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45 – 1만 년의 삶 (6)
“…유나 씨?”
내 부름에도 문 앞에 서서 잔뜩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는 그녀.
“유나 씨가 어떻게 여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숨이 멎는 듯했다.
생을 끝내기 불과 몇 시간 전.
그리고 이 긴 생을 끝낸다고 마음을 먹은 후, 가장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바로 송유나였다.
부모님과 김 실장, 그리고 최서빈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직접 연락을 하고 만나 끝맺음을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마저도 쌍방이 아닌, 나 홀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내가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송유나였다.
그녀를 향한 오랜 시간의 아련함이었을까?
아니, 이제 와 정확히 내 마음을 돌아보자면….
송유나를 향한 내 마음은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움….
애틋함… 이런 단어들로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그녀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리는 이 느낌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멀리했던 것 같다.
어차피 생을 마감하고 나면 볼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괜히 그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들어 놓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나 홀로 일방적인 것일지는 몰라도.
떠나는 길에 괜히 송유나에게 마음을 표하고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지.
그럼에도 한 번만 송유나의 얼굴을 보고 가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 타이밍에 나타난 송유나라니.
나는 대답 없이 서 있는 그녀를 미간에 힘을 주고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 꿈은 아닐 테고….’
한숨을 삼키며 송유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결코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니었다.
송유나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나 씨가 갑자기 여기….”
그녀는 내 말과는 상관없이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네?”
송유나의 호통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고.
그녀는 가슴과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몸을 크게 움직이며 데시벨을 높였다.
“대체 한국도 안 오고, LA에서 뭘 하고 있길래 연락이… 아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이나 연락이 안 될 수가 있냐고요.”
“…….”
그녀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을 망설였다.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1만 년의 생을 끝내기 위해 당신과 멀어지는 중이었다?
괜히 연락을 했다가 당신이 그리워질까 봐 일부러 피하는 중이었다?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 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도, 한다고 해도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입을 꾹 다문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리우드에서 잘나간다고 이제 한국 추억은 끝이다, 뭐 이거예요?”
송유나의 격분한 표정과 말투.
내게 화를 내고 싶어 찾아온 것인지,
그리움에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결국 피하던 시선을 돌려 송유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사래를 치며 빠르게 답했다.
“아니에요. 잘나가서 연락을 안 한 것도… 그리고 추억을 버린 것도….”
“근데 왜 그렇게 세상이랑 등을 진 것처럼 아무 활동도 안 하고.”
송유나는 몰아치듯 말하며 숨을 헐떡였고,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활동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왜 LA에만 있는 건데요. 한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 안 해요?”
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나는 서둘러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유나 씨, 진정하고….”
“놔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래도 우선 안으로 들어와서 얘기해요.”
호텔 로비가 울리도록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걱정이 앞섰다.
혹여나 다른 투숙객이 나와 항의를 할세라.
더군다나 영상이라도 찍혀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면, 금세 그녀와 내 모습은 한국에 쫙 퍼지고 말 터.
서둘러 송유나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며 방문을 닫았다.
“안 들어가요. 내가 왜 희성 씨 방에 가야 해요?”
“알겠어요. 안 들어와도 되니까, 우리 여기서 이야기해요.”
팽팽한 대립 상황에 처한 듯.
호텔 문을 등진 송유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치한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진 상황에 조금 차분해진 듯 보였고.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나 씨, 그래서 LA는 언제 온 거예요?”
내 물음에 그녀는 다시 화를 삭이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왜 LA까지 와서 희성 씨를 봐야 해요?”
“네?”
“대체 내가 왜…. 희성 씨가 뭐라고 내가 여기까지 와야 하냐고요. 나를 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요!”
송유나는 감정이 점차 격해지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저번에 할리우드에서 나랑 같이 시간도 보내고, 한국 와서 같이 밥도 먹고 만났잖아요.”
“…그랬죠.”
“그러고 나서 연락하기로 했잖아요. 우리가 무슨 관계라는 건 아닌데… 그래도 직장 동료끼리, 같은 회사 식구끼리 안부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죠.”
“근데 나랑 그냥 친분을 쌓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어요?”
재차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송유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면 저번에 났던 스캔들 때문이에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송유나의 긴 한숨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맺힌 듯 보였다.
촉촉해진 두 눈.
그 눈을 바라보자 나는 가슴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싫은 거예요?”
송유나의 말에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
자존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송유나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당황케 만들었다.
내가 아는 송유나는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
내가 뭐라고, 그녀가 LA까지 찾아와 내 앞에서 화를 내고,
이렇게 눈물까지 고이는 거지?
당황스러움을 넘어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품에 와락 안고 싶었다.
그냥 송유나를 다독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안함이 가득했지만, 그 와중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던 내 마음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러나 섣불리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 2시간 정도가 흐르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존재가 될 테니까.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끝까지 악역이 되어야만 했다.
지금의 감정에 충실해 그녀를 품에 안고 미안하다고 말한들, 나는 다시 그녀의 앞에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일 테니까….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송유나는 하늘을 응시했고,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대체 왜 나를 피하는 건데요. 내가 싫은 것도… 아니라면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내듯 말했다.
“유나 씨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벽을 힐긋거리듯 바라보니, 시간은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 고통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 생각했다.
이 괴로움은 오늘 눈을 뜰 때부터, 송유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점점 증폭되고 있었으니까.
12시.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점차 다가올수록 두통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괴로움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써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유나 씨, 근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LA에 있는 건, 뭐 이제 많이 알고는 있지만. 이 호텔에, 이 호실에 있는 건 대체….”
송유나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어 내 입을 막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이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희성 씨.”
“네?”
“내가… 몇 달이나 연락도 안 되고, 나를 피하는 것 같은 희성 씨를 왜 여기까지 보러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가 아니라… 왜 왔는지. 그게 중요한 거 아닌가?”
송유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게 쏟아낸 후.
눈을 스르르 감고 어깨를 높이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러네요. 제가 연락이 안 돼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정말?”
내 말에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가 자꾸 생각나서요.”
“…네?”
“자꾸만 생각난다고요. 집에만 있어도, 현장에서 바쁘게 있어도 희성 씨가 자꾸만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아요. 근데 연락은 받지도 않고….”
“…….”
송유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입술을 꾹 닫고 말았다.
그녀가 향하는 마음 역시 나와 같았고.
하지만 우리 사이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남은 시간을 떠올리며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러니까 진짜 미칠 것 같잖아요. 희성 씨가 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피하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찾아오게 만드는 건데…!”
송유나는 자신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꺼내며 내게 전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을 진실하게 전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남은 시간을 떠올리면 한숨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누구보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차마 걱정스러운 마음을 표출할 수는 없는 터.
그렇다고 그녀의 고백을 단숨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갑자기 송유나의 고백과 함께 물밀듯이 밀려오는 고통.
‘으윽….’
있는 힘껏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고, 내 앞에 서 있는 송유나를 바라보는 가슴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지.
괴로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고.
순간.
앞에 서 있던 송유나의 얼굴이 내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는 눈을 스르륵 감은 채 내 얼굴로 점점 더 빠르게 밀착했다.
“…….”
송유나는 자신에 고백에 내 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포개었다.
내 입술에 송유나의 입술이 부딪쳤고.
……!
그녀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극심한 고통이 사라졌다.
송유나의 고백과 그녀를 향한 내 마음으로 아려오던 가슴.
1만 년의 긴 생을 끝내기 위해 12시가 다가올수록 깨질 듯한 두통.
이 모든 고통이 그녀와의 입맞춤과 동시에 단숨에 사라졌고.
기나긴 1만 년의 모든 기억에 헤매며 아팠던 머리.
그 기억들은 고통이 아니라, 예쁘게 포장되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듯했다.
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지금,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감정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나는 송유나와 입을 맞춘 채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고.
타앗-!
송유나는 빠르게 내 입에 맞추고 있던 입술을 떼어내며, 한 걸음 뒤로 발을 물렸다.
그러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연신 깜빡였고.
언제 대담했냐는 듯 뒤돌아 문을 열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송유나를 입 밖으로 부르지 못했다.
조금 전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나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
밤 11시.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1만 년의 생 중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유난히 길고 길었다.”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누워 하루를 차분히 곱씹었다.
눈을 떴던 이른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살, 추억이 깃든 장소들과 북적거리던 LA의 도심.
그리고… 몇십 분 전 보았던 내가 그리워하던 송유나까지도.
내가 차분히 떠올려야 할 것들은 오늘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기나긴 삶도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진희성의 몸으로 살아가며 함께한 많은 이들도 있었지.
하지만 한 명 한 명, 그리고 모든 순간들을 따스하게 포장하고, 생을 마감하기에는 내게 남은 건 1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이제는 정말 선택해야 했다.
“선택의 기로….”
한숨과 함께 침대 옆 머리맡에 두었던 수면제가 가득 담긴 봉투를 꺼냈고.
수면제를 모두 꺼내 손에 탈탈 털어 담았다.
“이 수면제를 모두 먹으면… 이제 드디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삶을 마감하려는 이 순간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터져 나왔다.
똑딱똑딱-.
고요한 호텔 방 안.
미리 정리를 해둔 텅 빈 방 안이라 그런지, 유독 시계 초침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손안에 가득한 수면제.
한입에 털어 넣으려 수면제를 꽉 쥐고 있는 이 순간, 나는 빠르게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지옥 같은 인간 세상에서 더 살아가며 1만 년을 반복할지.
아니면 1만 년의 윤회를 마감하고, 인간 세상에서 사라질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또 생각했지만.
마지막 1시간을 남겨두자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수면제를 꽉 쥔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이제 결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