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4)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송유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은퇴… 글쎄요.”
정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자, 그녀는 나를 설득시키려는 듯 어쭙잖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소파에 정자세로 자리를 잡은 뒤.
툭툭-
자신의 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본격적으로 내게 설득을 하든, 의견을 묻든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그녀의 야무진 손짓에 나는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켜내며 다가갔다.
“희성 씨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해졌는데, 대체 은퇴를 왜 한다는 거예요?”
송유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고.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턱을 어루만졌다.
“은퇴는 지금 생각 중이에요.”
“그러니까 대체 왜요?”
몇 시간 전.
송유나 집에 들어올 때의 어색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할리우드까지 진출해서 잘되어 가는데 갑자기 은퇴라니, 진짜 말도 안 돼. 이유라도 좀 들어봅시다. 왜 그러는 거예요. 네?”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게 질문을 던졌고.
그런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오래 참았던 궁금증을 쏟아내는 것처럼 홀가분하게도 보였다.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잔뜩 심각한 얼굴로 물었고.
“그냥… 흥미가 사라졌거든요.”
“…….”
내 답이 송유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는지,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순간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송유나가 앞에 놓인 차디차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를 따라 나 역시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었고.
송유나는 벌컥벌컥 차를 들이켜며 할 말을 장전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설마…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 못 받았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찻잔을 든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상 때문이 아니라….”
내 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성 씨, 한국에서 힘들게 올라갔잖아요. 그리고 할리우드 진출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송유나는 자신의 손바닥끼리 부딪치며 열변을 토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런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그렇게 곧바로 이름 날리는 거, 진짜 대단한 거예요. 내가 희성 씨한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희성 씨 정말 연기 잘해요.”
연기를 잘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역으로 연기를 시작했을 때.
카메라 울렁증으로 단 한 줄의 대사도 연거푸 NG를 내던 시절.
그때 내게는 빛 같았던 대배우 송유나가 상대 배역으로 서 있었지.
지금 생각해도 나는 배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사를 절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송유나가 떠올랐다.
내게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던 그녀가 당시에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런 그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사 한 줄도 떨려서 뱉지 못하는 배우로 인해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시간을 지체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송유나가 내게 연기 칭찬을 한다니, 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은퇴하겠다는 내게 조언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은퇴를 말리려 설득하는 것이 아닌, 배우로서 선배인 그녀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다.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그 해에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후보에 오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알잖아요. 내가 이 바닥에서 꽤 오랫동안 톱 급으로 있는 거. 나도 이 자리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마음이 수십, 수백 번은 들었어요.”
은퇴를 하려 마음먹은 건, 내가 배우로 살아가던 진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진희성의 꿈이었고.
10년을 살기 위해 그의 몸으로 들어온 내가 ‘진희성’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느라 배우라는 직업에 노력하며 살았던 것이지.
하지만 이제 나는 진희성의 생이 끝날 때까지 이 몸에서 있어야 하고.
이후 기나긴 1만 년을 살아가야 하기에.
굳이 이번 생에서 진희성의 꿈이던 배우를 더 이상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실, 연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늘 ‘실적’이 따라와야 하는 이 연예계에서 부담감과 압박을 받으며 살기 싫었던 것이지.
이번 생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행복감을 간절히 느끼고 싶었다.
내가 은퇴를 하려던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송유나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런 내 상황을 알 수가 없을 것이기에.
열변을 토하듯 말하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척은 했지만.
반쯤은 흘려들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한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한참 이야기를 쏟아내던 그녀가 듣고 있냐는 듯 내게 물었다.
“그럼요. 무슨 말하는지 다 알죠.”
“배우라는 직업이 원래….”
그때.
꼬르륵-
그녀의 배꼽시계가 울렸고.
송유나는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에 놀라 배를 움켜쥐었다.
“앗….”
민망할 그녀를 위해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흠흠, 저 좀 배고픈데, 혹시 먹을 거 없어요?”
내 말에 그녀는 눈썹을 들썩였다.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를 못 들었나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곤 주방을 바라보며 내게 답했다.
“집에서 요즘 안 해 먹어서 먹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럼 시켜 먹죠, 뭐.”
“좋아요.”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을 무렵.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도착한 음식.
송유나는 배달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관에서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던 순간.
갑자기 그녀는 발길을 멈칫 세웠다.
“아, 맞다…!”
“무슨 일 있어요?”
송유나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녀는 손을 뻗어 테라스를 가리켰다.
“밖에 파파라치들 있는데….”
톱스타인 그녀에게 파파라치는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늘 오르내리는 그녀였기에.
루머와 거짓 스캔들, 그녀의 행보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배달원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근데 유나 씨 집에 저 온 거 모르잖아요.”
“음식이요. 이거 2인분 시킨 거, 분명 봤을 거예요.”
“에이, 설마….”
내 말에 송유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파파라치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저번에도 우리 집 가는 배달원 확인해서 몇 인분인지 알아내고. 우리 집에서 놀다가 나가는 거까지 확인했어요.”
“와아… 진짜 무섭네요. 그래서 누구였는데요?”
“매니저 오빠랑 스타일리스트여서, 기사 한 줄도 안 나가기는 했지만. 파파라치가 그런 사람들이라고요.”
송유나는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분명 오늘 밤에 몇 시간은 여기 더 죽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럼 어쩌죠?”
“글쎄요….”
어둠이 깔린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네.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갈게요.”
* * *
음식을 모두 먹고 난 뒤.
진희성과 송유나 사이에는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밥을 먹기 전, 진희성의 마지막 이야기.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그 말에 그녀는 밥을 먹는 내내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큰 주제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지만.
송유나의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는 건, 이번에는 손만 잡고 자지 않겠다는 거잖아….’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 모습에 진희성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바깥에 파파라치들 때문에 아직 걱정돼요?”
진희성의 말에 송유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뭐 그렇죠.”
“걱정 마요. 제가 여기서 파파라치들 사라지면 조용히 나가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죠?”
송유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고.
“네, 오늘은 같이 자고….”
그녀는 진희성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이 자자는 건…!’
자신이 생각한 진희성의 마음을 확신한 그녀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안 돼요!”
갑자기 소리치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진희성이 눈썹을 들썩였다.
“예?”
그러자 송유나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그에게 외쳤다.
“사귀자고 말이라도 하든가…!”
송유나의 양손은 자신의 몸을 꽉 감싸 쥐고 있었고.
그 모습을 확인한 진희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사귀어요.”
“…네?”
진희성에게 다른 목적은 없었다.
당장 오늘을 위한 스킨십으로 사귀려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저 유나 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그의 말에 송유나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떠 진희성을 바라보았고.
그는 자신이 지옥 같았던 1만 년의 생을 마감하던 날.
윤회를 택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선택을 하게 된 이유의 전부가 ‘송유나’였으니까.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1만 년이라는 시간을 반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니까.
“그래서 더욱 살아가기로 했고요.”
진희성 말의 속뜻을 전혀 이해할 리 없는 송유나였지만.
그녀는 그런 진희성의 말에 엄청난 감동을 받은 듯했다.
자신에게 고백하며, 더욱 살고 싶다는 말.
그녀는 그 어떤 고백보다 찡한 느낌을 느꼈다.
송유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해요.”
“네?”
“왜 못 알아들어. 나… 처음 사귀어보는 거니까, 잘하라고…!”
* * *
“형, 얼른 들어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김 실장을 반기며 불렀고.
그는 밖에서 사온 커피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오랜만에 희성이 집 오네.”
“그러게. LA에 오래 있다 보니까, 우리 집에서 오랜만에 뭉치네.”
김 실장은 자연스레 거실로 들어와 익숙한 듯 자리를 잡았다.
“형, 오늘 평일인데 회사는?”
내 물음에 그는 턱을 치켜들고 내게 말했다.
“담당 배우인 희성이 네가 은퇴한다는데, 내가 뭐 할 일이 있겠어.”
그의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김 실장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은퇴는 무조건 해야 하는 거야?”
나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그에게 전달했고.
김 실장과 회사에서는 모두 나를 설득시키기에 바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설득과는 별개로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연기를 하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그 직업에서 오는 부담감이 벅찼을 뿐.
“아니,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될까?”
내 말에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대답이라는 것처럼.
“그럼, 충분히 생각해보고 말해도 되지. 특히 은퇴라는 건, 섣부르게 정하지 말고. 오래, 차분하게 고민해 봐.”
“그럴게. 대신 고민하는 동안 활동도 좀 쉬고 싶은데.”
“응, 회사에 이야기해 볼게. 그럼 재계약은, 그것도 보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좀 쉬고 싶어.”
“그래, 그럴 만하지. 너무 열심히 달려왔잖아.”
김 실장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고.
그런 그에게 나는 약속하고 싶었다.
“대신 엔터는 몰라도, 다시 일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형한테는 제일 먼저 알릴게.”
내 말에 그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알겠어. 나한테는 제일 먼저 알려줘.”
“응.”
그제야 김 실장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주제를 환기시키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쉬는 동안 뭐 하고 싶어?”
그의 질문에 나는 재빨리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직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모르겠어. 이제 생각해 봐야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