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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63화 (263/303)

263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6)

“하암….”

기지개를 켜며 맞이한 아침.

여느 때보다 상쾌하게 깨어난 느낌이었다.

머리도 욱신거리는 느낌 하나 없었고.

꿈은커녕, 잠들고 난 후 단 1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팔을 쭉 뻗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고.

굳게 닫힌 커튼을 조금 젖히고 밝은 햇살이 드리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차들.

그 주변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반짝이는 한강.

잠시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집, 뷰 진짜 좋다.”

송유나의 집은 뷰 하나만큼은 어느 전망대와 견주어도 될 정도였다.

잠시 감탄이 쏟아지는 뷰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고.

혹시나 그녀가 깰까 싶은 마음에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살금살금 걸어가며 그녀의 인기척을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송유나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살짝 열린 침실 문을 살며시 닫았다.

송유나와 함께 맞이한 밤.

사실 그녀의 집에서 보낸 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저번에 송유나의 집에 왔을 때.

파파라치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숨겨야만 했고.

그래서 그녀의 집에서 밤을 지새우고 나갔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그녀와 내 관계는 ‘동료’ 그 이상이라는 것.

어쩌면 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날 밤이었지만.

그렇다고 지난밤, 손을 잡고 영화를 함께 보았음에도 특별한 건 없었다.

송유나는 그녀의 침실의 침대에서.

나는 널따란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으니까.

그녀와 나 사이는, 아니 적어도 내가 느끼는 송유나와 나의 사이는 결코 짧고 쉽게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1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송유나, 그녀뿐이었지.

그래서 내게 그녀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 있다고.

그런데 나만큼 절실하게 무언가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러움을 반복하는 이 삶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윤회를 택했다.

즉, 송유나와 함께하기 위해 무려 1만 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내게는 그녀와의 만남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송유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녀와 눈을 맞추는 것.

사소한 모든 것이 간절했고, 값진 일이었다.

그러니 급할 필요 없이 하나하나씩 천천히 가까워지고 싶었다.

내게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말이다.

“남의 집 주방이라 건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네….”

막상 주방에 섰지만, 혹시나 그녀가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좀 해주고 싶은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재료를 스캔했다.

최대한 그녀의 주방 재료들을 뒤적이지 않는 선에서 할 만한 요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자 어제저녁, 그녀가 빵을 가져왔던 팬트리가 보였고.

그곳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몇 가지를 꺼내왔다.

탁-

달걀을 볼에 깬 뒤, 휘휘 저어 풀었고.

그 안에 우유를 머금은 식빵을 담갔다.

치익-

불판에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식빵을 올리며, 그렇게 그녀를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몇십 분 뒤.

나름 플레이팅까지 신경 써서 만든 작은 조식이 마련됐고.

송유나를 깨우러 가기 위해 발길을 움직이던 그때.

“…뭐야?”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식탁을 바라보았고.

나는 앞에 먼저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얼른 앉아.”

“이걸 직접 다 차린 거야?”

놀란 듯 커다란 눈망울로 묻는 그녀를 향해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아, 팬트리에 있는 달걀이랑 빵 좀 썼어.”

“응, 써도 돼.”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세우며, 내가 쓴 재료를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터랑 과일도 좀 썼고, 샐러드랑….”

장난스레 말하는 내 답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거 차리느라 집안 살림을 거덜 냈다, 뭐 이런 말이지?”

나는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맛있게 먹어.”

“예쁘게 플레이팅까지 했는데, 맛도 있을지 내가 먹어볼게.”

그녀는 입꼬리를 올린 채 프렌치토스트를 나이프로 잘게 잘라 한 입 담았고.

미소가 새어 나오는 입가를 손으로 툭툭 건들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응?”

“은퇴하고 싶다고 했잖아.”

갑작스레 묻는 그녀의 은퇴 이야기.

아직 그 결정을 보류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송유나의 시선은 내가 아닌, 커피에 고정되어 있었고.

“은퇴해도… 뭐 상관없다고.”

“그게 무슨….”

은퇴하겠다는 나를 한참 동안 설득하던 그녀였는데.

갑자기 은퇴를 해도 된다는 말에 나는 의아함을 표출했다.

그러자 그녀는 민망한지 자신의 목을 긁적이며 읊조렸다.

“오빠 하나 은퇴해도, 내가 충분히 먹여 살릴 수는 있으니까.”

송유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말과 태도에 연신 미소가 새어 나왔다.

정말 그녀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런 말을 내게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내 입가에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배시시 웃고는 그녀의 팔을 톡 건들며 말했다.

“오늘, 내일 스케줄 있어?”

그녀는 토스트를 가득 넣은 입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럼 우리 여행 가자.”

* * *

“와아, 진짜 신난다!”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 차 안.

빵빵하게 흘러나오는 음악과 열린 창문으로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

송유나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몸을 움직였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 또한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즉흥 여행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

발길이 닿는 대로, 당장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다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단 하나, 인적이 드문 곳이 필요했다.

서울 도심에서 데이트를 하려면, 아니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려면.

우리에게 마스크와 모자, 얼굴을 감싸는 옷이나 목도리는 필수였다.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송유나와 나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

해외 혹은 인적이 드문 시골이었다.

“강원도 완전 산골로 들어가면 사람 없겠지?”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게다가 펜션에서만 있을 건데, 사람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하긴, 우리가 인적이 드문 펜션으로 잡기는 했지.”

우리는 그렇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여행길을 떠나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강원도의 한 펜션.

예상대로 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 홀로 내려 펜션 체크인을 했고.

다행히도 펜션의 주인은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였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쓴 선글라스와 마스크 덕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유나야, 들어와도 돼.”

나는 차에 숨다시피 앉아 있는 그녀에게 손짓했고.

우리는 도심과 많이 동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 펜션에 들어갔다.

“우와….”

그녀는 펜션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리며 안을 살폈다.

“독채라길래 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아까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좋다.”

송유나는 마치 이런 풀 빌라 펜션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사진을 찍으며 아이처럼 좋아했고.

그 모습을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눈에 가득 담았다.

“휴식기 때, 시골로 여행 오는 거 좋아하잖아. 이쪽으로는 안 와 봤어?”

내 물음에 송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아무리 시골로 들어와서 즐기는 걸 좋아해도 혼자 머무는 거니까, 이렇게 깊숙이는 안 들어왔지.”

“하긴, 여기 혼자 와서 쉬기에 심심하기는 하겠다. 혼자 있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바비큐 장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이따가 저거 하자. 나 불멍도 하고 싶어!”

“그러자. 좀 놀다가 장 보러 가자. 고기랑 이것저것 사 와서 먹고 놀자.”

“그래!”

송유나는 잔뜩 설렌 얼굴로 펜션을 살폈고, 그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평소 그녀는 이런 소소한 것들을 즐기고 살지 못했구나, 하는걸.

어쩌다 보니, 예전부터 그녀의 취미를 알고 있었다.

김 실장을 통해 들었던 그녀의 휴식 기간 취미.

등산이나 시골 마을의 작은 펜션을 잡아 홀로 여행하는 것.

어린 나이부터 연기 생활을 시작한 그녀였기에.

다른 이들과 달리, 특별한 경험은 많이 해봤지만.

일반인들이 즐기는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은 누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 또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얼굴이 알려졌어도.

나야 1만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많은 경험을 누구보다 수없이 했기에 그런 아쉬움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송유나는 이런 일상이 특별하고 신기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신 신이 난 얼굴로 펜션을 즐겼고.

얼굴을 가릴 그 어떤 것도 착용하지 않은 채 편안히 이곳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밝게 비추던 햇살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우리는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게. 슬슬 배도 고프다.”

나는 소파에 있는 겉옷을 챙기며 말했다.

“나가서 장 좀 보고 올게. 여기서 쉬고 있어.”

“아니야, 나도 갈래!”

“나 혼자 다녀와도 돼. 사람들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차에 있으면 되잖아. 나도 갈래!”

그녀는 모든 것들이 마냥 신이 나는지 헤실거리며 나를 따라나섰다.

외진 산골에 있었기에, 우리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몇십 분을 달려 도착한 작은 시내.

우리는 작은 마트 주차장에 주차한 뒤.

섣불리 내리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우리를 알아볼 사람들이 있나 재빠르게 확인을 하는 것이지.

어둑해진 시골 마을은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고.

그 광경에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로 오길 잘했네.”

“그러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 혼자 들어가서 장 보고 나올게.”

내 말에 그녀는 아쉽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 나도 가고 싶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송유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리 그녀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사람들을 마주칠 줄 모르고.

나야 괜찮지만, 여배우인 그녀에게 스캔들은 ‘득’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여기 있어. 빨리 장 봐서 나올게.”

“…응.”

그런 송유나를 차에 두고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남겨진 그녀를 위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서둘러 장을 보기 시작했고.

미리 사야 할 것들을 적어뒀던 터라, 장을 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뒤.

상자 가득 담긴 짐을 들고 차로 향했고.

트렁크에 짐을 넣자마자 재빨리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어?”

그런데 조수석이 비어 있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송유나의 빈자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급히 차 밖으로 나왔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를 찾아 걸어 다니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 발길은 얼마 움직이지 않아 멈춰 설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분명 송유나였다.

“그냥 차에 있으라니까, 답답해서 그새 나갔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전화를 걸던 것을 끊은 채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가자 보이는 또 다른 사람들.

송유나의 주변을 감싼 남성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송유나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앞뒤로 막아서고 있었고.

내 시야에 가려진 모퉁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내가 보이지 않는 쪽을 바라보며 불안함을 느끼는 듯 보였다.

“…젠장, 혼자 나왔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다고 해도 소용은 없었고.

나는 천천히 걷던 걸음을 빠르게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송유나는 입은 꾹 닫고 있었지만,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내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마치 도망가라는 듯한 느낌이랄까.

확실했다.

눈동자를 차량 쪽으로 계속 움직였으니까.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상황에 나 혼자 도망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그리고 내겐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량배들에게 잡혀 있는 송유나밖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송유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들이…!”

그러고는 양팔을 걷어붙이며 그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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