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46 - 선택 (3)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고.
날카로운 그 음성은 내 몸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내 얼굴과 다리.
하물며 손끝과 발까지 그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몸.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신에 대한 원망?
그런 원망 따윈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에야 신을 탓하며 힘들어했지.
그렇게 신에 대해 불평하며 내 인생을 보내기는 싫었으니까.
그저 주어진 대로 1만 년의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선택뿐이다.
쉽사리 이야기하기도 힘든 긴 시간.
1만 년의 시간 벼랑 끝에 선 내게 주어진 선택권은 ‘죽음’과 ‘윤회’.
이 두 가지의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이곳.
깜깜함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신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신은 내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귀를 세우는 듯 느껴졌다.
“내 선택은….”
사실 나는 이 선택의 순간까지도 오고 싶지 않았다.
12시, 자정이 되면 죽음과 윤회 중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리라 알고 있었지.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엄청난 양의 수면제를 말이지.
선택의 기로에 서기 전, 수면제로 삶을 깔끔하게 마감하고 싶었다.
내게 이런 벌을 내렸던 신과의 독대도.
나를 흔들게 만들려는 뭣 같은 선택의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그냥 이 시간이 오기 전, 편안하게 눈을 감아 스스로 생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지.
지금 여기서 내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떠한 방식의 고통을 느끼거나, 혹은 편안하게 눈을 감아 무(無)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윤회’를 선택한다면.
지금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진희성으로서의 삶을 끝까지 산 후.
다시 1만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1만 년의 삶을 살아온 것을 알게 된 후.
이 지옥 같은 벌을 받았다는 걸 알고 난 뒤, 매일 고통스러운 꿈을 꾸었다.
그래서 1만 년의 과거가 내 머릿속을 뒤죽박죽 어지럽히고 있었고.
그 기억들은 꿈에서 보았던 것들을 토대로 뜨문뜨문 생각이 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 한 번 더 윤회를 선택한다면, 이제부턴 평생의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 선택의 순간도.
진희성으로서 삶의 사소한 모든 순간도.
그리고 앞서 살아온 1만 년의 방대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즉, 더욱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아갈 거라는 뜻이지.
광대한 그 기억의 파도에 휩쓸려 사는 고통의 삶은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유나의 곁에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있고 싶었다.
“나는… 다시 살 것이다.”
신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고.
내게 벌을 준 신은 오히려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윤회를 선택하겠다는 말이냐.”
“그렇다. 나는 죽음이 아닌, 윤회를 택하겠다.”
“진심으로 그걸 선택할 셈인 것이냐?”
어쩌면 신의 반응은 당연했다.
1만 년을 살아간다는 게, 그가 내게 내린 벌이었고.
벌을 모두 받은 후, 또다시 제 발로 그 벌을 택하겠다는 거니까.
나는 눈을 부릅뜨며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의 형벌에 나는 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벌을 받겠다며 강하게 외치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신을 향해 나는 입가를 길게 찢었다.
“아니, 이건 벌이 아닌 내게 축복이다.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기나긴 생.”
“어리석은 놈.”
신은 그런 나를 호탕하게 비웃기라도 하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짙은 어둠 속에서 나를 짓누르기라도 하는지 몸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네놈이 선택한 윤회. 좋다, 너는 1만 년의 기억을 아주 생생하게 들고 돌아갈 것이다.”
***
팟-!
눈을 뜨자 보이는 천장.
황급히 눈을 감았다 뜨며 내가 누워 있는 이곳을 확인했다.
흐릿한 조명.
어두컴컴한 듯한 주변과 익숙한 향기가 나는 곳.
여기는 내가 머물던 호텔 거실이었다.
침대가 아닌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내 몸뚱어리.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정각.
선택의 기로에 섰던 그 시간이었다.
똑딱, 똑딱-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 몸과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변한 건 없는지, 이상은 없었는지.
그때.
12시 1분으로 분침이 하나 움직이는 순간.
지끈-
머릿속에 묵직한 기운이 한 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어떠한 고통인지, 왜 시작되는 것인지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무려 1만 년.
그동안 한 번의 꿈을 꿀 때마다 10년짜리의 인생을 살았던 그 시절을 보았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그 시절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내게 들어왔고.
그 고통에 몸부림치며 매일매일 피폐해져만 갔다.
하루에 10년씩의 기억이 들어온다는 건,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 잔인한 벌에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갔으니까.
그 죽을 듯한 고통 속에서 살던 나였기에.
윤회를 선택해 1만 년의 기억을 받는다 해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지옥 같은 하루를 버텨가며 살아간 지도 벌써 꽤 됐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지금 내게 느껴지는 1만 년의 기억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려 1천 배의 시간이었으니까.
“하악, 하악….”
점차 호흡이 무거워지고, 빠르게 기억이 들어오며 숨이 턱하고 막혔다.
단순한 몸살을 넘어서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손발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으악!”
외마디 비명은 내 의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몸부림 같은 것.
부르르 떨리는 내 몸조차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가 없었고.
몸이 천근만근이 되더니, 이내 그대로 뒤로 젖혀졌다.
살기 위해 달달 떨리는 팔을 뻗어 어딘가에 지탱하려 했고.
그 손끝에 닿은 테이블.
타앗-
테이블 위에 있던 수면제가 담긴 약통과 봉지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와르르.
그 주변에 있던 자그마한 식기류와 서류들 역시 허공에 흩뿌려졌고.
모든 게 쏟아지고 망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 무엇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내 몸까지도.
털썩.
테이블 옆에 있던 의자에 내 몸을 기댔고.
순간.
무엇에 씐 듯 몸을 젖혔다.
고개는 하늘 끝까지 들렸고, 척추는 이렇게 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꼿꼿하게 세워졌다.
눈의 검은 동자는 뒤집힌 지 오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떡 벌어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술까지.
“으아아아악!”
아직도 남은 방대한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기억들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몸부림칠 뿐이었다.
“아아아악…!”
눈은 점점 더 뒤집혔고, 의자 위에 간신히 올리고 있는 내 몸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움직임을 내며 흔들렸다.
잠시 뒤.
순식간에 고요해진 호텔 방 안.
진희성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 있었고.
그의 눈빛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차디찬 기운이 돌고 있었다.
***
“희성아, 정말 괜찮은 거지?”
김 실장은 넋을 놓은 듯한 진희성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켜냈다.
“…어.”
진희성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고.
축 늘어진 팔을 테이블에 올려 자신의 머리를 지탱 중이었다.
김 실장이 바닥에 널린 수면제와 갖가지 물건들을 빠르게 살피며 물었다.
“정말 수면제는 안 먹은 거 맞고?”
그의 물음에 진희성은 눈을 깜빡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김 실장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에 힘이 빠져 테이블에 기대며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나는 너 무슨 일 있나 싶어서 한국에서 진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한국에서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도.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이 넘게 날아올 때도.
호텔까지 와서 진희성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김 실장은 단 1초도 잠에 들지 못했고, 등을 의자에 편히 기댄 적도 없었다.
단지 진희성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흩어진 수면제를 보면서도 감사함을 느꼈다.
“하아… 진짜 다행이야.”
미동조차 없는 진희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진희성의 팔과 다리를 만지기 시작했고.
재빨리 진희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성이 너….”
분명 옆으로 엎드려 있는 진희성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김 실장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넋이 나간 진희성의 얼굴.
초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한 그의 눈빛.
살짝 벌어진 입.
확실했다. 진희성의 상태가 변했다는 게 말이다.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희성의 얼굴에 집중했다.
특히 눈.
진희성의 눈은 원래 생기가 넘치다 못해 흐를 정도였다.
카메라에 담겨 연기를 하는 배우였고, 그런 그의 눈빛은 안방 시청자들에게까지 전달됐으니까.
시청자들은 항상 진희성의 눈빛에 매료되고, 감탄을 쏟아냈지.
최근 작품인 ‘더 빌런’.
악마를 연상시키는 그 배역을 소화하면서 진희성의 눈빛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가끔 김 실장이 진희성의 눈빛을 보며 흠칫할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 눈빛은 그때와는 조금도 견줄 수가 없었다.
“형.”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김 실장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고.
“어?”
“나 혼자 있고 싶은데.”
“아… 그래. 피곤할 텐데, 쉬어야지.”
김 실장은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어 정신을 차렸고.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담긴 다량의 수면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 실장은 몸을 숙여 수면제를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넘어질라. 내가 바닥에 이것만 치우고 얼른 나갈게.”
“그냥 놔둬도 돼.”
진희성이 그를 말릴 새도 없이 김 실장은 빠르게 수면제를 쓸어 담았고.
“이거 어차피 더러워져서 못 먹잖아. 내가 그냥 가지고 나가서 버릴게.”
김 실장은 애써 미소 지으며 봉투를 얼굴 옆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래.”
“얼른 푹 쉬어.”
그는 봉투를 꽉 쥐고 진희성의 방을 순식간에 눈으로 훑으며 빠져나왔다.
그리고 진희성의 호텔 방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약 20시간 만에 편히 앉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쫙 풀린 그는 자신의 호텔 방을 잡기도 전, 호텔 복도 벽에 몸을 의지했고.
지금까지 있었던 과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희성이가 무사해서 다행이기는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곤 고개를 쓰윽 돌려 굳게 닫힌 진희성의 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진희성의 낯선 눈빛.
“초점 없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살기가 어린 것 같기도 하고.”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 무서울 정도인데….”
그는 온통 진희성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를 가득 메웠고.
한참이 지나고 난 후에야 툭툭 털고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며 호텔 로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