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2)
지금까지 살아온 1만 년.
그 긴 세월 동안 내게는 10년마다 한 번씩 다른 인생이 주어졌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인생들.
몇 살의 몸으로 들어가는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인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상태로 눈을 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세계로 들어간 나는 곧바로 그 삶에 적응했다.
항상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처럼.
그렇게 그 몸에서 살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1만 년의 삶을 살아가는 벌을 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는 순간.
나는 더욱 열심히 그 몸에서 적응하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삶이 내게 주어졌든, 그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비록 그 몸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년의 삶을 살다가 나갈 영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그 직업에 적응했고, 늘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
물론 진희성의 몸으로 살며 중간에 그러지 못한 날들이 있기는 했다.
1만 년의 벌을 받으며 10년을 산다는 걸 알게 된 날.
그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살아갔지만.
1만 년이라는 윤회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그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고통과 무기력에 발버둥을 치며 삶을 포기하려던 나날도 있기는 했다.
당시 그런 흔들리는 정신이 오히려 할리우드에서 잔인한 역할을 소화해 내는 데 도움은 됐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그러니까 ‘맨정신’으로 살아왔을 때는 전부 이질감 없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 인물, 삶의 소소하고 큰 목표들을 모두 이루려 발버둥을 쳤다.
‘진희성’의 몸에서 처음 깨어난 날.
그때도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거부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말이다.
연기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이 몸.
엄청난 연습과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 힘들었던 암흑기를 하루빨리 벗어나려 노력했다.
이후 배우로서 갖는 목표들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눈앞에 놓인 와인 잔을 빙그르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최서빈과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그가 내게 툭 내뱉은 그 한마디는 내 마음에 떨어진 돌 같았다.
돌 하나가 잔잔하던 내 마음의 호수를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고.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마치 뒤통수를 아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내게 ‘목표’는 삶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살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 등은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모든 일들은 내가 목표를 이룸으로써 다가온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더욱 목표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단순하게 했던 행위나 행동은 없었다.
내게 일어나는 일, 내가 벌이는 행동들은 늘 그 목표라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수단과 방법일 뿐.
그러나 최서빈의 그 한마디.
‘X대로 살아봐. 네가 하고 싶은 거, 꿈, 목표 같은 건 집어치우고 꼴리는 대로 살아봐.’
그의 한마디가 갑자기 내 목표를.
그리고 1만 년을 살아온 나의 긴 세월을 반증하는 말이었다.
최서빈의 말에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의 이야기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쓰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도 이제 목표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냥 하고 싶은 거 전부 하면서 살아보자.”
마음을 먹는 순간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왔다.
“1만 년을 그렇게 못 살았는데, 진희성 몸으로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봐도 되지 않겠어?”
최서빈이 내게 해준 진심 어린 조언은 나에게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최서빈은 ‘배우’라는 직업에 국한된 조언이었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배우’라는 틀 안에 가둬두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목표라는 짐을 던지고 나니, 갑자기 내 안의 세포들이 하나둘 꿈틀대기 시작하는 듯했다.
당장 끌리는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목표와 연관 지어 고민할 것 없이, 그저 내 마음대로 하겠다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오고 있었다.
잔에 남은 와인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손에서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향했고.
곧장 겉옷을 챙겼다.
“틀을 깨고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우선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
나는 옷을 걸치자마자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그와 비례하듯 내 얼굴은 잔뜩 긴장해 굳었다.
어디로 발길을 향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지만.
고민의 결론을 내기 전, 그저 노을이 지고 있는 이 길을 걷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조금씩 얼굴이 유명해지면서 해가 하늘에 아직 남아 있을 때.
홀로 밖을 나오지 못했다.
늘 촬영차 밖으로 나오거나, 매니저인 김 실장과 함께였지.
혼자 인파가 많은 곳을 나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조금 인지도가 생겼을 무렵, 영화관에 가거나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에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쏠리면서 결국 김 실장이 출동해야만 했으니까.
그런 건 당연했다.
그게 불쾌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연예계 생활을 할 수가 없을 터.
이후 홀로 바깥을 편히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감수해야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모든 이유를 제치고 그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두통은 나를 괴롭혔고.
1만 년 동안 내가 옳다 생각하고 살아왔던 신념이 바뀌는 이 순간,
답답함에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움직이고만 싶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눈이 부시게 햇빛을 반사시키던 한강.
그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을 때쯤.
송유나는 한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벌써 해가 지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지이잉.
그녀의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송유나는 그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유나야, 통화 가능해?
“응, 말해.”
-며칠 전에 회사 와서 봤던 대본, 그거 파일 보냈거든. 확인해 보라고.
“아….”
기다렸다는 말이 아닌지 송유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알아차렸는지 최 실장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혹시 다른 대본도 필요하면, 바로 보낼게. 저번에 봤던….
송유나는 최 실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라냈다.
“아니, 오빠.”
-응?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다른 대본?
그녀는 최 실장이 자신의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하자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내가 물어봤던 거 있잖아.”
-나한테 물어본 게 대본 말고….
최 실장은 의문을 가진 채 말끝을 흐렸고.
“그 누구 은퇴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결국, 그녀는 자신이 궁금한 점을 그에게 물었다.
빙빙 돌려 진희성이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최 실장은 그녀의 말에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아, 희성 씨?
“어. 그래도 같은 회사인데, 나도 소속 연예인들 이야기를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나한테 누가 물어보는데, 내가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은퇴한다고 한 이후로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
“그래?”
-응, 그냥 회사에만 이야기한 것 같은데, 회사에서는 당연히 희성 씨 회유하려고 하고….
“회사에 찾아오지는 않았고?”
-오늘도 나 회사에 있었는데, 나는 못 봤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최 실장은 송유나의 푸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듯 답했다.
-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지.
“아… 아니, 오빠 말고. 아무튼, 알았어.”
-그럼 대본은?
“내가 다시 연락할게. 우선 끊어.”
전화를 끊자마자 송유나는 휴대 전화를 테이블에 뒤집었다.
“진희성,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은퇴는 뭐고.”
그러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진희성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고.
뒤집어 놓았던 휴대 전화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말했는데, 아직 연락도 없고….”
그녀는 진희성을 떠올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LA에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진희성의 연락처를 꾹꾹 눌렀지만.
마지막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손가락을 허공에서 멈칫 세웠다.
“이제 진짜 내가 먼저 전화 안 할 거야. 올 때까지 절대… 안 해!”
송유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돌렸고.
앞에 놓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라스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온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근데 갑자기 은퇴한다는 거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장소를 바꿔도 그녀는 진희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 그때 미국에서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고, 김 실장님이 희성 씨 아픈 것 같다고 걱정했으니까….”
진희성이 은퇴를 결심한 건, 건강 상태의 적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송유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이건 동료로서 걱정돼서 연락하는 거니까.”
그리고 곧장 그녀의 손가락은 진희성에게로 향했다.
휴대 전화 너머로 신호음이 여러 차례 울렸지만.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안내 음성만 나올 뿐.
그녀가 걱정하는 진희성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었다.
“뭐야, 내가 이렇게 전화하는데 전화도 안 받고.”
걱정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진희성에게 분노에 가득 찬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왜 전화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요? 한국 오면 연락한다고 했잖아요.
순식간에 문자가 전송됐고, 송유나는 손톱을 톡톡 씹으며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인 답장.
그녀는 1분이 채 흐르기도 전에 다시 휴대 전화를 두드렸다.
-은퇴는 또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은퇴를 왜 해.
그렇게 몇 분이 더 흘렀고.
여전히 진희성은 그녀의 문자에 답장은커녕, 읽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게 읽지 않음을 표시하는 ‘1’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본 그녀는 휴대 전화를 소파에 던졌다.
“진짜 답답해 죽겠네. 진희성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송유나는 갑갑함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흥분한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히며 시간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진희성 집에 확 찾아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또 내가 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소파에 기대앉았다.
“됐어, 이번에는 절대 안 가. 자존심 상하게 내가 또 갈 수는 없지.”
온통 진희성을 향한 생각을 돌리기 위해 TV를 틀었지만.
TV에 꽂힌 시선과는 달리, 그녀의 신경은 진희성을 향해 있었다.
“나한테 마음이 있기는 한 거야?”
예능 프로그램에 웃긴 장면이 나와도 송유나의 표정은 싸늘했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그때.
딩동-
홀로 사는 그녀의 집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송유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뭐야, 갑자기 이 시간에 누가….”
그녀는 본능적으로 TV의 소리를 음소거로 돌렸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하려는 듯했다.
휴대 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인터폰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고.
“음식 시킨 것도 없고, 최 실장 오빠도 온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숨을 죽이고 인터폰으로 초인종을 누른 사람을 본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진희성… 이잖아.”
화면 속에 비친 남성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힐끔거리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얼굴은 영락없는 진희성이었다.
겉옷으로 목까지 감싸고, 마스크에 모자를 덮어써도, 송유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연락도 없더니, 우리 집에는 왜….”
그녀는 황급히 TV 앞에 서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눌러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세요?”
송유나의 물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예요, 진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