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47 – 본능이 이끄는 대로 (1)
“답답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송유나는 오늘도 조용한 자신의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국으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고. 연락은 되지도 않고….”
그녀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
틈만 나면 진희성과 관련된 기사가 뜬 건 없는지.
SNS에 업데이트된 내용은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진희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회사.
WG 엔터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자신의 매니저, 최 실장과 매일같이 연락하고는 했다.
“새로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도 확인해야겠다.”
송유나는 휴대 전화를 들어 최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최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응, 유나야.
“현장이야?”
-아니, 현장은 아니고… 근데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송유나는 대놓고 진희성은 언제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없냐.
진희성은 미국에서 뭘 하고 있냐.
진희성 매니저에게 들은 이야기는 없냐는 둥.
질문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차마 진희성의 ‘진’ 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애꿎은 회사 이야기로 빙빙 돌려 질문을 던졌다.
“아… 그 대본 나온다고 한 건 어떻게 됐나 해서.”
-대본?
“응, 저번에 오빠가 내 영화 대본 이야기 했잖아.”
생각나는 대로 뱉은 이야기에 최 실장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영화 대본… 혹시 최 감독님 작품 이야기하는 거야?
그의 말에 송유나는 대충 끄덕이며 답했다.
“어… 어, 대본 나왔어?”
-아니. 그건 기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야. 그래서 따로 너한테 이야기 안 해준 건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딱히 최 감독님 작품을 기다린 건 아닌데. 궁금해서.”
-몰랐네. 알려줄 걸 그랬다. 미안해.
“됐어, 미안할 거까지야.”
그녀는 머쓱한 듯 침을 꿀꺽 삼켰고.
최 실장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송유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오빠, 회사야?”
-어, 회사에 있지. 왜?
회사에 있다는 최 실장의 말에 송유나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됐다. 나 그럼 회사로 갈게.”
-회사에?
“응, 가서 새로 나온 대본들도 좀 보고, 올해 스케줄 확인도 하게.”
갑자기 스케줄을 보겠다는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이유가 있어야만 회사에 나오던 그녀였기에.
최 실장은 자신이 스케줄을 송유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말했다.
-내가 스케줄 다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다시 정리해서 전달해줄까?
“아니. 오빠 회사라며. 가서 확인하지, 뭐.”
-그것 때문에 회사에 오겠다고?
“가서 대본도 좀 보고.”
-유나, 네가 대본을 보러 온다고…?
“왜,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늘 내가 집으로 가져다줬잖아. 혹시 보고 싶은 대본 있으면, 내가 정리해서 가져다줄게.
송유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진희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회사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러려면 자신이 직접 회사에 가야만 했으니까.
“아니. 내가 회사로 간다니까?”
순간 차가운 그녀의 말투가 터져 나왔고.
-아… 그럴래?
“오빠 이미 회사인데, 거기서 챙겨서 나한테 와야 하는 거잖아. 뭐하러 번거롭게 그렇게 해. 내가 오빠 있는 곳으로 갈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듯한 말이지만, 그렇지 못한 말투.
최 실장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송유나의 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알겠어. 바로 회사로 갈게.”
-응.
최 실장은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뭐지. 유나가 먼저 회사에 오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는 송유나를 떠올리며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그녀가 오는 것을 대비해 서둘러 대본을 찾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유나야, 왔어?”
회사에 도착한 송유나를 보며 최 실장이 손을 흔들었다.
“어, 오빠.”
“내가 데리러 가도 되는데.”
“됐어. 그럴 거면 내가 오는 의미가 없잖아.”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나는 무언가를 찾는 듯이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살폈다.
진희성의 매니저가 사무실에 있는지를 말이다.
그가 사무실에 있다는 건, 진희성이 한국에 왔거나 혹은 곧 올지도 모른다는 거니까.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김 실장은 없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본 최 실장이 함께 목을 쭉 빼고 물었다.
“유나야, 누구 찾아?”
그의 부름에 송유나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찾을 사람이 누가 있어.”
“하긴.”
그러고는 미리 챙겨둔 대본들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 이번에 새로 나온 대본들이고, 장르별로 정리한 건데….”
송유나는 높게 쌓인 대본들을 곁눈질로 쓰윽 살피며, 최 실장에게 물었다.
“오빠, 회사에 별일은 없지?”
그녀의 물음에 최 실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회사에 별일이 있을 게 없지. 왜,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어?”
“아니. 그냥 뭐 우리 회사 연예인들 이슈 있나 해서.”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너 다른 연예인들한테 관심 없잖아.”
정곡을 찔린 그녀는 오히려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괜히 걔네 때문에 같은 회사인 나한테 불똥 튈까 봐 그러지!”
언성이 높아진 송유나의 말에 최 실장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난 또 뭐라고.”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침을 삼켰고.
최 실장은 주변을 의식하며 송유나에게 손짓했다.
그 손짓에 송유나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최 실장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고.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이번에 한윤선 학폭 터져서 회사 계약 해지될 거래.”
송유나의 안중에 없는 인물인 한윤선.
잔뜩 기대했던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최 실장에게 가까이 있던 몸을 뒤로 젖혔다.
“아, 뭐야.”
“이런 거 알려달라는 거 아니야?”
“하아… 그렇긴 한데.”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은퇴 소식!”
최 실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그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은퇴한대?”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송유나에게 다가갔다.
“이제 막 이야기했대. 진희성이 은퇴….”
최 실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가 그를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진희성?”
그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유나야, 쉿.”
송유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 다시 착석해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희성이 은퇴를 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자세히 좀 설명해 봐.”
***
챙-
술잔이 부딪치자 가득 담긴 술이 넘실거렸다.
“선배님이랑 이렇게 둘이 술 마시는 거 오랜만이네요.”
최서빈이 피식 웃으며 내게 답했다.
“저번에 LA에서 마셨잖아.”
“한국에서 말이에요.”
내 말에 그는 술잔을 입에 털어 부은 뒤 답했다.
“그건 그렇네. 소주는 오랜만이다. 하하.”
나 역시 그를 따라 소주를 털어냈고.
최서빈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나를 위로하듯 운을 뗐다.
“그때 시상식에서 상 못 받은 거, 서운하고 좀 그렇지?”
그의 말에 나는 잊고 있던 아카데미 시상식이 떠올랐지만.
못 받은 그 상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었기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제 상이 아니었던 거죠.”
내게는 그 상을 받지 못해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스펙터클했으니까.
그곳에 감정을 쏟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서빈은 그런 내 마음을 단 1g도 알 리가 없었고.
내게 본격적인 위로와 함께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배우가 원래 상을 바라고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그저 그의 말에 공감해주는 듯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그렇죠.”
“한국에서도 그래. 연초에 드라마가 잘됐어도, 연말에 드라마 찍은 게 상을 더 많이 받잖아.”
그는 내 빈 잔을 채워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상에 연연하면서 슬퍼할 필요 없다, 이거지.”
“네, 이제는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고요.”
“그럼 다행이고.”
최서빈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고.
챙-
다시금 우리의 술잔은 청아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렇게 술병은 하나둘 쌓여갔고.
우리의 대화도 점점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배우라는 것도 그저 일반인들처럼 회사원, 의사, 사장님 그런 직업과 다를 게 없다 이거야.”
“맞죠. 그냥 직업 중 하나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더 불안한 직업인 거지. 배우는 특히나 더 우리를 필요로 해야 연기를 할 수 있는 거고, 연기를 해야 돈을 버는 거니까.”
최서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술자리에 도착해 그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할 때.
사실 그가 내게 내뱉은 위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최서빈은 고작 40년도 살아보지 않은 젊은 나이였고.
나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기간인, 무려 1만 년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최서빈이 보기에 어린 내게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니 내 귀에 들어올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서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굳게 닫혔던 내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최서빈이 배우로서 내게 해주는 진심이 담긴 이야기들.
그건 앞으로 진희성으로서의 삶과 또다시 펼쳐질 1만 년의 삶들과 조금은 일맥상통한 듯 보였다.
“미래가 두렵고, 불안하죠.”
그는 배우로서 롱런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것이었지만.
나는 배우를 떠나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응. 배우, 연예계는 앞으로 내게 일어날 일을 전혀 알 수가 없거든.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모든 작품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었어.”
주제는 비록 달랐지만.
그 ‘주제’를 꺼내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면, 묘하게 우리의 대화가 잘 어우러졌다.
굳이 대화의 흐름을 꺾지 않고 푸념하듯 읊조렸다.
“앞으로 이 긴 세월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버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최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런 문제라면 쉽네.”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의 말에 나는 짧은 숨을 훅 내쉬며 답했다.
“그렇게 해봤죠. 제가 늘 하고 싶은 꿈을 꾸면서….”
최서빈은 내 말을 툭 잘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야.”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내가 술 한 잔 마셨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
“네, 그럼요.”
최서빈은 나와 눈을 맞추고 검지를 뻗으며 외쳤다.
“X대로 해.”
그의 격한 한마디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
그의 한마디에 나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꿈? 목표? 그깟 것들 집어치우고, 그냥 꼴리는 대로 살아봐.”
“그래도….”
“본능에 이끌려서 자고 싶으면 잠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시선을 끌고 싶으면 강남 가서 매니저 없이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그는 찰랑이는 술잔을 손에 들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만, 그건 뒤로 미뤄놓고. 네가 원하는 ‘꿈’ 말고,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해봐.”
최서빈은 술잔을 입에 털어 부었고, 나는 그런 최서빈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희성이 너… 그거 해야 롱런한다.”
그의 충고 같은 조언이 끝나자,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단순히 열정과 열망이 타오르는 게 아니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틀이 깨지는 듯한 느낌.
곧장 가슴을 식히듯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털어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