에,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언제쯤 오실까요, 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마 1시간 이내로는 오실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면 제가 대표님에게 전달 드리겠습니다.”
“영화 ‘턴테이블’에 WG 엔터 식구들이 왜 깔렸는지 궁금해한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럼 아실 겁니다.”
그녀는 내 말을 그대로 다이어리에 받아 적었다.
“네, 바로 전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앞에 의자에 착석했다.
그렇게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
딩동-
엘리베이터가 대표실 층에 도착했다.
그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 대표를 맞을 준비를 했다.
“진희성 배우는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비서를 향해 물었고.
그 사람은 박 대표가 아닌, 최 전무였다.
비서는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저기….”
“아, 여기 있었네. 대표님 찾았다고?”
그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고, 나는 그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이랑 말씀 나누고 싶은데요.”
“턴테이블에 우리 회사 배우들 들어간 거 때문이라던데, 맞나?”
“예.”
그는 고개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젖히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나랑 이야기하지. 내 방으로 가자고.”
나는 그를 따라 발길을 옮겼고.
정적만이 흐르는 거리를 따라 금세 아래층 작은 방에 도착했다.
“어, 편히 앉아.”
최 전무는 한국 WG 엔터에 금방 적응했는지, 한껏 여유가 뿜어져 나왔다.
나와 최 전무는 오늘이 두 번째 만남.
처음 그가 WG 엔터로 출근했을 때, 인사를 짧게 나눈 게 전부였다.
나이도 있고, 직책이 있으니.
모든 소속 연예인들에게 말을 놓는 건 그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것을 따지고들 생각은 없었다.
“대표님이랑 조금 전에 통화했는데, 나랑 이야기하면 된다고 하시네.”
“그럼 전무님도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까?”
내 물음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최 전무를 바라보며 미간을 움찔거렸다.
“턴테이블에 WG 엔터 연예인들 조연으로 넣은 거… 이거 최 전무님이 하신 겁니까?”
최 전무는 아랫입술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표정과 제스처.
“그런데?”
그의 태도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제가 주연으로 계약을 했고, 제 이름을 이용해서 배우들을 넣은 거라면 최소한 저한테는 말해 주셨어야죠. 대체 왜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하신 겁니까?”
“상의?”
그는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소속된 회사에서 그런 일을 하는데 무슨 상의까지… 그리고 이게 뭐 희성 배우한테 피해라도 갔나?”
“네, 그 배우들이….”
최 전무는 내 말을 자르며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높였다.
“희성 배우님은 배우의 역할. 우리는 엔터 회사의 역할. 딱 그뿐인 거지. 피해 갈 일이 뭐가 있지?”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불만을 토로했다.
“배우들을 무작위로 끼워 파는 게 아니라, 적어도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아 넣으셨어야죠. 이거 이대로 개봉하면, 분명 미스 캐스팅 이야기 나올 겁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요하는지, 그래서 어떤 색깔의 배우가 캐스팅되어야 하는지 정도는 회사에서 분석하고 넣으셨어야죠. 그게 회사의 역할 아닙니까?”
“그건 천 감독이 알아서 배역을 정하는 거고.”
“아니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모든 조연 배우를 밀어 넣는데….”
최 전무는 눈을 감고 손바닥을 내밀어 내 말을 잘라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오늘 대본 리딩 때 뭔가 난처한 일이 있었나 보네, 맞지?”
“난처한 수준이 아니죠.”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노가 더욱 끓어올랐다.
“이거 제 이름 가지고 장사하는 수준이잖습니까.”
“에이, 이름 가지고 장사라니, 말을 왜 그렇게 하나?”
“전무님, 제가 회사랑 7 대 3으로 수익을 나눕니다. 그건 제 일에 대해 수고하라고 3할을 떼어주는 거지, 이런 식으로 제 이름 팔고 다니라고 계약한 거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네 말대로 3할. 회사에서 할 일을 하라는 뜻이겠지?”
“네.”
“우리는 모든 배우한테 수고할 몇 할을 떼. 그러니까 그 배우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도, 네 이름을 이용해서 다른 소속 배우를 꽂는 것도. 다 엔터의 영역이란 말이야.”
“그건 엔터에서 알아서 띄워야지, 왜 제 이름을 걸고….”
최 전무는 내 말에 언성을 높였다.
“같은 회사에서 내 이름, 네 이름이 어디 있어. 회사에서 배우들 관리한다는데 네가 대체 왜…!”
최 전무와 나 사이에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불꽃이 튈 무렵.
“무슨 일인데, 바깥까지 들리게 소란스러워?”
문이 쾅 열리며 박 대표가 들어섰다.
“아, 대표님.”
최 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머리를 숙였고.
박 대표는 자신의 옆에 있는 김 실장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김 실장이 희성이 잠깐 데리고 가서 열 좀 식히고 대표실로 올라와. 그리고 최 전무는 지금 바로 나 따라오고.”
* * *
“어, 희성이 왔어?”
대표실에 들어서자 입술을 꾹 다문 채 앉은 최 전무와 나를 밝은 얼굴로 맞이하는 박 대표가 있었다.
“네.”
“얼른 앉아.”
그의 부름에 최 전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박 대표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다.
“아이고, 같은 회사에서 왜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여. 별일도 아닌데 말이야.”
그의 말에 시선을 떨구고 있던 최 전무가 내 쪽을 쓰윽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다. 괜히 말하다 보니까 언성이 높아졌네.”
급작스러운 사과와 함께 미소 지으며 내 팔을 자연스레 툭 건드렸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희성 배우 들어간 작품에 상의 없이 조연 배우들 넣은 것도 미안하고.”
나는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박 대표를 향해 물었다.
“대표님, 오늘 대본 리딩 오지 않은 배역 중에 WG 엔터 배우가 더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박 대표는 내 말에 양손을 뻗어 중재하듯 말을 돌렸다.
“뭐가 이렇게 급해. 최 전무가 사과도 하는데 말이야.”
“예, 그건 알겠는데, 제가 궁금한 건 턴테이블에 조연으로 들어오는 배우들은….”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소와 함께 웃음으로 무마하듯 입을 열었다.
“최 전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도 했고,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이번에는 넘어가고, 다음부터는 최 전무도 희성이 작품에 말없이 배우 넣지 말고. 알겠지?”
나는 그의 황당한 중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