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48 – 내가 선택한 것 (4)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기는 사람.
내가 선택한 이번 작품인 블랙 코미디를 맡은 천지호 감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그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접었고.
그는 내 인사에 함께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천지호 감독이라고 합니다.”
내 앞으로 뻗은 그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답했다.
“배우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눈을 바라보았고.
그의 선한 인상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170초중반쯤 되는 키에 푸근한 몸.
늘 고된 작업으로 정돈되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
검은 항공 점퍼를 입은 천 감독의 인상은 꽤 포근했다.
살집이 있는 얼굴에 빙그레 지어지는 눈웃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스한 미소를 자아냈다.
그런 천 감독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감독님, 인상이 너무 좋으십니다.”
내 말에 그는 두툼한 손을 허공에 휘이 저으며 답했다.
“아이고, 제 인상이 좋기는요. 희성 씨 인상을 보고도 어떻게 제 인상 이야기가 나옵니까.”
그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고,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닙니다. 정말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제가 해야죠.”
그는 앞에 놓인 의자를 밖으로 빼내며 내게 말했다.
“우선 앉으시죠.”
“네.”
나는 미팅 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이곳에는 나와 천 감독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어색함을 깨기 위한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제가 희성 배우님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너무 영광입니다.”
“제가 영광이죠.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게 돼서요.”
내 말에 그는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요. 제가 오늘 열심히 희성 씨를 설득해 봐야죠? 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료를 내게 내밀었다.
미팅을 하러 왔지만, 아직 이 작품을 함께하기로 확정을 지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미팅이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내가 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감독 역시 나와 함께하는 것을 원해 미팅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주연 배우가 나로 결정되느냐.
내가 이 작품을 하지 않느냐가 결정되겠지.
김 실장도, WG 엔터에서도, 현재 아쉽거나 매달려야 하는 건.
내가 아닌 천 감독 측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품을 선택할 때.
그 어느 하나 누가 절절매야 하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우가 작품을 필요로 하고.
작품을 총괄하는 감독이 그 배우를 필요로 해야만 작품이 완성된다고 늘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이야기와, 천 감독이 그려낸 작품의 이야기가 일맥상통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출연하는 걸, 단 1초도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천 감독은 내게 대본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혹시 대본은 다 보셨을까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요. 대본을 보고 결정한 거니까요.”
“우선, 이 작품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 감독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물었다.
“저는 희성 씨가 이 작품을 함께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블랙 코미디는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선택해주신 특별한 이유라도….”
나는 그의 질문에 앞에 놓인 서류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미리 챙겨온 종이 더미를 가방에서 꺼냈고.
테이블 위에 올리며 천 감독을 향해 내밀었다.
“제가 생각한 작품의 의도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겁니다.”
내가 내민 종이의 양을 보자마자 천 감독은 입을 떡 벌렸다.
항상 작품을 시작하기 전, 이러한 작업을 하고는 한다.
누가 시켜서는 아니었다.
내가 어떠한 배역을 하나 맡게 되어 연기하려면, 최소한 그 배역의 인생을 훑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충 그 배역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적어도 그 배역의 삶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물론 나는 1만 년의 삶을 살면서 경험해 보지 않은 삶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직업과 경험은 있을지언정 같은 인생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배역에 대해 수없이 노력하며 공부하는 이유였다.
나는 종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작품의 이야기가, 천 감독님께서 세상에 말씀하고 싶은 이야기와 맞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다르다면 어떠한 부분이 다른지도 확인하고 싶고요.”
내 말에 그는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해오지 않으셔도, 저는 희성 씨와 함께 일하고 싶었는데. 제 작품을 이렇게 공부해 주셨다니, 감동인데요?”
“제가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작품이 좋아서였으니까요. 감독님도 블랙 코미디로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펼쳐줄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으실 테고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떨궈 내가 내민 종이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 감독은 입술을 내민 채 집중한 얼굴로 종이를 넘겼고.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내게 말했다.
“희성 씨.”
“네, 감독님.”
그러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희성 씨와 꼭 함께, 이 이야기를 펼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져왔다.
나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작품의 이야기.
그리고 내가 펼치고 싶은 이야기를 함께할 작품과 감독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천 감독은 쓰읍,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내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그게 걱정입니다.”
블랙 코미디라는 게 워낙 대중적이지 않았고.
즉,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소재였다.
그렇다 보니 투자 금액이 높지 않아 예산이 적을 수밖에 없었지.
그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저도 바라는 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출연료를 많이 받자고 이 작품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요.”
천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결의를 다진 채 눈을 반짝였다.
“출연료는 적어도 괜찮습니다.”
회사의 만류에도 내가 선택한 이 작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마음먹은 뒤 고른 작품이었기에.
너무나 잘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 * *
며칠 뒤.
회사를 통해 천 감독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1만 년의 기억이 열흘 동안 미친 듯이 들어온 후, 그 어떤 꿈도 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작품이 결정되고 나면, 혹시나 꿈을 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항상 작품의 대본을 보거나, 작품이 결정되고 나면 그와 관련된 과거가 꿈에 나타났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했지만.
역시나 며칠의 잠자리에도 꿈속에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지.
아마 1만 년의 모든 기억이 다 들어온 덕분이겠지.
사실, 꿈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긴 시간의 기억들이 너무나도 선명하니까.
블랙 코미디, 이번 작품에서의 내 역할에 대한 캐릭터도 이미 내 과거에 있으니까.
물론 같은 삶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이 보여주는 그림과 겹치는 내 과거는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인종 차별에 대해 목청을 높이던 과거.
그 시절을 풍자하며 스탠딩 코미디를 펼치던 과거의 내 모습 등.
시대를 풍자하며 깨우침을 주던 과거는 손으로만 세어도 몇 개의 인생 속에 존재했다.
“아악….”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잠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과거의 기억이 온전히 있지만.
그 수많은 기억 중 하나라도 꺼낼라치면, 두통을 동반했다.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다만, 이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찾은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송유나’였다.
송유나와 입맞춤을 하며 처음 느꼈던 평온함.
그 이후, 나는 송유나와 스킨십을 하거나.
아니,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이 씻긴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송유나를 떠올리자, 지끈거리는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참 묘하다, 묘해.”
송유나 때문에 이 1만 년의 고통을 다시 한번 받기로 결심했는데, 그녀 덕에 이 고통이 사라지다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송유나가 내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 * *
똑똑.
“네, 들어와요.”
박 대표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답했고.
이내 닫혔던 문이 열리며 최 전무가 들어섰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박 대표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 어때, 본사 출근은 잘 적응되고 있어?”
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발길을 옮겼고.
그의 착석과 함께 최 전무도 자리를 잡았다.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최 전무 일 잘하는 건 WG 엔터에서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과찬이십니다.”
박 대표는 등을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진희성 블랙 코미디 작품 들어가기로 된 거 알고 있지?”
“예, 확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응, 어떻게 되어가?”
최 전무가 한국으로 돌아와 참여했던 첫 회의.
진희성이 블랙 코미디 작품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작품을 무조건 성공시키겠다는 포부를 박 대표에게 밝힌 바 있기에.
그 계획에 대해 묻는 모양이었다.
그의 물음에 최 전무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작업 들어가야죠.”
“그래서, 계획이 뭔데?”
최 전무의 찢어진 입꼬리에 박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최 전무에게로 향했다.
“절 믿고 한번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진희성을 작품에서 빼는 게 아니라, 작품을 성공시키겠다는 거지?”
“네, 계약 조항상 진희성이 작품을 하지 않는 건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의 말에 박 대표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성공시켜야죠.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서… 우선 시도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대표는 그런 최 전무의 계획에 궁금증을 느꼈지만.
늘 어떻게든 성공시켜 오는 최 전무였기에,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전적으로 그를 믿었다.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직원이었으니까.
“그래, 확실한 방법이 생기면 보고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
“네, 감사합니다.”
최 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결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박 대표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쁠 텐데 나가서 일 봐.”
“네, 대표님.”
최 전무는 대표실을 나서자마자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국 본사로 오자마자 처음 맡은 건인데, 확실하게 성공시켜야지.”
그는 서둘러 전무실로 향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 전화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신호는 얼마 울리지 않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
“천지호 감독님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어디실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WG 엔터에 최중현 전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주셨을까요?
“이번에 천 감독님 작품에 저희 배우가 들어가잖습니까?”
-네, 그렇죠.
“그래도 우리 회사의 얼굴인 진희성 배우가 들어가는데. 그냥 이렇게 넘어가도 되나 싶어서요.”
최 전무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천 감독이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혹시 출연료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휴, 아니요. 출연료 말고도 할 수 있는 건 많죠.”
-그럼….
“천 감독님,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저희 얼굴 한번 뵐까요?”
최 전무는 몸을 기대어 앉은 채,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고.
그의 한쪽 입꼬리가 음흉하게 찢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