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3)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왔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인적이 드문 곳은 찾기가 쉽지 않은 터라.
자신감 넘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지만, 옷차림은 마음과는 달랐다.
턱 끝까지 가려진 깃이 세워진 상의.
커다란 마스크로 코와 눈을 가렸고.
모자를 푹 눌러써 머리와 이마까지 꽁꽁 싸매고 있었다.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가도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진희성임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을 터.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며 답답함을 풀고 싶지는 않았고.
그저 이곳저곳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싶었다.
서울의 차디찬 밤공기.
이 사이를 누비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하리라 마음먹고 나온 곳은….
그 어떤 특별한 곳도 아닌 ‘한강’이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은 한강이든 백화점이든 사람이 많은 곳을 걸어 다니는 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지만.
내게는 이 사소한 산책을 하려면 엄청난 용기와 시도가 필요했다.
물론 예전에는 이런 삶을 꿈꿨지만.
막상 그런 삶을 살게 되니, 전부 편안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한강에 나와 강이 보이는 벤치에 몸을 기대앉아 답답한 마스크 사이로 마셔보는 한강 공기.
“흐음….”
미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서 그런지 더욱 이 시간과 이 공간이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 정리하던 그때.
“저기….”
허리가 굽은 노인이 내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네?”
“내가 G 건물을 가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해서 말이야. 혹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아요?”
노인의 물음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꽁꽁 얼굴을 숨겼는데, 혹여나 나를 알아본 것인가 싶어 당황했기 때문이다.
“G 건물이요? 잠시만요.”
나 또한 이 장소가 익숙지 않았기에 서둘러 휴대 전화로 길을 찾은 뒤 손을 뻗었다.
“저쪽으로 나가셔서 올라가시면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우리 조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성심도 곱구먼그래.”
“감사합니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어루만지며 말했다.
“길 알려줘서 고마워요. 젊은 청년.”
“아닙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순간.
“으윽….”
갑자기 지끈거리는 두통이 또다시 반복됐다.
1만 년의 시간이 머릿속에 들어오고 나면 두통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이제 모든 기억이 내게로 들어왔으니, 더 이상 고통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 오만한 생각은 오산이었다.
머리는 며칠째 욱신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1만 년, 그 모든 기억이 바로 지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니 현생이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와 대화를 하더라도 이미 이야기를 해본 주제 같았고.
방금 노인에게 길을 알려주었던 상황.
그가 자신의 조카 같다는 말.
이 모든 대화가 이미 수차례나 과거에서 경험해 본 듯했다.
한강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한강도, 이 물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들도.
이와 같은 풍경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경험해 봤다.
진희성의 몸에서 경험해 본 것이 아닌, 과거 그 누군가의 몸들에서 말이다.
1만 년이라는 시간은 어마어마한 세월이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장소에 가더라도.
전부 낯설지가 않은 것이지.
혹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1만 년이라는 시간은 우주의 비밀을 알 만한 시간이라고.
그러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기간의 경험이 내게 있으니.
내가 새롭게 경험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내게 혼란은 사라졌다.
비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문득문득 벅차게 많은 기억이 쏟아져 버겁지만 말이다.
최서빈이 내게 조언을 해준 대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새롭게 해볼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거….”
가장 처음으로 목표를 향한 걸음이 아닌, 내 가슴을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
쉽사리 그려지지가 않았다.
여행?
사업?
이민?
단순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행위도.
진희성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려는 직업들도.
지금 섣불리 생각해 결정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떠올리며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한 가지가 있었으니….
“…송유나.”
그냥 그녀의 이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1만 년의 방대한 기억 속에서도 그녀를 떠올리는 자리는 남았던 모양이다.
그 어떤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송유나가 미친 듯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나는 이 마음을 그저 생각으로만 그쳤을 것이다.
송유나가 보고 싶다면, 그냥 보고 싶은 마음에서 끝냈을 거라는 거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마음으로 삭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송유나의 집으로.
***
송유나가 인터폰으로 내 얼굴을 확인했는지 다소 머뭇거리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세요?
주변에 누가 있을까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예요, 진희성.”
내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우선 올라와요.
철커덕-
굳게 닫혔던 현관문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그녀의 집.
현관이 열리자 송유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대체 여기에 희성 씨가 어떻게….”
송유나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박이며 나를 쓰윽 훑어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머릿속이 온통 너여서, 그냥 보고 싶어서,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와 같은 말은 내뱉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녀에게 향한 것은 맞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근처 복도를 살피며 말했다.
“나 여기 계속 세워둘 거예요?”
내 말에 송유나가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맞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송유나는 황급히 내 팔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빨리 들어와요. 누가 보면 큰일이라고요.”
그녀는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복도에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나를 끌어당긴 덕에 그녀와 나의 거리는 한층 가까워져 있었고.
현관문 앞에 딱 붙은 둘의 숨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정도였다.
“…….”
송유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숨을 참는 듯 턱을 끌어당겼고.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옷을 손으로 풀며 말했다.
“저희 여기에서 이야기해야 되나요?”
내 말에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 우선 들어오세요.”
쭈뼛거리는 그녀는 손을 뻗어 집 안을 가리켰고.
나는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송유나가 먼저 소파에 앉자, 나는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음소거가 된 채 나오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그녀는 급히 리모컨을 잡아 TV 전원을 껐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어진 집 안.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송유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은 꺼진 TV에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근데 대체 여기에는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물음에 나 역시 고개는 앞을 향해 멈춰 세우고 답했다.
“유나 씨 보러요.”
“…그러니까 왜요. 한국 오면 연락하랬더니 하지도 않았잖아요.”
말을 내뱉다가 흥분한 송유나는 몸을 내게로 돌려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전화하니까 받지도 않고. 문자는 다 씹어놓고 불쑥 이렇게 나타나니까. 대체 희성 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를 않잖아요. 왜 온 거예요?”
내 오른쪽에 앉은 그녀가 나를 향해 쏘아붙이자.
나도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송유나와 눈을 지그시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유나 씨랑 같이 있어도 돼요?”
“…….”
그녀는 입을 꾹 닫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고.
나는 시선을 낮춰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만… 그냥 손만 잡고 있을게요. 여기서 유나 씨랑 조금만 같이 있어도 될까요?”
“그… 손을 잡고….”
송유나는 당황했는지 횡설수설 말을 잇지 못했고.
떨리는 눈동자를 내게 들킬세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차, 손님이 왔는데, 제가 마실 것도 안 주고. 우선 차라도 가지고 올게요.”
송유나가 손을 뻗어 내게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송유나는 진희성을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잰걸음으로 도착한 주방.
그녀는 주방 모퉁이를 돌아 진희성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대체 뭐야.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손만 잡고 있겠다니.”
그녀는 고개를 벽 옆으로 빼꼼 내밀어 자리에 앉아 있는 진희성을 바라보았고.
가장 아끼는 잔 두 개를 꺼내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손만 잡고 자겠다, 뭐 이런 거야? 진짜 어이없어….”
황당하다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송유나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힐 동안 주방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잠시 뒤.
진정된 그녀는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패턴의 잔 두 개를 손에 쥐고 거실로 향했다.
“여기 차 마셔요.”
소파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찻잔.
진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잘 마실게요.”
그들은 널찍한 거실 소파에서 꽤 가까운 자리에 붙어 앉았다.
차를 한 모금씩 들이켠 뒤.
탁-
동시에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그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희성은 망설일 것 없이 송유나의 손을 덥석 잡았고.
그들의 손은 한데 포개어졌다.
한곳을 바라보며 앉은 진희성과 송유나.
꺼진 TV의 검은 화면에 비친 둘의 모습.
그 모습은 마치 사진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손을 잡고 굳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있었고.
진짜 말 그대로, 진희성과 송유나는 ‘손만’ 잡은 채 시간을 보냈다.
그 어떤 행동도, 대화도 그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요함.
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도 그들의 태도는 상반되었다.
송유나의 얼굴은 터질 듯 빨개져 있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너무나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자신의 귓가에 들릴 정도로.
그녀는 그런 자신의 표정이 드러날까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 반해 진희성은 오히려 평온하게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혼란이 잠재워진 사람처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새근새근 들리는 숨소리에 송유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진희성과 눈이 마주칠세라 곁눈질로 조심스레 그를 살폈다.
“…어?”
송유나의 시야에 들어온 진희성은 아주 편안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잠든 듯 보였다.
소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자신의 손을 잡은 진희성은 고개를 뒤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일정한 패턴으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는 잠에 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자신은 너무나 떨리는 마음에 눈조차 뜨지 못했는데.
잠에 든 진희성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진짜 잔다고?”
그녀는 진희성과 잡고 있는 반대 손바닥을 바라보며 입김을 후후 불었다.
손에 송골송골 고여 있는 땀방울.
‘나는 이렇게 손에 땀이 나는데, 이 상황에 잠을 자다니.’
잠든 진희성이 깰까 걱정된 송유나는 잡은 손을 빼내려 했고.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맞잡은 손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진희성이 어찌나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는지 송유나의 손가락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진희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불편하기는 한데, 내 손을 너무 꽉 잡고 잘 자니까… 어쩔 수 없지, 뭐.’
***
“하암….”
감았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자 손가락 끝에 닿는 송유나의 팔.
나는 황급히 하품하던 입을 틀어막았다.
송유나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우리의 손은 힘이 풀린 채 살포시 맞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빼내어 소파에서 일어났고.
옆 의자에 걸린 담요를 들고 와 잠이 든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소파에 앉아 잠이 든 것 같았다.
곧은 정자세로 잠에 들었지만, 최근에 잤던 잠을 통틀어 가장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잤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녀와 손을 잡고 있던 게 고작 한두 시간이었지만.
내 몸은 몇 시간을 잤던 것처럼 개운했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는 송유나의 집.
높은 층고에 널따란 거실은 감탄을 자아냈다.
깔끔하게 꾸며진 집.
그녀의 집을 함부로 볼 수가 없었기에, 그저 계속 함께 있던 거실을 배회했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장식장.
그 장식장은 칸칸마다 송유나의 치열함과 노력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그녀가 배우로 활동하며 받아온 수많은 상들.
팬들에게 받은 편지와 선물들.
이 벽면 하나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벽에 잔뜩 걸린 액자.
전부 송유나의 사진이었다.
내 키만큼 기다란 액자.
송유나의 얼굴이 꽉 찬 액자였고, 그 외에도 그녀의 수많은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그 사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그때.
“희성 씨.”
나를 부르는 송유나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일어났어요?”
송유나는 담요를 덮고 눈을 비비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송유나는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진짜… 은퇴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