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46 - 선택 (5)
끙끙거리며 침대를 뒹굴뒹굴하다 겨우 눈뜬 아침.
창밖에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지금이 몇 시인지, 며칠인지 감도 잘 잡히지 않았다.
그저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밖에.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거실로 향했고.
거실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김 실장이 올려둔 음식이 놓여 있었다.
이틀 전부터인가 김 실장은 초인종을 누르다 지쳐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서 간섭하거나 지쳐 있는 나를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음식은 잘 챙겨 먹는지, 아파서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 김 실장에게 고마운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와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다.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현재 내 상태가 누군가와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뿐.
1만 년의 기억이 차곡차곡 매일 머릿속에 박혔고.
하루에 1천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의 기억이 내 몸에 쏟아졌다.
-희성아, 네가 좋아하던 한인 타운에 갈비찜. 나도 생각나서 사와 봤어. 그냥 먹지 말고, 꼭 데워서 먹어.
김 실장은 음식이 담긴 봉투 위에 작은 쪽지를 붙여두었고.
그 메모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쯤 덜 뜬 눈으로 몸을 돌려 창문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보이는 ‘할리우드’라는 커다란 글자.
겨우 뜬 눈으로 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넋을 놓고 보았을까.
눈은 굉장히 탁해져 있었고, 내 시야에는 할리우드라는 글자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순간.
눈앞이 반짝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으윽….”
앞에 있는 난간에 손을 올려 떨리는 몸을 지탱했고.
흐리멍덩한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드디어 눈이 온전히 떠졌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이 풀린 다리 탓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드디어 다 자리를 잡았네.”
1만 년 내 과거의 기억이 고스란히 내 몸속에 들어왔고.
하루에 1천 년씩 무려 열흘간의 기간이 걸렸다.
말이 열흘이지, 쉴 새 없이.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열흘 동안 기억이 들어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니까.
아마 세상 그 누구도 이런 경험은 해보지 못했겠지.
그래서 내가 겪은 열흘간의 고통은 그 어떤 아픔과도 견줄 수가 없을 것이다.
열흘 전.
꿈속에서 보았던 지난 과거 10년이란 일상의 기억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기에.
하루에 1천 년이라는 기억이 들어오는 건.
가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시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거 1만 년의 기억.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생생히 떠올라.”
진희성의 몸으로 배우 생활을 하며, 가끔 과거의 꿈을 꾸었다.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선명했다.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1만 년의 기나긴, 입에 전부 담을 수도 없는 그 시간들이.
어제 겪은 것처럼, 아니 방금 겪은 것처럼 선명하다 못해 뚜렷했다.
지금 895번째 삶의 7년 다섯째 날에 무엇을 했느냐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던질 수 있었다.
감옥에서 2번째 방에 있는 죄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도록 막아섰다고.
끔찍한 죄를 저지른 그가 생을 마감하게 만들 수 없도록 막아낸 교도관이 나였다고 말이다.
528번째 삶에서 그 몸의 주인을 떠나던 날.
703번째 삶에서 그 몸의 주인을 만나던 날.
932번째 삶에서 2년 3개월 첫째 주 월요일.
이 모든 것들의 날짜만 떠올려도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기억을 몸속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느라, 내 몸이 남아날 틈이 없었지.
잠을 잘 틈도, 배가 고플 틈도.
그저 괴로움 속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그러다 지쳐 쓰려져 잠에 들었다가 깨고, 또다시 새로운 1천 년의 기억이 들어오고.
배고픔을 느낄 틈이 없었기에, 아마 김 실장이 없었다면.
이 열흘 동안 입에 물조차 넣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지옥 같았던 호텔 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뭐, 갑자기 기존의 호텔 방이 아름답고 호화스러워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예전에 내가 보던 방과 같아 보일 뿐.
“갈비찜… 이거 형이랑 먹을 때 좋았는데.”
서둘러 김 실장이 가져다준 갈비찜 봉지를 뜯었고.
그의 메모를 테이블에 붙여놓은 뒤, 뚜껑을 열던 갈비찜을 다시 봉인했다.
“그렇다고 입맛이 있거나 배가 고프지는 않네….”
모든 기억이 들어왔을 뿐, 아직 내게는 많은 고민에 당면해 있었다.
진희성으로서의 삶.
앞으로 1만 년 중에 내가 유일하게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다.
1만 년을 살아가는 벌은 10년이라는 주기로 돌아갔다.
어느 나라 사람으로, 어떤 성별로, 어떤 나이대로 갈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
딱 그 몸에서 10년.
10년이 되는 날, 가차 없이 나는 또 다른 이의 몸으로 옮겨졌다.
그런 삶이 시작되기 전, 나는 진희성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몸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여기서 살아갈 수가 있었다.
이후 진희성이 죽게 되면, 그때부터 나는 다시 10년의 반복을 시작하겠지만 말이다.
진희성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삶을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을 처음이자 마지막 육체였다.
그저 물이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가며, 진희성 몸에서의 자유를 보내기는 싫었다.
“해야 할 걸… 차분히 생각해보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로….”
내 몸을 쓰윽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서.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자.”
***
“아오, 배부르다.”
김 실장은 텅 빈 갈비찜 그릇을 옆으로 밀어냈다.
배가 불러오자 곧바로 진희성이 떠올랐는지 물로 음식을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희성이는 밥 먹었을라나. 자식, 걱정돼서 죽겠네.”
그때.
지이잉.
[발신인: 한시진 본부장님]
김 실장은 걸려온 전화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아무도 보지 않는 호텔 방.
하지만 그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휴대 전화를 들고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네, 본부장님.”
-어, 김 실장. 통화 가능하지?
“예, 그럼요.”
-그래, 진희성은 좀 어때?
“잘… 큰 이상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고?
“네, 몸이 조금 좋지 않은….”
한 본부장은 자신이 꺼낼 본론이 있는지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그래, 진희성은 김 실장이 잘 아니까, 옆에서 좀 잘 챙기고.
“예, 그러겠습니다.”
-그나저나 진희성 어떻게 해야 되냐?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약 말이야. 희성이 이제 계약 곧 끝나잖아.
“아… 재계약 말씀하시는 거죠?”
한 본부장은 혀를 끌끌 차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희성이가 김 실장한테는 별 이야기 안 해?
그의 물음에 김 실장은 한 본부장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지금 재계약이 중요한 게 아니라, 희성이가 걱정입니다요.’
하지만 통화로 진희성의 상태를 낱낱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김 실장 또한 어떻게 진희성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네, 계약 건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습니다.”
-김 실장 그럼 거기까지 뭐 하러 갔어. 간 김에 희성이한테 연락 오는 엔터는 없는지. 희성이 생각은 좀 어떤지 알아봐야 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희성이가 접촉한 회사는 없어?
“네, 전혀 없습니다.”
-자네 몰래 접촉하고 있는 거 아니고?
다그치듯 묻는 한 본부장의 말에 김 실장은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예, 없습니다.”
-확실해? 잘 감시해. 이러다가 잘 키워놓은 놈, 다른 회사에 빼앗기면 안 되잖아.
진희성의 상태나 감정 등은 안중에도 없는 한 본부장의 태도에 김 실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한 본부장님.”
-어, 말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희성이가 은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은퇴?
“네, 삶에 의욕이라는 게 없어 보입니다. 제가 LA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말 그대로입니다. 연예계 생활에 흥미를 잃은 건지, 아니면 그냥 여기에 정착을 하고 머무르려는 건지….”
그때.
지이잉.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그는 하던 말을 멈춘 채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다름 아닌 진희성에게서 온 문자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읽어 내려갔다.
-형, 나 한국 들어갈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김 실장이 한 본부장에게 소리쳤다.
“본부장님, 희성이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거봐. 옆에서 김 실장이 잘 다독이면 되잖아. 날짜 정해지면 바로 보고해. 이번에는 최대한 호화스럽게 공항에 세팅할 테니까.
“아니요. 차라리 조용하게 입국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왜, 한국에서도 지금 난리잖아. 영화도 잘되고, 왕의 귀환인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기자들도 쫙 깔고….
그의 말에도 김 실장은 단호하게 답했다.
“희성의 지금 상태를 보면, 차라리 기자들이 없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자칫해서 희성이 상태가 안 좋다는 기사라도 나면….”
-하긴, 그건 또 그러네.
“네, 그냥 조용히 입국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 그럼 애 좀 잘 달래서 재계약 이야기 좀 해보고.
“예, 날짜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한국 향기냐.”
김 실장은 웃으며 내게 말했고.
“그러게.”
“희성이 너는 한국 진짜 오랜만이라 오히려 낯설겠다. 그렇지?”
그의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오랜 시간 미국에 머물렀던 만큼.
커다란 캐리어가 천천히 수하물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짐을 바라보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혹시 나 한국 들어오는 일정이 기자들한테 퍼졌어?”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회사에 이야기해 뒀어. 너 오랜만에 한국 들어오는데, 괜히 공항에 인파 깔리면 힘들잖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고맙긴.”
그는 내 어깨를 팔로 툭 치며 말했고.
입국장 근처로 향하며 혹시 모를 기자들을 대비해 모자를 푹 눌러썼다.
피폐해져 있는 내 얼굴이 기사에 실릴까 걱정이 되는 것보다, 그저 북적거리며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게 피곤했다.
아직 내 몸 상태가 예전처럼 온전치는 않았으니까.
그저 빨리 도착해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내가 모자를 꾹 눌러쓰자,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걱정 마. 회사에 잘 이야기해 둬서 우리 입국, 아무도 몰라. 나가자.”
“응.”
입국장 문이 스르르 열리자, 걱정과는 달리 김 실장의 말처럼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으면 차 가지고 앞으로 올게.”
“아니야. 같이 가자.”
“그럴래? 주차장 입구에 주차해 두기는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차로 향했다.
잠시 뒤, 차에 올라탄 우리.
“희성아,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응.”
차는 곧장 공항을 벗어났고, 도로에 올라타자 차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김 실장은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어디가 아팠는지, 왜 그랬는지.
그리고 갑자기 한국에 오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배려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차.
마침 신호에 걸린 것을 확인하고,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내 부름에 그는 다소 놀란 듯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응, 희성아.”
순간 룸 미러를 통해 시선이 부딪쳤고.
덤덤한 얼굴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연기 그만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