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46 - 선택 (1)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김 실장의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안내 음성.
그는 곧장 휴대 전화의 키패드를 열어 버튼을 꾹 눌렀다.
삐-.
짧은 안내 음이 들려오자, 그는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희성아, 나야.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배터리가 다 된 건지, 전화도 계속 꺼져 있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거 듣자마자 나한테 바로 전화 좀 줘.”
그는 음성 메시지를 남긴 후에야 휴대 전화를 덮었고.
이내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희성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냥 쉬느라 휴대 전화 안 본 걸 거야.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애써 부정하듯 진희성과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그의 모습.
하지만 이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자꾸만 떠오르는 진희성의 ‘유언장’.
진희성은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별생각 없이 적었다고 했지만,
그는 그 유언장이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유언장이라는 게 누구든 심심풀이로 적을 만큼 간단하고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설마….”
순간 불안감이 김 실장의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갑작스레 불어오는 싸한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 실장이 다시 휴대 전화를 들어 진희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여전히 그의 전화기는 전원이 꺼진 채로 있었고.
그는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며 있을 수가 없었다.
김 실장에게 있어 진희성은 담당 연예인, 그 이상이었으니까.
“…안 돼.”
애써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책상 아래 첫 번째 서랍.
그 깊숙이에 들어 있는 여권과 몇 개의 서류.
그리고 언제 쓰일지 몰라 미리 챙겨둔 물건이 담긴 파우치를 가방에 서둘러 담았다.
몇 시간 뒤.
김 실장은 가장 빨리 출발하는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의 눈은 어느새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LA에 도착했을 때 몇 시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일분일초라도 진희성에게 다급히 가야 한다는 마음만이 앞서 있었다.
“손님, 음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상냥한 승무원의 말에도 그는 넋을 놓은 채 고개만을 휘저었다.
그의 엄지손톱은 불안감을 극도로 내보이듯 입가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토독, 토독-
매끈하던 손톱 끝은 어느새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치아 자국이 나 있었고.
김 실장의 입에서는 계속 불안감이 가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희성이 별일 없어야 하는데……. 그래, 별일 없을 거야. 그냥 쉬느라 그렇겠지.”
그는 한숨을 삼켜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도착했는데 침대에 널브러져 잠만 자고 있으면 이 자식……. 아니지, 차라리 술을 잔뜩 퍼마시고 잠자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김 실장은 비행하는 내내 쪽잠은커녕, 초조함을 가득 담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LA 공항 앞.
김 실장은 10시간이 넘는 비행에 찌뿌듯한 몸을 풀기도 전에.
공항을 미친 듯이 달려 나와 입구에 멈춰 서 있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에 적힌 주소를 택시 기사에게 내밀며 소리쳤다.
“여기로… 여기로 가주세요.”
김 실장의 다급한 얼굴이 택시 기사에게까지 전달됐는지, 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이내 택시는 빠르게 공항을 벗어났고.
김 실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지도 않고 달리는 차 앞 유리를 바라보았다.
미국은 아직 해가 뜨기도 전.
어스름한 새벽 공기가 휘이 감싸고 있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택시는 교통 체증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김 실장은 초조한 모습으로 택시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제가 너무 급한 일이라, 조금 더 빨리 가주실 수 있나요?”
아직 유창하지 않은 영어 실력.
어쩌면 그런 회화 실력이 김 실장의 다급함을 설명했을지도 모르겠다.
택시 기사는 룸 미러를 통해 김 실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오케이.”
택시 기사는 액셀에 올리고 있던 발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차는 한 번 덜컹거리며 움찔하더니, 이내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김 실장의 엄지손톱은 그의 입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
미국의 밤거리를 즐길 새는 단 1초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차.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끼이익-
차는 한 호텔 입구에 멈춰 섰고.
김 실장은 빠르게 도착해 준 택시 기사에게 나온 금액 이상의 달러를 내밀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빠르게 호텔을 향해 내달렸다.
호텔 엘리베이터가 해당 층을 향해 오르는 동안, 김 실장의 심장은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고.
그의 조마조마한 마음 때문에 심장 소리는 귓가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진희성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달려온 시간은 꼬박 20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김 실장의 몰골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한 층, 한 층을 오를 때마다 김 실장의 숨소리는 점점 더 가빠졌다.
“하아… 하아….”
그는 엘리베이터 문에 코가 닿을 듯.
문이 열리면 바로 뛰쳐나가기 위해 가까이 몸이 다가가 있었고.
띵-
도착과 동시에 다급하게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진희성이 있는 호실로 달려갔다.
그는 호실이 맞는 것을 확인한 뒤,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딩동-
몇 차례 초인종을 눌러봤지만, 호텔 방 안에서는 그 어떤 반응도 들리지 않았고.
김 실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 전화를 꺼내 진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진희성의 휴대 전화는 꺼진 상태였고.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문을 두드렸다.
쾅쾅-
“희성아, 희성아!”
불끈 쥔 주먹으로 문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진희성, 문 좀 열어봐. 희성아.”
아침이 밝지도 않은 새벽.
김 실장에게 지금은 시간과 주변 사람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친 사람처럼 넋을 놓은 채 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희성아, 진희성!”
안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들릴까 싶어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호실 안에서는 아주 작은 기척도, 움직임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김 실장은 자신의 옆에 내려둔 가방을 복도에 우르르 쏟아냈다.
무언가를 가득 담아온 가방.
그 안에 있던 서류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복도에 널브러졌고.
김 실장은 손으로 물건을 밀어내며 무언가를 급히 찾았다.
“…찾았다.”
그가 헐레벌떡 찾던 것은, 진희성의 호텔 룸 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 시상식 때, 현지 매니저를 통해 받아둔 비상 키.
그 키 카드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가져다 댔다.
드르륵-
드디어 열린 문.
김 실장의 숨소리는 점점 더 헐떡였고.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문 채 급히 호텔 문을 벌컥 열었다.
“희성아!”
진희성을 애타게 부르며 들어간 호텔 방.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거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앉아 몸에 힘이 쫙 풀린 채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진희성의 모습이 보였다.
김 실장은 그런 진희성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그에게 소리쳤다.
“희성아, 밖에서 이렇게 소리치는데 왜 대답도 없어?”
그는 진희성이 호텔 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가량 참아온 안도의 숨이 길게 내쉬어졌고.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한껏 올라가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진희성에게 다가갔다.
“나는 너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그때.
김 실장의 발에 밟히는 무언가.
“이게 대체….”
그의 발 아래.
그러니까 진희성이 널브러진 테이블 아래에 쏟아져 있는 수많은 알약.
그걸 보는 순간, 김 실장의 눈을 튀어나올 듯 커졌고.
그 약이 무슨 약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수면제든 감기약이든 그 어떤 약이든, 이토록 많은 약을 삼켰다면, 진희성이 멀쩡하지는 않을 터.
김 실장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희성아… 희성아?”
흔들리는 동공으로 조심스레 그의 몸을 터치하며 얼굴로 시선을 옮겼고, 진희성의 뜬 눈과 눈이 마주쳤다.
김 실장은 그 마주친 눈에 놀라기는커녕, 긴장이 잔뜩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그의 말에도 진희성은 넋을 놓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김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희성아, 너 설마 이 약들… 먹은 거 아니지?”
가만가만 그에게 묻자, 진희성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응.”
짧은 한마디.
김 실장은 그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진희성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딘가 싸한 눈빛.
김 실장은 바닥의 약들을 내려다보며 진희성에게 물었다.
“그럼 이 약들은 대체 뭐야, 혹시 수면제야?”
“잠이 안 와서 하나 먹으려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그의 답에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래?”
“응.”
“정말 그런 거지?”
김 실장이 몸을 숙여 진희성과 눈을 맞추고 재차 물었다.
“설마… 뭐 어떻게 하려고… 수면제 먹으려고 한 건 아니지?”
진희성은 쓰윽 시선을 돌리며 읊조렸다.
“아니야.”
그가 돌린 시선 끝에 들어온 하늘.
이제야 LA의 어스름했던 하늘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
몇 시간 전, 자정을 앞둔 시간.
나는 손에 약을 꼭 쥔 채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10분.
길었던 1만 년의 마지막, 이제는 고작 50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죽으면… 윤회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나는 그저 무(無)로 돌아가겠지.
“내가 굳이 살아가야 할 목표… 꿈, 그리고 희망도 없네.”
솔직히 살아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오스카상.
얼마 전 시상식에서 받지 못했던 그 상.
그 상을 못 받은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그 상은 애초에 내가 받고 싶었던 것, 내 꿈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있는 이 몸의 주인인 ‘진희성’의 꿈이었던 것이지.
그래서 아주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내가 애초에 진희성이 아니었기에 살짝 아쉬운 것, 그 정도가 전부일 뿐이다.
1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생에서 정말 모든 걸 다 해봤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바라는 것도, 꿈도, 목표도 없을 수밖에.
정말 상상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다 겪어 봤으니까.
나는 수면제를 꽉 쥐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딱 하나 남은 게 있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작게 읊조렸다.
“…미련.”
아니, 이런 감정을 미련이라고 보는 게 과연 맞을까?
미련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건, ‘송유나’였다.
내가 힘든 고통 속에서 살 때, 유일하게 그녀와 입맞춤을 하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고통이 사라졌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되었었다.
내가 1만 년이라는 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백만 일, 수천만 시간을 보내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기나긴 세월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한 건, 오직 송유나.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그녀와 입맞춤을 한 순간, 깨닫게 된 것이지.
송유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선택하자면, 1만 년을 윤회, 한 번 더 다시 이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렇게 윤회를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선택이지.
나는 송유나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눈을 감자 머릿속에는 온통 송유나의 얼굴로 가득했고.
나는 결국, 약을 내려놓은 채 휴대 전화를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