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46 - 선택 (2)
깜빡, 깜빡-
건너편에 문을 닫은 한 식당의 간판 불이 깜빡이며 그녀의 눈을 괴롭혔다.
“아, 눈 아파.”
송유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고, 이내 건물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송유나는 몇십 분째 이곳에 멈춰 서 있었다.
진희성이 머무는 호텔.
“아… 나 원래 고백하려고 간 건 아닌데….”
그녀는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로 어깨를 들썩였다.
조금 전 진희성의 호텔 방 안에서의 그 고백과 입맞춤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연락을 두절해 버린 진희성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에 이곳까지 왔던 것이지.
물론 그 분노와 답답함 깊숙이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깔려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진희성에게 내뱉었던 고백을 떠올리며 몸을 움찔 떨었다.
“생각할수록 황당해. 진희성도 아니고, 내가 먼저 고백한다는 게 말이 돼?”
송유나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틀었고.
“내가 수많은 고백은 받아봤어도 이렇게 이야기한 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쓰윽 둘러보며 읊조렸다.
“처음이란 말이야….”
그러고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 스스로가 놀랐는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송유나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치며 소리쳤다.
“내가 진희성이랑 입맞… 아, 몰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아 등을 기댄 채,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는 모습.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는 듯했다.
“미쳤어, 미쳤어….”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볼은 점점 더 발갛게 상기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르르 번졌고.
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녀는 순간 얼굴의 미소를 지워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근데 진희성은 진짜 내 마음을 아주 조금도 몰랐던 거야?”
송유나가 마음을 고백하고 나서 자신의 입술을 진희성의 입술에 포개던 순간.
진희성의 눈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
그런 진희성의 태도에 송유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나 송유나가 고백했다는 게 놀라울 수는 있지. 근데 그렇게까지 가만히 있을 일인가?”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 삿대질하듯 손을 휘저었다.
“뭐… 고백해줘서 고맙다는 둥, 하물며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던가. 그렇게 멍하니 얼어붙어 있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진희성의 모습에 송유나는 입술을 떼어내고 황급히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디도 가지 않은 채, 몇십 분째 이 호텔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진희성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시 올라가?”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텔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내 휘이 손을 가로저으며 다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아니야. 이제 대답은 진희성이 해야지.”
송유나는 팔짱 낀 팔을 쪼그려 앉은 자신의 다리에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몰라. 이제 나는 할 말 다 했어.”
단호하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녀의 발길은 호텔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휘이-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고.
송유나는 그 소리에 고개를 빼꼼 돌렸다.
휘이-
다시 들려오는 휘파람, 그건 분명 그녀를 향해 부는 소리였다.
180이 넘는 커다란 키.
듬직한 덩치의 남성이 눈썹을 들썩이며 송유나의 시선을 끌었고.
“헤이, 혼자 있어요?”
그는 저 멀리서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길이라도 잃어버린 건가?”
자정이 다가오는 어둑한 밤.
호텔 주변에는 드문드문 불이 켜진 간판들밖에는 없었고.
송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툴툴 털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답했다.
“나?”
미국인 남성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귀여운 너.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라면….”
덩치가 큰 남성이 다가옴에도 송유나는 움찔거리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길 잘 아니까, 갈 길이나 가.”
자신이 다가감에도 놀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남성은 입꼬리를 올렸고.
더욱 귀엽다는 듯이 송유나에게로 다가갔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어두운 밤 함께 보내자.”
그는 어느새 송유나의 앞까지 다가섰고.
느끼함이 뚝뚝 흐르는 듯한 눈빛과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집 침대가 아주 푹신하거든.”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던 송유나의 표정은 곧장 일그러졌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뒤.
자신보다 한참 큰 키의 남성의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소리쳤다.
“이런 미친, XX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나한테 들이대. 개XX가 어디서 침대 타령이야?”
남성은 처음 들어보는 한국 욕에 놀란 듯 턱을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고개를 삐딱하게 젖힌 채 말을 이어갔다.
“지금 내가 미국까지 와서 고백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네가 뭔데 흐름을 끊고 난리야!”
눈을 희번덕거리는 송유나를 본 남성이 뒷걸음치듯 발을 주춤거렸고.
“오… 뭐라는 거야….”
작게 읊조리자 송유나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외쳤다.
“나 지금 너랑 영어로 노닥거리면서 시간 보낼 기분 아니니까, 당장 꺼져.”
송유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잔뜩 찡그려진 얼굴로 나지막하게 그에게 말했다.
“꺼지라고.”
영어가 아닌 한국말에도 남성은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주춤거렸고.
송유나는 턱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이런 확…!”
그녀는 고개를 쓰윽 돌려 호텔 로비를 바라보았고.
송유나의 시선을 본 남성은 양손을 뻗어 그녀를 진정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큰 덩치의 남성이 자리를 떠나자, 송유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깜짝 놀랐네….”
덩치로만 볼 땐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남성임에도 송유나가 소리칠 수 있었던 건.
바로 옆에 보이는 호텔 로비의 직원들 때문이었다.
남성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터치를 한다면, 그녀는 힘껏 비명을 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을 테니까.
그렇게 대차게 그에게 맞서 대응한 뒤, 송유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내 호텔로 돌아갈까….”
그녀는 휴대 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듯 읊조렸다.
“벌써 11시 30분인데, 이제 가야겠….”
순간.
송유나의 손에 들린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고.
그녀는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호텔을 쓰윽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가려 하는 걸 보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딱 맞춰서 전화를 해?”
송유나는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막아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곧장 수신 버튼을 눌렀고.
“여보세요?”
-유나 씨.
“네, 말해요.”
-어디에요?
진희성의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왜요?”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래요, 그럼.”
-지금 어디까지 갔어요?
진희성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직 호텔 1층에 있고, 홀로 30분째 그 자리에서 머물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모르겠어요. 아무튼, 제가 다시 거기로 갈게요.”
송유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 들킬세라 황급히 몸을 건물 벽으로 당기듯 움직였다.
그러곤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발그레해진 두 뺨.
“뭐야… 얼굴은 왜 이렇게 뜨거워.”
송유나는 가방 속을 뒤적여 거울을 꺼내 들고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작은 거울 안에 담긴 그녀의 얼굴.
머리가 헝클어지지는 않았는지.
마스카라는 번지지 않았는지, 입술 립스틱의 색은 남아 있는지를 단숨에 확인했다.
그제야 호텔 로비로 향하는 그녀.
당차게 걸어가는 그녀였지만, 그 걸음에서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후우….”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
송유나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분히 심호흡을 내뱉었고.
불규칙한 두근거림을 눈치채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떨 거 없어. 그냥 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고 오려는 거니까.”
홀로 탄 엘리베이터.
그녀는 자꾸만 스스로를 다독이듯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진희성이 머무는 층에 멈춰 서자, 애써 차분하게 눌러둔 심장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진희성에게 가까워질수록 송유나의 호흡도 점점 더 가빠지고 있었다.
“…다 왔다.”
문 앞에 멈춰 서자 그녀는 양손을 가슴팍에 얹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것보다 천천히 숨을 내뱉고.
언제 긴장했냐는 듯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장착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벌컥-
초인종의 벨이 울리기도 전에 세차게 열리는 문.
송유나는 눈앞에서 급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진희성이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문을 그렇게 갑자기 열면….”
진희성을 향해 외치던 송유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송유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
놀란 듯 양손을 허벅지 옆에 꼿꼿이 붙이고 있는 송유나와는 달리.
진희성은 기다렸다는 듯 송유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눈을 껌뻑이며 진희성 품속에 있던 송유나는 정신을 차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따지듯 묻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어투는 온순하기 짝이 없었고.
껴안은 진희성을 밀어내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진희성이 송유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고.
양팔로 그녀를 더더욱 와락 끌어안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유나 씨, 이대로 잠깐만 있어 줘요.”
송유나는 진희성의 말에 아무 대답도, 움직임도 없이 몸을 맡겼고.
진희성의 표정은 세상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을까….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진희성이 천천히 눈을 떴고.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시계를 확인하고 나서야 송유나의 품에서 벗어났다.
품에서 멀어지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송유나가 물었다.
“희성 씨.”
진희성이 그런 송유나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미안해요. 저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는 끝내 그녀와 맞춘 시선을 피했고.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진희성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고.
송유나는 제자리에 서서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라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왜 다시 올라오라고 한 거예요?”
진희성은 이를 꽉 물고 할 말이 많지만 참는 듯 보였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옆방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잠깐만 저쪽에서 쉬고 있을래요?”
“돼, 됐거든요? 날 쉬운 여자로 보나 본데, 나 그런 스타일 아니거든요?”
송유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눈을 흘기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호텔 로비로 나온 송유나는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뭐야, 대체.”
급히 택시를 탄 그녀는 자신이 잡아둔 호텔로 향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달리는 창문을 바라보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게 아니라 조금 전 진희성과 포옹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고.
송유나는 허공에 손을 휘이 저으며 소리쳤다.
“왜 자꾸 떠오르는 거야!”
그녀는 머릿속을 가득 메운 진희성의 모습에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꾹꾹 눌러 식혀냈다.
***
11시 55분.
송유나가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겼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송유나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불과 5분.
5분 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거니까.
그녀에게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내가 사라지는지, 얼마만큼의 고통을 한 번에 느껴내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만큼은 그 어떤 고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몸을 기대었고.
56분.
조금 전 느꼈던 그녀의 따스한 품.
온화하던 송유나의 얼굴.
맑은 그녀의 눈동자와 나를 바라보던 시선까지.
그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고스란히 느끼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져왔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까.
다시 한번 더 송유나에 대한 감정을 떠올리며 가슴에 새기던 순간.
57분.
58분.
59분.
속절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간을 붙잡으려 해봤지만, 흐르는 시간은 단 1초도 잡히지를 않았다.
똑딱, 똑딱.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고.
12시.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는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온 세상이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내 몸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마비가 되듯 굳어가고 있었고.
머릿속에 매서운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진희성, 네가 선택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