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5)
[배우 ‘진희성’ 활동 중지, 당분간은 휴식에 집중….]
[할리우드를 흔든 ‘진희성’. 한국 오자마자 활동이 아닌, 휴식 선택… 그 이유는….]
[WG 엔터 – 진희성, 계약 연장하나? 재계약에 이목 집중.]
[진희성, WG 엔터와 재계약X… 그래도 아직은 몰라.]
[진희성, WG 엔터와 전속 계약 만료 코앞. 그의 행보는?]
은퇴에 대한 생각을 보류로 남겨두기로 하자, 곧바로 나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작품으로 연기를 할 거라 생각한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휴식을 택했다.
그리고 많은 엔터와 기자들은 내 휴식보다 ‘재계약’에 관심을 가졌다.
WG 엔터와 얼마 남지 않은 계약 날짜.
그곳에서 재계약을 할 것인지, 혹은 다른 엔터로 갈아탈 것인지 말이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단역에서 조연, 주연으로 올라섰고.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해,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배우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그런 나를 인정해 수많은 광고 모델로 섭외했지.
내 몸값이 오르고 돈을 벌고 있다는 건.
당연히 내가 소속한 WG 엔터에서도 나로 인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WG 엔터에는 짱짱한 배우들이 많기에, 내가 이 회사의 기둥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못 하겠지만.
단기간 내에 벌어들인 돈을 생각하면, 그래도 WG 엔터의 연습실 몇 칸은 만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회사와 어떤 조건으로 계약하느냐.
자신의 몸값을 어떻게 올리고, 얼마나 올리느냐가 배우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회사에서는 내 값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계약금을 측정하고.
돈을 많이 들인 연예인일수록 업계에 나를 띄워주려 노력할 터.
자신들이 소속 연예인에게 계약금으로 투자한 만큼.
당연히 그 연예인이 수입을 가져와야 자신들이 돈을 벌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속사에서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 방송사에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름 업계에 이름을 올리고는 있기에.
내 계약 만료가 가까워진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휴대 전화는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휴대 전화를 정지하고,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새로 개통했지만.
다들 어떻게 알아냈는지,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보은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더블제이 엔터입니다. 이렇게 연락을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진희성 씨, 맞으시죠? 저는 엔터 팀장….
하루에도 몇 통씩 오는 전화.
그 전화들을 겨우 거절하며 끊었지만.
문자와 메일까지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연락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 번호는 모르지만, 함께 작품에서 만났던 배우들.
그들이 SNS를 통해 내게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희성 씨, 잘 지내요? 우리 작년에 작품에서 만나고,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더라고. 오랜만에 밥이나 한 끼 어때요?
-희성아, 잘 살고 있어? 너 계약 만료되어 간다며. 그러지 말고 형이랑 밥이나 한 끼 하면서 이야기 좀 하자.
-안녕하세요, 희성 씨 작품 잘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락을 드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희성 씨와 자리를 한 번 가지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어요. 괜찮으시다면, 얼굴 뵙고….
나와 작은 인연이 있었던 연예인들부터, 전혀 일면식이 없는 연예인들까지.
그들은 전부 내게 식사를 빌미로 한 번 만나고 싶어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회사 식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회사에서 나와 연결 좀 해달라 부탁한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기에 굳이 내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 리가 없었으니까.
수없이 오는 전화와 메시지들을 시종일관 무시했다.
내용이나 이유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 몸값을 흥정하며, 소속사를 옮기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리고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 일이 아닌 휴식을 택했던 것이다.
이 휴식 기간에 다른 엔터들을 만나며 배우로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WG 엔터를 나오고 싶은 마음에 계약을 보류한 건 더더욱 아니니까.
그때.
지이잉.
다시 울리는 휴대 전화.
온종일 울려댄 진동 소리에 질려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럼에도 화면을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뭐 해요. 우리 밥 먹을래요?
이번 역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대상은 하루 내내 시달리던 계약을 빙자한 식사와는 전혀 다른 문자였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왜 놀라요?”
다름 아닌, 송유나.
그녀는 자신이 문자를 보내자마자 10초도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자 놀란 듯 보였고.
내 말에 송유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답했다.
-…안 놀랐는데요?
“에이, 받자마자 말부터 더듬던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전화를 거니까 그렇죠.
“유나 씨가 문자 보냈으면서.”
-그건….
“우리 밥이나 먹죠.”
-어디서요?
송유나와 함께 식사 장소를 정하는 건, 일반 커플들이 식당을 정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둘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곧바로 스캔들이 터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단순하게 만날 장소를 고른다면, 가장 쉽고 확실한 곳이 하나 있었다.
“제가 유나 씨 집으로 갈까요?”
-그래요, 집으로 와요.
* * *
송유나의 집으로 향하는 아파트 입구.
겉보기에는 기자로 보일 법한 그 어떤 인물도 없는 것 같았지만.
늘 연예인들이 서로의 집을 드나드는 사진이 찍혀 스캔들이 터지고는 한다.
그럼에도 데이트 장소로 집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
‘집’, 이곳은 그 어떤 외부인도 드나들지 않은 고유의 공간.
연예인들이 데이트하기에 집만큼 안전한 공간은 없었다.
밀폐되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 연예인들의 스캔들 기사를 보면 죄다 차 또는 집 근처인 것이다.
대놓고 밖으로 돌아다닌다면, 아마 송유나와 내가 함께 사진에 담긴 기사는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뜨고 말 것이다.
딩동-
이미 한 번 와본 집이라고, 익숙하게 인터폰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고.
송유나도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왔어요?”
그녀는 단정하게 말린 C컬 펌을 쓸어 넘기며 나를 반겼고.
“아… 네.”
그런 송유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풀거리는 시폰 소재의 블라우스.
그것과 꽤 어울리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청치마.
복숭아뼈까지 올라온 베이지 색의 양말까지.
그 복장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차분하게 넘기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내 웃음을 본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야, 왜 웃어요?”
그야말로 첫 데이트를 하기 위해 신경 쓴 데이트 룩 같았다.
늘 TV에서 보던 화려한 송유나의 드레스나 옷차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화장은 송유나를 알게 된 이후, 처음 보는 차분한 스타일이었다.
조명이 센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연예인의 화장은 모든 선을 잘 드러나게 해준다.
두꺼운 피부 화장부터 눈, 코, 입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진한 화장까지.
하지만 오늘 송유나의 얼굴은 투명하고 옅은 메이크업으로 평소에 보던 화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런 메이크업과 드레스 업이 결코 이상해서 웃은 건 아니었다.
그저 송유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피식 웃음이 터진 것이지.
“유나 씨, 이렇게 입을 수 있었어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송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툭 건드렸다.
“…뭐래. 얼른 와요. 아니, 들어오든가 말든가.”
홱 뒤돌아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가며 연신 미소를 지었고.
송유나는 거실이 아닌, 주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코끝을 맴도는 맛있는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고.
이내 내 시야에 들어온 식탁 위의 음식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에게 물었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언제 다 사 왔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옷에 튄 음식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사 오긴. 내가 다 준비한 건데. 별거 아니니까 얼른 앉아요.”
대단한 건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녀.
송유나는 냉장고를 열어 작은 캔을 하나 꺼냈고.
수저통을 휘이 저어 수저를 하나 꺼내, 캔 안에 든 것을 파스타 위에 듬뿍 올렸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스타를 바라보았고.
마치 된장을 푸기라도 하듯 커다란 수저.
하지만 그녀가 파스타 위에 올린 건, 값비싸다는 캐비아였다.
“이거… 캐비아 아니에요?”
놀란 듯 묻는 내 말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캐비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왜 그러지?”
그녀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뒤를 돌아 와인 냉장고로 향했고.
문을 열고 가득 찬 와인들을 쓰윽 훑어보더니, 이내 한 병을 골라 식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거니까. 간단하게 한 잔만 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받았고.
와인을 평소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내게 따르고 있는 이 와인이 엄청나게 비싼 와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워낙 비싸다고 유명한 와인이었으니까.
이 모든 식재료들과 와인을 급조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비싼 와인은 와인 냉장고의 한 줄이나 차지하고 있었고.
캐비아 외에도 고급스러운 식재료들이 냉장고에 즐비했으니까.
챙-
“나는 유나 씨가 집에서 요리는 전혀 안 하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했다.
“내가 자주 안 해서 그렇지, 뭐든 잘해요.”
송유나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이 말투.
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곁눈질로 쏘아보았다.
“뭐야, 또 왜 웃지?”
“아녜요.”
얼른 앞에 놓인 파스타를 포크에 돌돌 말아 한 입 먹었고.
그녀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때, 맛있죠?”
“음… 그러네. 요리 잘하는 거 맞네.”
“봐, 나 잘한다니까.”
송유나는 머리를 손으로 휘익 넘겼고.
손가락을 뻗어 다른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먹어봐요. 이게 내 야심작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먹던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은근히 나한테 말 놓네? 내가 나이 훨씬 많은데.”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봤자 몇 살 차이라고요. 아, 몰라. 그냥 반말할래.”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말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봤자 몇 살 차이라니. 무려 1만 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송유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나 반말할 거니까, 불만 있으면 너도 뭐 반말하든가.”
“아니, 그게 무슨….”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와인을 들이켰다.
* * *
오랜 시간에 걸쳐 음식을 먹은 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송유나가 어색한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흠흠, 우리 영화나 볼까?”
그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계속되는 송유나의 반말에 나 역시 그녀에게 말을 편하게 놓은 지 오래.
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르며 영화 목록을 넘겼고.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한 영화에 멈췄다.
“저 영화 안 봤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고.
“응, 저거 볼래?”
“명색이 배우라는 사람이 저 유명한 영화도 안 보고 뭐 했대?”
그녀를 놀리듯 묻자, 송유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소리쳤다.
“저거 완전 로맨스잖아. 집에서 혼자 저걸 볼 일이 없었지. 몰라, 이거 볼 거야.”
너무나 유명한 로맨스 장르의 영화.
나는 그녀의 반응에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영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영화의 내용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주인공들의 따스한 러브 스토리에 우리는 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꼬물꼬물 다가오는 그녀의 손가락.
그 손가락은 소파 위에 있던 내 손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가 사라졌고.
송유나의 손이 머뭇거리며 소파 위를 연신 꼼지락거렸다.
“흠흠.”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몸을 움직였고.
덥석-
꼬물거리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송유나는 내 손길이 닿자 움찔하는 듯했지만,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손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감싸 쥐었고.
그녀는 발그레해진 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다시 잡은 그녀의 손.
뭔가… 송유나와 같이 있으면.
그리고 그녀와 손이라도 잡고 더욱 가까워지면.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내 머릿속이 진정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1만 년의 기억이 들어오면서 터질 듯 복잡하던 모든 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순간이 내게도 있을 줄이야.
나는 시선을 쓰윽 돌려 맞잡은 우리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잡은 손을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조금 더 우리의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