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57화 (257/303)

257화 #46 - 선택 (6)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던 김 실장이 내 말에 황급히 뒤를 돌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연기… 그만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 말이 연기를 뭐 아예 그만두기라도 하겠다는….”

그때.

적색이던 신호에 청색이 들어왔고.

우리의 상황을 알 리가 없는 뒤차는 귀를 울리도록 경적을 울렸다.

빠앙-

“아… 이제 막 신호 바뀌었구만.”

김 실장은 백미러로 뒤차를 쓰윽 바라보더니 이내 액셀을 밟았다.

다시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차.

김 실장은 경적에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고 내게 물었다.

“희성아, 너 연기 그만하고 싶다는 거, 그게 무슨 뜻이야?”

재차 묻는 그의 말에 나는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운전석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은퇴하겠다고.”

“뭐?”

김 실장은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이, 즉 은퇴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란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

“너 지금 은퇴라고 한 거야, 정말?”

“어. 나 이제 쉬고 싶어. 은퇴하려고.”

끼익-

차는 급하게 갓길에 멈춰 섰고.

김 실장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너 한국 오랜만에 들어왔다고 지금 나한테 농담… 하는 거지?”

그의 물음에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굳을 얼굴로 답했다.

“농담 같아?”

내 표정을 단번에 파악한 김 실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농담 같지는 않네.”

이내 차 안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내가 걱정돼서 급하게 미국에 온 것도.

한국에 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가 기뻐했던 것도.

내가 그의 담당 배우이기 때문이었을 터.

그런데 오자마자 은퇴를 하겠다 선언하니, 김 실장은 꽤 당황한 것 같았다.

잠시 차 안에 정적이 흘렀고.

김 실장이 먼저 고요함을 깨트렸다.

“희성아, 너 아직 할 게 많잖아.”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게 더 남았나?”

“그럼. 너 상도 받을 게 얼마나 많은데. 물론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못 받기는 했지만, 그건 전혀 좌절할 필요가 없어.”

김 실장이 나를 설득하듯 말을 이어갔다.

“너 이미 한국에서는 최고야. 이제 할리우드 진출해서 하나씩 쌓아가는 과정이었고. 게다가 그 상도 한국 배우라 밀린 거지. 올해는 무조건….”

그가 생각한 내 은퇴 첫걸음의 시작은 ‘상’이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형.”

“응, 희성아.”

“나 상 못 받았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김 실장은 내 말에 더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 인정받는 것 때문이야?”

그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너 이미 한국에선 톱 배우야. 네가 미국에 오래 있어서 잘 모르나 본데, 한국에서 네 영화, 작품. 아주 난리가 났다고. 네 작품 관객 수 기록도 엄청나고.”

김 실장의 계속되는 말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우가 최단 기간에 관객 수로 기록을 세우는 게….”

“형, 근데 그거 하면… 뭐가 바뀌나?”

“…응?”

그는 내 말에 당황한 듯 눈썹을 들썩였다.

“형 말대로. 배우가 상도 받고, 관객 수, 흥행으로 기록도 세우면 말이야. 그럼 뭐가 바뀌느냐고.”

김 실장은 내 말에 머리를 격하게 끄덕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바뀌지. 우선 통장 잔고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바뀔 거야.”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바뀌는 점들을 늘어놓았다.

“많은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희성이 네가 하고 싶은 것들도 다 할 수 있어. 돈으로 하는 건 뭐든지. 게다가 팬덤은 말할 것도 없지.”

“그러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형 말이 다 맞다니까. 그러니까 은퇴라는 말은 고사하고….”

하지만 나는 그런 김 실장의 설득에도 곧장 입을 열었다.

“뭐 돈은 많이 벌겠지. 근데 이제 내 삶에 돈은 크게 중요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내뱉는 나를 김 실장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

나를 설득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의 축 처진 입꼬리.

“미안해. 형이 내 매니저라 미국에 급하게 와서 열흘 넘게 나 챙겨줬는데, 이렇게 말해서.”

내 말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손사래를 쳤다.

“희성아, 내가 네 매니저는 맞지만. 그거 하나 때문에 다 내팽개치고 미국으로 간 건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너는 이제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간 거야. 앞뒤 안 보고 네가 있는 미국으로.”

설득을 시키려는 그의 태도도.

지금 내게 친동생 같다고 하는 이 말들도.

전부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촉촉한 눈가.

미간에 살짝 찌푸려진 주름까지.

김 실장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배우 생활을 하며 김 실장을 친형처럼, 가족처럼 생각하고 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에 은퇴를 내뱉었던 말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김 실장과의 인연은 배우와 매니저가 아니어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줘서. 나도 형을 생각하는 마음은 형과 다를 바 없어.”

그리고 고개를 쓰윽 들며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근데 그것과는 별개로… 나 은퇴하고 싶어. 은퇴할게, 형.”

***

똑똑.

김 실장의 노크에 WG 엔터 박 대표는 소리쳤다.

“어, 들어와.”

그의 목소리를 들은 김 실장이 곧장 문을 열었다.

김 실장은 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가 허리를 깊게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 김 실장. 얼른 앉아.”

“네.”

소파에는 박 대표, 그리고 전날 김 실장과 통화한 한 본부장이 앉아 있었다.

김 실장이 한 본부장의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응, 김 실장 왔어?”

“예, 본부장님.”

그들의 짧은 인사를 시작으로 대표실은 심각한 공기가 흘렀다.

박 대표가 다리를 꼬고 앉아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김 실장아, 그래서 진희성이 은퇴를 한다는 게 사실이야?”

그의 물음에 김 실장은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정자세로 앉아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희성이가 은퇴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김 실장의 답에 옆에 앉은 한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래서 애들이 너무 갑자기 뜨면 안 된다니까. 한순간에 큰돈을 만지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박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애들 이러다가 흥청망청 쓰다가 돈 떨어지면 복귀하는 거.”

박 대표의 생각은 그와는 조금 다른지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했고.

한 본부장은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통장에 꽂힌 돈 보고 혹했겠지. 게다가 미국까지 가서 길게 쉬니까 복귀도 하기 싫었을 거고. 딱 봐도 사이즈 나오네.”

그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희성이 돈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박 대표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래, 김 실장이 말해봐. 대체 왜, 갑자기 은퇴를 하겠다는 거야?”

“힘에 부친 듯 보였습니다. 제가 돈 버는 거로도 설득해보고, 명예욕으로도 설득해 봤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대표가 그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 제스처에 김 실장이 입을 닫았고.

박 대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곡을 찌르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혹시… 은퇴한다고 해놓고 1, 2년 쉬다가 다른 엔터로 가려는 거 아니야?”

김 실장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대표님. 희성이가 그런 의도로….”

한 본부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김 실장의 입을 막았다.

“맞네. 얼마나 좋아. 재계약을 이런 식으로 거절하고, 다른 엔터로 갈아타려고 간보는 거지.”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희성이 그동안 다른 엔터와 접촉한 적도 없었고요.”

박 대표는 소파에 등을 푸욱 기대며 말했다.

“김 실장이 진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엔터에서 연락이 와도 몇 번은 왔을 거야.”

한 본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곁눈질로 김 실장을 훑었다.

“이거이거… 우리 엔터에서 몸값 잔뜩 올려놔 줬더니. 이런 식으로 다른 회사에 가려고 꼼수를 쓰나?”

그가 내뱉는 말은 김 실장이 아닌, 진희성을 향하고 있었고.

김 실장은 그런 식으로 진희성을 매도하는 한 본부장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 본부장이 아닌, 박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희성인 다른 엔터로 가려고 수를 쓰는 것도, 단순히 업계에서 정점을 찍어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을 다해 토로하는 김 실장을 보며 박 대표는 대수롭지 않게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희성이 미국에 갔을 때부터 많이 지쳐 보였습니다. 그때마다 회사에 희성이 상태 다 보고도 올렸고요.”

하지만 박 대표는 검지를 휘이 저었고, 상체를 당겨 김 실장의 앞으로 숙였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진희성,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다른 엔터로 가는 건 더더욱 안 돼. 김 실장이 희성이 뒤를 더 조사해와.”

***

희성이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김 실장에게 은퇴를 선언한 뒤.

진희성의 몸에서 살아갈 날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배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집에서 괴로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차근차근 하나씩 정리를 해보자.”

새롭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간에 그 전에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연예계 생활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뭐든지.

의자에 앉아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에서 쓰던 해지한 휴대 전화를 꺼낸 일이었다.

1만 년의 생을 마감하기 위해 한국에서 정리하고 갔던 휴대 전화.

모든 사진과 기록들이 저장된 휴대 전화였기에.

다시금 그것을 꺼내 든 것이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내 손은 휴대 전화 주소록을 클릭했고.

저장된 번호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진희성으로 살아가며 만났던 사람들.

“어디부터 정리하면 좋을까….”

가장 위에 저장된 부모님의 연락처.

그 아래로 가나다순으로 저장된 배우들의 연락처들.

나는 그 이름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고 내 삶에서 이런 건 다 의미 없지.”

손가락을 움직여 연락처를 하나씩 삭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순식간에 몇십 명의 인연들이 내 삶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연락처.

한참을 정리하고 다음 연락처로 넘기자마자 나는 손가락을 멈칫 세웠다.

‘송유나’.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 이름.

내가 이 지옥 같은 1만 년을 윤회한 건, 사실 송유나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 하나만으로 이 선택을 한 것이지.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송유나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송유나의 연락처가 담긴 화면 위를 손가락이 빙빙 배회했지만.

그녀의 번호는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통화 버튼을 누를 자신 또한 없었지.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고.

화들짝 놀라 발신인을 확인했다.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갑자기 걸려온 최서빈의 전화에 당황했고.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로 받지 않고 망설였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