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48 – 내가 선택한 것 (3)
한국에서 오랜만에 선보이려는 작품은 블랙 코미디 장르였다.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너무 어둡지만은 않게.
통렬하고 경쾌하게 대중들 앞에 보여주는 것이지.
보통 블랙 코미디의 대표적인 주제는 정치에 관한 풍자가 많은 편이지만.
내가 고른 이 작품에 정치색은 전혀 없었다.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아, 재계약하면서 네가 하자는 작품. 원하는 방송으로 하기로 내용은 다 적기는 했지만… 이 작품 정말 괜찮겠어?”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무슨 말이야?”
김 실장은 대본을 툭툭 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게 블랙 코미디잖아. 사실 이런 장르가 흥행 가능성이 너무 떨어지는 게 이 바닥 현실이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코미디.
풍자가 섞인 이 장르는 확실하게 호불호가 존재한다.
즉, 흥행 가능성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지.
나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내게 이제 흥행 여부는 작품을 고를 때 크게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지 않았다.
내가 흥행에 목숨을 걸었다면, 작품이 끌리느냐가 아닌 무조건 상업적으로 성공할 작품만을 골랐을 테니까.
“알지. 근데 나 이거 하고 싶어.”
김 실장은 나와 함께 해온 기간이 있기에 내 뜻을 꺾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응, 네가 하자고 하는 거니까, 이 작품을 하기는 할 거야. 다만, 왜 갑자기 이런 작품을 골랐는지 궁금해서.”
“그냥… 이유는 없어. 하고 싶어서. 그게 다야.”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심플하네.”
“어,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 나 이 작품 해도 되는 거지?”
이 작품이 하고 싶은 이유는 정말 없었다.
흥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자, 비주류의 작품을 애써 고르려고 한 것도 아니었지.
철학, 필모 등.
이 작품을 통해 내가 원하는 어떤 이미지를 얻겠다, 이와 같은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른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다.
그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 단지 그뿐이었다.
김 실장은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 뜻을 누가 막겠어. 이제 계약서 조항에도 있는데 말이야.”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말했다.
“맞다, 이번에 전무님 새로 오시는 거 들었나?”
“응, 며칠 전에 계약서 도장 찍으러 왔을 때 들었어.”
“이제 곧 한국으로 오신다더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다른 나라에 계시던 분이야?”
“응, 일본 지부에서 근무하셨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입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윗선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럼에도 윗선에 어떠한 인물들이 있는지, 누가 새로 오고 바뀌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으니까.
회사에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일들은 매니저를 통해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일본까지 가서 계셨으면, 일 잘하시는 분인가 보네.”
순간 김 실장이 몸을 내게로 바짝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 방 한 칸이었지만, 김 실장은 괜스레 주변을 쓰윽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잘되기는 했는데… 뭐 대박까지는 아니고. 회사에서 기대한 것보다 살짝 아쉬운 정도였나 봐.”
“그래?”
“응, 그래도 능력은 있는 사람인 것 확실하고.”
전반적인 이야기를 파악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고.
김 실장은 허공을 바라보고 기억을 되짚으며 읊조렸다.
“이름이 뭐라더라, 최중… 그래, 최중현 전무님!”
그는 내가 새로 올 전무가 아닌, 대본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시선을 대본으로 옮겨왔다.
“다음에 오시면 인사드리러 가야겠네. 그럼 나 다시 대본 연습할게.”
* * *
몇 달을 쉬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하는 연기 연습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홀로 연습실에 갇혀 앉은 자리 그대로 몇 시간 연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지친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실제로도 연습으로 인해 지쳤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연기 연습을 하며 힘이 나는 것만 같은 느낌.
연습실 문이 열리며 김 실장은 손에 커피를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희성아, 좀 쉬었다가 하지.”
“아니야. 힘들지도 않는데, 뭐.”
그는 내게 커피를 내밀며 혀를 내둘렀다.
“오랜만에 연습하더니 얼굴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나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답했다.
“그런가?”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김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투로 내게 말했다.
“연기가 아니라, 연애하니까 얼굴이 핀 건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내듯 콜록거렸고.
그는 당황한 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휴지를 건넸다.
“놀라긴. 희성이 너 연애하는 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왜 이렇게 당황해?”
나는 휴지로 입가를 쓰윽 닦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세상이 다 아는 공개 연애 중인데도, 형이랑 말하면 괜히 쑥스럽네.”
김 실장이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고.
나는 머쓱한 얼굴로 읊조렸다.
“가족한테 연애 걸린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러자 김 실장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는 곧장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공개 연애하니까 어때?”
송유나와의 연애.
이 이야기에 대해 김 실장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에게 열애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전하지 않았고.
김 실장은 내가 연애를 들키게 됐던, 큐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시청자와 함께 알게 되었다.
물론 그는 그런 사실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거나,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응원하고 지지할 뿐.
“크게 바뀐 건 없는 거 같아. 단지 행동을 조금 더 조심하게 됐달까….”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공개 연애다 보니까, 희성이 네가 연애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왜 자꾸 기쁜지 모르겠어.”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형은 맨날 나한테 연애하라고 닦달했잖아.”
“에이, 닦달까지는 아니다.”
김 실장은 자신이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면서 그 행복감을 내게도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 날부터 내게 연애를 권유하듯 말했었다.
“아니긴, 나 할리우드 진출하기 전부터 계속 말했잖아.”
내 말에 김 실장은 얼굴에 미소를 지워내며 내게 답했다.
“그때는 네가 너무 바쁘고 힘들어 보여서 그랬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들고 바쁜데, 거기에 연애까지 하라고 했다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희성이 네가 숨 쉴 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항상 일, 집, 일, 집만 하면서 지냈으니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아무 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에만 몰두했잖아. 그래서 나는 네가 연애로 숨 쉴 공간 하나라도 만들었으면 했지.”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그의 말투와 눈빛.
그런 김 실장의 말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단순히 자신이 행복해서 내게 권유했음이 아니라.
내가 힘들어 보였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는 그였으니까.
늘 그랬다.
김 실장은 나를 담당 연예인, 그 이상으로 나를 대해주었다.
담당 연예인이 열애설 터지면, 아무래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오히려 연애하지 못하도록 케어를 하기 바쁜 편이다.
더불어 내가 연예계 생활을 하며,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할 때도.
김 실장은 늘 나를 이해해 주고 내 편에 서서 회사의 쓴소리도 다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새삼스레 그에 대한 마음을 다시금 깨달았고.
괜스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김 실장에게 답했다.
“형이 내 연애를 그렇게 원했잖아. 그래서 내가 열애설 터트린 거야. 하하.”
내 말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 부탁 들어줘서 아주 고맙다. 물론 내가 말한 건, 그냥 연애지. 공개 연애를 하라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고.
김 실장은 휴대 전화를 내게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유나 씨는 일부러 SNS에 이렇게 올리는 거래?”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뭔데?”
김 실장이 보여주는 화면을 보기 위해 그의 휴대 전화를 내 손으로 가져왔고.
송유나의 SNS에는 매일 게시물이 새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씩 게시물을 살펴보던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내 표정을 본 김 실장이 곧장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게시물 올라왔더라.”
그가 말한 게시물.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
그 사진과 함께 작성된 한 줄의 글.
-하트 구름♡♥.
송유나가 쓴 글을 보고 다시 사진을 보았다.
얼핏 보면 하트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하트 모양임을 떠올리며 보아야 그럴싸하게 보일 정도였다.
김 실장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유나 씨,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더라.”
그의 말을 들으며, 댓글 창을 확인하자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ㅋㅋ언니, 럽스타그램이냐구요.
-저게 하트 모양 구름이라니, 애를 쓰고 보고 또 봐야 겨우 하트 모양인걸요ㅋㅋ
-귀엽ㅋㅋ 세상이 핑크빛인 울 언니.
-이 언니 큐튜브 안 나왔어도 SNS 때문에 연애 걸렸겠는데?ㅋㅋ
-하트… 모양 구름이요? 제 눈에는 그냥 구름이잖아요ㅋㅋ
-아ㅋㅋ 송유나 원래 이런 귀여운 캐릭터였냐고!
-뭐야, 여기 인스타 왜 이렇게 달달한 냄새가 나요?ㅋㅋ
-언니, 그동안 럽스타 어떻게 참았어….
댓글들은 열애설이 터진 후, 변화된 송유나의 SNS를 보며 훈훈하다는 반응이었다.
이 외에도 송유나는 나와 함께 먹었던 식사 자리의 사진.
나와 함께 떠났던 여행지의 사진.
나와 만났던 날들의 사진을 매일 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사진들에서 내 흔적은 없었다.
내 손이 나오지도, 함께 찍은 사진도 없었지.
다만, 식사 자리에서 수저가 두 개인 것.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의자가 두 개인 것은 누가 보아도 ‘남자 친구’와 함께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송유나의 SNS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 완전 티 내고 있었네.”
내 말에 김 실장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전까지 유나 씨 SNS에는 그냥 촬영장 사진만 올라오고, 업로드 자체도 잘 안 했더라고. 그래서 더 팬들 사이에서 난리더라.”
“기사도 났겠는데?”
“응, 근데 유나 씨가 너무 드러내니까, 오히려 귀엽다는 반응이야.”
나는 김 실장에게 휴대 전화를 돌려주며 작게 읊조렸다.
“그동안 연애… 안 하고 어떻게 참았대.”
눈앞에 떠오르는 송유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 * *
“그 광고 건은 그렇게 마무리하는 거로 하고. 다음은….”
WG 엔터 대표실에 자리한 박 대표와 한 본부장.
박 대표의 말에 한 본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네, 다음은 저번에 말씀드렸던 진희성 다음 작품입니다.”
“응, 진희성은 그대로 블랙 코미디, 그 작품을 하겠대?”
그의 말에 한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 작품을 꼭 하겠다고 해서요. 이번에 재계약하면서 새로 넣은 조항 때문에 막을 수도 없고요.”
처음으로 회의에 참여한 최중현 전무가 그를 향해 물었다.
“새로 넣은 조항?”
“예, 대표님도 알고 계시는 조항입니다. 진희성이 자신이 원하는 작품, 하고 싶은 건 하게 해달라는….”
최 전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회사에서 안 된다는데 그 작품을 한다고?”
그의 말에 등을 기대고 있던 박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희성이는 그냥 놔둬. 걔 계약 잡아두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아… 그래서 계약 조항을 그렇게 넣어주신 겁니까?”
“응, 회사에서도 존중해 주기는 해야지. 워낙 쉬지도 않고 일하기도 했고, 미국 가서 고생하다가 왔으니까. 이번에는 자기 하고 싶은 작품 하게 놔두자고.”
박 대표의 말에 한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는 진희성이 블랙 코미디 작품을 고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작품이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크게 망하지만 않으면, 무난하게 괜찮을 거야.”
그의 말에 최 전무는 진희성이 출연할 블랙 코미디 작품을 훑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블랙 코미디. 우리가 흥행하게 만들면 되잖습니까?”
최 전무의 말에 한 본부장이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자 최 전무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읊조렸다.
“진희성급 배우가 가는데, 우리 회사에서 힘 좀 쓰면 될 것 같은데?”
최 전무는 확신에 찬 얼굴로 박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제가 성공시켜 보겠습니다. 저한테 맡겨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