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68화 (268/303)

268화 #49 – 미스 캐스팅 (1)

“천 감독님?”

최 전무는 전무실에 들어오는 천 감독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전화드렸던 최중현 전무라고 합니다.”

최 전무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고.

천 감독은 그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앉으시죠.”

“…네.”

최 전무의 전화로 성사된 둘의 만남.

장소는 어느 카페나 술집도 아닌, WG 엔터의 전무실이었다.

회사에 따로 전무실은 없었지만, 최 전무가 자신의 일을 소화하기 위해 박 대표에게 부탁했던 개인실.

작은 공간이었지만 최 전무는 항상 이곳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천 감독은 자리에 앉아 전무실을 빠르게 스캔했고.

그 모습을 본 최 전무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실 것 좀 드리겠습니다. 커피나 녹차 어떤 거로….”

“아, 괜찮습니다.”

천 감독이 손을 저으며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최 전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마실 거라도 제가 내와야죠. 제가 알아서 준비해 오겠습니다. 하하.”

최 전무는 사무실을 나서며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하나 올려두었고.

그가 전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천 감독은 서류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을 부른 이유는 분명 저 서류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터.

천 감독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전무실 문을 쓰윽 살폈고.

손을 서류 더미로 뻗었지만.

“…됐다, 곧 알게 될 텐데 뭐.”

이내 뻗었던 손을 거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천 감독은 최 전무가 자신을 부른 목적을 예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연료.

출연할 배우가 자신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회사에서 대신하려고 불렀을 터였다.

그러려면 ‘돈’ 말고, 민감한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아….”

천 감독의 입에서는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작품에 주연 배우를 이미 진희성으로 확정한 상태에서.

출연료를 다시 조정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더군다나 출연료가 인상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와서 투자 금액을 엄청나게 끌어올 수도 없었고.

다른 배우들의 출연료를 대폭 깎아, 모조리 진희성에게 몰아줄 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진희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천 감독은 잔뜩 늘어진 눈으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 전무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천 감독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의 앞에 커피가 두 잔 놓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전무님.”

“예, 뜨거우니까 조심히 드세요.”

천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들이켰고.

잠시 뒤.

최 전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저희 배우 때문에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의 말에 천 감독은 마시던 커피를 곧장 내려놓았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조심스레 답했다.

“진희성 배우가 출연하게 되는 건… 미팅에서 이야기가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최 전무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작품 출연에 대한 이야기는 감독님과 다 마친 상태죠.”

“그럼 어떤 일로….”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천 감독은 혀로 입술을 날름 훑었고.

최 전무는 눈썹을 들썩이며 능청스레 그에게 말했다.

“아, 이게 배우가 직접 감독님께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이해하시죠?”

올 것이 온 것만 같은 그의 물음에, 천 감독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아무래도 배우분들이 직접 하시기 힘든 말도 있기는 하시겠죠.”

“예, 그래서 제가 오늘 따로 뵙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배우가 왜 회사가 있겠습니까, 이런 어렵고 하기 힘든 말 대신 해달라고 있는 거잖습니까?”

최 전무는 여유롭게 웃으며 눈썹을 치켜세웠고.

어느새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갑’과 ‘을’이 정해진 것 같았다.

둘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천 감독이 쓰읍, 소리를 내며 그 고요함을 깨트렸다.

“그런데 전무님도 아시다시피 블랙 코미디의 제작비가 넉넉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제작비에 한계가 있어서 진희성 배우님 출연료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 전무는 입을 벌린 채 손을 휘이 저었다.

“아유, 그럼요. 충분히 이해하죠. 대신….”

“대신… 이라면 어떤….”

최 전무는 긴장한 듯한 천 감독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이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그에게 본론을 던졌다.

“아직 그 작품에 배역 빈자리가 많죠?”

* * *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박순희는 가방을 침대에 툭 던진 채, 머리를 높이 질끈 묶었다.

“순희야, 밥은 먹었어?”

문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녀는 문을 빼꼼 열고 소리쳤다.

“응, 친구들이랑 먹고 왔어. 엄마, 나 이제 뭐 좀 할게!”

“아휴, 지지배. 지 방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지?”

어머니의 핀잔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잘 아네. 엄마, 사랑해.”

“됐어. 얼른 할 일이나 해.”

“네, 어머니!”

박순희는 그제야 문을 꼭 닫고, 노트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요즘 바빠서 활동을 너무 못 했잖아. 우리 희성 오빠 기다리겠다.”

그녀는 서둘러 인터넷에 접속해 진희성을 검색했다.

박순희의 일과 중 하나인 진희성 검색.

사실 그녀가 진희성을 인터넷에 검색하는 건, 하루에 수십 번 있는 일이다.

물론 이런 일정은 진희성에게도 존재했다.

진희성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매일 쏟아졌고.

박순희는 집에 들어오면서도 보았던 기사들을 빠르게 스킵했다.

[송유나 SNS 핑크빛… 그녀의 연인인 진희성의 SNS는?]

“우리 오빠는 SNS로 연애 티 안 내거든요?”

그녀는 연애와 관련된 기사를 뾰로통한 표정으로 빠르게 넘겨버렸다.

“뭐 새로 올라온 소식은 없나?”

박순희는 뉴스 창에서 연신 새로 고침 버튼을 눌렀고.

그러다 화면이 전환되며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화제의 중심 ‘진희성’ 그가 선택한 차기작 ‘턴테이블’.]

[‘진희성’ WG 엔터와 재계약 후, 그가 선택한 차기작 ‘턴테이블’ 확정….]

[진희성, 한국 복귀작으로 그가 선택한 ‘턴테이블’은….]

[진희성, 영화 ‘턴테이블’ 출연 확정. 올해도 대세 행보가 이어지나….]

빠르게 올라오는 진희성의 차기작 기사.

기사를 확인한 박순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사 내용들을 살폈다.

-배우 진희성이 영화 ‘턴테이블’에 출연을 확정지었다.

영화 ‘턴테이블’은 천지호 감독의 연출로….

블랙 코미디 장르의 ‘턴테이블’의 주연을 맡은 배우가 진희성임이 확정되자, 영화계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박순희는 기사를 읽다 한곳에서 시선을 멈칫했다.

“뭐야, 블랙 코미디?”

진희성의 팬인 그녀도 주춤하게 만드는 장르였다.

“블랙 코미디면… 흥행하기 힘든 작품 아닌가?”

그녀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박순희의 손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기사를 캡처해 팬 카페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한국에서 유명해지고, 힘들게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았으면서. 왜 갑자기 복귀작으로 블랙 코미디를 하는 거지?”

그녀는 진희성이 이해되지 않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럼에도 진희성의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결정한 거니까 다 이유가 있겠죠?”

박순희는 찜찜한 마음을 삼켜낸 채 팬 카페에 게시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희성 오빠, 이제는 흥행보다 작품성을 선택하는 건가…. 뭔가 오빠가 낯설어졌어.”

타닥타닥-

방 안에는 그녀가 치는 타자 소리만 가득했고.

잠시 뒤 게시물을 올리자마자 빠르게 댓글이 달렸다.

팬 카페에 달리는 댓글들도 그녀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헐, 블랙 코미디?

-오빠, 왜 갑자기 블랙 코미디를 찍는 거예요ㅠㅠ

-나 블랙 코미디 좋아하는데! 드디어 우리 오빠가 이 장르를 수면 위로 번쩍 올려주려나.

-오빠… 송유나부터 영화까지. 갑자기 왜 이래요ㅠㅠ

-턴테이블? 제목 좋은데?

-저기에 송유나도 나오는 거 아님?ㅋㅋ

-송유나가 우리 오빠 다 버려놨어….

-희성 오빠 드디어 스크린에서 보는 거냐고요!

-아… 송유나랑 사귀더니, 작품 고르는 취향 뭔데ㅡㅡ.

-송유나 꼴 보기 싫어. 오빠 언제 헤어져요. 진짜 싫어, 송유나ㅡㅡ.

계속해서 올라오는 댓글을 박순희는 하나하나 살폈고.

게시물과 상관없는 댓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떤 글이든 자꾸 송유나 욕이 올라오네.”

어느 순간 자신과 멀어진 것만 같은 진희성.

그녀는 자신이 진희성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갑작스러운 열애설에, 뜬금없는 장르의 차기작까지.

최근 진희성에게 일어난 일을 보며 박순희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좋아한 건, 어차피 오빠랑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고작 연애한다고 내가 탈덕할 건 아니지.”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송유나를 애써 외면했다.

“뭐… 연애도 잘되기를 빌어주기는 하겠지만. 오빠가 행복해하는 거 보기 좋기야 해도…. 그래도 좀 마음이 그렇네.”

박순희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냈다.

그리고 팬 카페에 올라온 다른 게시물을 바라보며 눈이 부릅떠졌다.

송유나의 욕으로 가득 찬 게시 글들.

둘의 열애 소식 이후, 진희성의 팬 카페에 심심찮게 보이는 글들이었다.

그 글들을 매일같이 삭제하며 그녀는 다짐했다.

“제발… 좀 이러지 맙시다. 팬으로서 응원해야지. 이게 무슨…!”

박순희는 게시물 작성을 클릭해, 긴 장문의 공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열애설이 터지자마자 자신도 그들과 똑같이 들었던 마음이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갉아먹는 마음이라는 걸 어느새 깨닫고 있었다.

* * *

“대본 리딩하러 가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렇지, 희성아?”

김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뒷자리에 앉은 나와 눈을 맞췄다.

조금은 설렌 듯 묻는 그의 말에 나는 바라보던 대본을 덮었다.

“그러게. 형이랑 같이 대본 리딩하러 가는 거 오랜만이다.”

“맞아. 특히 한국에서는 언제 갔었는지 벌써 까마득하다니까? 하하.”

그는 내 무릎에 내려놓은 대본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연습은 좀 했어?”

김 실장의 물음에 나는 대본을 흔들어대며 웃음 지었다.

“응, 많이 했지.”

“오오, 하긴 우리 희성이가 연습 벌레긴 해?”

“그럼. 게다가 이번 작품은 특히나 느낌이 더 좋아.”

내 말에 그는 입을 모아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특히나 더 좋으면, 얼마나 흥행하려고 하는 거지?”

김 실장과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던 그때.

지이잉.

옆자리에 올려둔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나는 휴대 전화를 들어 김 실장에게 보이며 말했다.

“형, 나 잠깐 전화 좀.”

“응, 받아.”

그는 내 말에 흘러나오던 노랫소리를 줄였다.

“네, 선배님!”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해?

“그럼요.”

-뭐 하고 있어?

“저 지금 대본 리딩 가고 있습니다.”

-턴테이블?

“네, 알고 전화하신 겁니까?”

-그럼. 내가 너 대본 리딩 날짜까지 다 알고 전화했지, 인마.

“하하, 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당연하지. 컨디션은 좀 어때?

“뭐… 늘 똑같습니다. 선배님은 어디십니까?”

-나도 스케줄하고 있어. 잠깐 쉬는 시간이라 전화했지.

최서빈은 내게 응원차 전화를 건 듯 보였고.

그런 그에게 감사함을 표하려던 찰나.

-희성아.

“네, 선배님.”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텐데, 역시 대단하다.

“아… 아닙니다.”

-할리우드 다녀와서 온 관심이 집중된 순간에 차기작 고르는 거 어렵거든. 다들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으니까 말이야.

“맞죠.”

-그 정상급 위치에 있으면, 무슨 드라마든 영화든 어마어마한 페이에 흥행 보증 수표까지 쥐고 있는 건데. 그런 유혹을 다 뿌리치고, 저예산 블랙 코미디를 택한 거? 진짜 대단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

“네, 선배님 덕분에 제 스스로에게 용기가 생겼거든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용기….”

-그게 왜 내 덕분이야. 네가 대단한 용기를 가졌던 놈인 거지. 진짜로 리스펙한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술 한잔하자.

“좋죠.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오늘 잘하고 오고. 다시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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