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55화 (255/303)

255화 #46 - 선택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시 시작한 1만 년의 삶.

그리고 ‘진희성’의 몸으로 살게 된 삶.

그날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흐르고 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지옥 같은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정도로 힘겨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지난 1만 년의 기억이 한 번에 들어온 날 이후.

그 기억은 떠나지 않고 내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그리고 매일, 매분 매초 이 기억들은 현생을 살아가는 나를 괴롭혔다.

머릿속에는 새로운 기억이 찰 수도 없을 만큼 꽉 찬 느낌이 들었고.

두통으로 느껴지는 통증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아악….”

조금만 생각에 잠기더라도 머리는 지끈지끈하게 아려왔다.

내가 걱정돼 찾아왔던 김 실장.

그를 만났던 그날 이후로 나는 아직 한 걸음도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저 호텔 방 안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뿐.

대체 며칠이나 지났을까.

딩동-

호텔 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딩동-

“희성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나는 문밖에서 들리는 김 실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나가.”

오늘도 빠지지 않고 찾아온 그.

문을 열자 김 실장이 방긋 웃으며 내게 투명 비닐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은 한식이야.”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배 안 고픈데.”

“꼭 배가 고파야만 밥을 먹냐?”

김 실장은 내 뒤로 보이는 방을 빼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 이거 안 받으면, 나 들어가서 같이 먹는다?”

오늘도 같은 멘트.

그의 말에 나는 서둘러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낚아챘다.

“알겠어. 먹을게.”

“진작 그럴 것이지.”

김 실장은 미션이라도 성공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제 준 건 다 먹었어?”

“응, 형도 얼른 가서 밥 먹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으려던 그때.

턱-

김 실장이 발로 문을 막아서며 말했다.

“희성아.”

그의 부름에 나는 흐릿한 동공을 겨우 떠냈고.

“응.”

김 실장은 여전히 발로 막아선 채 읊조렸다.

“너… 벌써 일주일째야. 나 LA 안 왔으면, 너 그냥 밥도 안 먹고 호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었을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시선을 떨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 손에 쥐어진 밥.

김 실장이 꼬박꼬박 내게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이 밥들을 배가 고파서 먹은 적은 없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뭐라고.

그의 간절한 부탁과 염원으로 어쩔 수 없이 먹은 거나 다름없었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그런 신체적 변화를 느낄 틈도 없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냥 지옥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도.

며칠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고통 속에서 허덕일 뿐.

이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피폐하게 살기 위해 윤회를 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괴로움을 여전히 겪는 건, 1만 년이라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한 번에 쏟아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통고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나 역시 간절했다.

“희성아,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김 실장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아악….”

그의 작은 터치 하나에 또다시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미안.”

김 실장은 놀란 듯 손을 떼어냈고.

“형, 미안해. 나 피곤해서, 조금만 쉴게.”

“알겠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휴대 전화도 이제는 좀 켜고.”

“응.”

방으로 들어와 그가 준 음식이 담긴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곧장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제야 저 멀리 보이는 휴대 전화.

언제부터 소파 아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는지, 전원이 꺼졌는지.

한숨을 내쉬며 휴대 전화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

한편, 같은 시각.

휴대 전화를 손에 꼭 쥔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와아… 진짜로 연락 안 한다고?”

송유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그녀는 털썩 침대에 앉았고,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휘이 저었다.

“자, 차분하게 생각 좀 해보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송유나가 한국에서 직접 LA까지 날아와 고백을 했다 이거야.”

송유나의 어깨가 한층 올라갔다.

“먼저 고백에 키… 스까지 했잖아.”

그 당시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눈을 연신 깜빡였다.

“어쨌든. 그래서 진희성이 다시 날 방으로 불러서 갑자기 확 안았고.”

송유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여기까지가 팩트잖아. 대체 뭐가 문제지?”

그녀의 깊은 한숨이 공기를 데웠고.

“아직도 연락 한 통이 없다는 게 말이 돼?”

곧장 옷장으로 걸어가 겉옷을 걸치며 거울 앞에 섰다.

툴툴대며 거울로 얼굴 상태를 확인하더니.

“잠깐 가 있으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그럼 그게 먼저 연락하겠다는 뜻 아니었어? 더 이상은 못 참아.”

언제라도 당장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송유나의 옷과 겉옷, 가방은 모두 한쪽에 세팅되어 있었다.

그녀는 미리 정리해 둔 가방을 걸치고, 신발을 신은 뒤.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 앞에서 모습을 점검했다.

“만나서 온갖 욕이라도 다 해줄 거야, 진희성….”

한 시간가량이 지난 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이 호텔.

“여기, 낮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많구나?”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일주일 전, 밤을 회상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흠흠.”

어느새 진희성의 호텔 방 문 앞에 선 그녀.

목을 가다듬자마자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딩동-

“뭐야, 왜 아무런 반응이 없어?”

송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초인종을 눌러댔다.

딩동, 딩동-

여러 차례 초인종이 울리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걸음.

진희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 송유나는 구겨진 겉옷을 손으로 툭툭 털며 자세를 잡았다.

벌컥.

문이 열리자마자 송유나는 진희성의 얼굴을 보며 소리쳤다.

“대체 왜 연락을 안 해요!”

그녀는 평온한 자세를 취한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고.

진희성은 화들짝 놀라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러 온 김 실장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 유나 씨.”

“아니, 가 있으라면서요. 근데 왜 연락을 안 하냐구요.”

송유나의 다그침에 진희성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예요? 대체 이유가….”

진희성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연락을 못 했어요. 진짜 미안해요.”

그의 말에 송유나는 일그러졌던 얼굴을 풀었고, 그제야 진희성의 모습을 눈에 담아냈다.

‘이제 보니 안색도 안 좋고, 그사이에 살도 빠진 거 같은데?’

송유나는 진희성을 빠르게 훑으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진희성의 모습은 며칠 내내 아픈 사람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뭐… 죽이라도 사다 줄까요?”

그녀는 급격히 온순해진 목소리로 물었고.

진희성은 피하고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 옮겨왔다.

“아니요. 김 실장님이 사다 주셨어요.”

“어디가, 왜 아픈 건데요. 병원은 갔어요?”

걱정 가득한 송유나의 말에도 진희성은 그저 무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아… 알았어요.”

분명 따지러 온 송유나였지만.

어느새 그녀는 한층 낮아진 데시벨로 대답하고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진희성이 아무런 대화도 이어가지 않자, 송유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 이제 한국 가려고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송유나의 말에 진희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시큰둥한 그의 태도에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곁눈질로 진희성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국 오면 연락해요. 나 오래 기다리는 건 잘 못하니까.”

진희성의 시선은 송유나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호텔 로비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어우, 괘씸해.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심드렁하게 대할 일이야?”

송유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애꿎은 바닥 카펫을 걷어찼다.

“방에 들어오라고도 하지도 않고. 애초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는 로비에서 진희성이 있을 높은 곳.

천장을 쏘아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아프다니까 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있어야지….”

홱 고개를 돌려 호텔을 빠져나가려던 송유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이 있었으니.

프런트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김 실장이었다.

“어, 저 사람 김 실장님 아닌가?”

늘 진희성의 옆에서 함께하는 매니저이기에, 서로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는 사이였다.

김 실장은 프런트에서 호텔 직원을 향해 열변을 토하듯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방 청소할 때, 제가 말한 거 잘 좀 체크해 주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는 손짓을 동원해 직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김 실장의 표정에서는 진희성에 대한 불안함과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네, 신경 써서 청소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일 생기면, 여기 제 방이니까. 여기로 연락주세요.”

김 실장이 직원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는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어? 유나 씨.”

뒤를 돌자 로비에는 송유나가 자신을 흘긋거리며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 실장이 반갑게 송유나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만나네요. 유나 씨가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머쓱한 듯 뒷목을 주무르며 시선을 회피했다.

“저… 잠깐 뭐 좀 보러….”

김 실장은 굳이 그 답을 상세하게 묻지 않았고.

쓰읍,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저랑 잠깐 커피 한 잔, 하실 수 있어요?”

“저랑요?”

“네,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송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예, 뭐. 그래요.”

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작은 카페.

그들은 서로 마주 앉아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하아….”

김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고.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송유나에게 물었다.

“유나 씨, 희성이는 괜찮던가요?”

“네, 뭐… 아프다고는 하는데….”

송유나는 얼떨결에 자신이 진희성을 만났다는 사실을 토로했고.

그럼에도 김 실장은 전혀 놀란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호텔에 송유나가 왔다는 건, 당연히 둘이 만났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더군다나 진희성의 호텔 이름과 호실을 알려준 것 역시 김 실장이었다.

진희성이 홀로 묵는 호텔의 호실까지 아는 사람은 김 실장뿐이었으니까.

그녀의 매니저를 통해 김 실장에게 진희성의 행방을 물었지만.

사실 김 실장은 알 수밖에 없었다.

진희성과 송유나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을.

오히려 모를 수가 없었지.

“희성이 때문에 걱정이 너무 많아요. 밥은 매일 챙겨주고는 있는데, 어디가 아픈지. 왜 저렇게 방에만 있는 건지….”

그의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아까 보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김 실장님이 챙겨주는 밥. 그건 다 먹기는 하는 거래요?”

“그래서 호텔에서 청소하고 나온 쓰레기도 가끔 로비에서 보는데, 먹는 거 같긴 한데….”

김 실장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표정 못지않게 송유나의 얼굴에도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연기 생활도 걱정인데, 그것보다 희성이 몸이 망가질까 봐.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 도와주든가 할 텐데 말입니다.”

김 실장의 말에 그녀는 진희성의 상태가 더욱 심각함을 깨달았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 실장님한테도 말 안 하는 거 보면,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송유나는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떨궜고.

김 실장이 그런 그녀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유나 씨.”

“네?”

“혹시 조금 전에 희성이 만날 때, 어디 이상한 거 없었어요?”

김 실장의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눈동자를 굴리며 진희성을 떠올렸지만, 딱히 그에게 전달해 줄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음… 몸이 안 좋다고 했고. 그래서 살이 빠져서 핼쑥한 것밖에….”

김 실장은 그녀의 말에 집중했지만,

진희성에게서 달라진 점을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자, 자신이 단어로 운을 뗐다.

“그래요? 희성이의 눈이 좀….”

그의 말에 송유나가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요. 희성 씨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다크 서클이 진짜 진해졌어요. 그거 진해지면 다음에 메이크업 때 힘든데….”

송유나는 자신의 다크 서클을 손으로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김 실장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아… 다크 서클. 맞아요, 심해졌죠.”

그는 황급히 커피를 들이켜며 진희성을 걱정하는 송유나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희성이 눈빛… 변한 거 눈치 못 챈 건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둘 관계가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송유나와 시선이 마주쳤고.

김 실장은 화제를 돌리듯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유나 씨는 한국에 언제 가세요?”

“아, 저는 곧 가려고 하는데. 희성 씨는 여전히 이야기 없는 거죠?”

둘은 한참 동안이나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반짝이던 진희성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버렸지만.

송유나는 당연히 변화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진희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변해 버린 눈빛은….

2송유나와 함께 있을 때 본래의 눈빛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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