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45 – 1만 년의 삶 (5)
이른 새벽.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
평소보다 훨씬 이른 아침이지만, 절로 눈이 떠졌다.
길고 긴 1만 년의 시간 중 마지막 날.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든달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생에 더 남아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좋은 일도, 행복한 적도 많았지만.
이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점점 더 내 생은 불행해지고 괴로워지기만 했으니까.
호텔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자,
드높은 하늘에 나는 절로 한숨이 쏟아졌다.
“하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맑기만 하네.”
너무나 맑은 하늘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요!”
사실, 오늘 같은 날에는 신이 비라도 내려줄지 알았다.
내가 세상을 끝낸다는 것에 애도나 슬픔의 표시를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우울함의 극치를 달릴 수 있도록, 생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장대비를 내려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
그래서 그 비를 바라보며 내 기분은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쨍하게 맑은, 그리고 평소보다 더 화창하고 좋은 날씨에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뭉게구름을 바라보았고.
내 기분도 지금 이 하늘처럼 꽤나 평온하고 차분해졌다.
오늘이 생에 마지막이 아닐 것처럼.
아니,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편안함일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좋다고… 내가 생에 미련을 갖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한곳에만 서 있었다.
몇 시간 뒤.
방 안으로 들어와 이곳에서 지내며 널브러졌던 짐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옷장에 널려 있는 수많은 옷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으면, 옷이 이렇게 많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옷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재로 향했고, 커다란 책상 위에 올려둔 할리우드에서의 대본.
영화 ‘더 빌런’의 대본은 작품이 끝난 후에도 몇 차례나 다시 읽었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몰입했던 작품.
어쩌면 생에 마지막이라 그렇게까지 초인적인 힘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도 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대본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긴 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보고 가는 것 같네.”
대본 옆에 놓인 두꺼운 노트.
이건 그동안 뒤숭숭하고 복잡한 마음에 수도 없이 내 마음을 적었던 일기장이다.
여기에는 내가 1만 년이라는 시간, 그 벌에 대해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득 적힌 곳도 있었고.
이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 힘들었던 순간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일기장은 아무도 보게 해서는 안 돼. 내 1만 년의 혼란함이 모두 적혀 있으니까….”
나는 서둘러 일기장을 챙겼고.
그 옆에 놓인 낙서 종이도 함께 챙겼다.
내 이전의 생, 과거에서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어쩌면 이번 생에서 내가 마음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는 한 사람.
송유나에 대한 마음을 끼적거린 종이였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아련함인지, 애틋함인지.
혹여나 이 마음이 사랑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좋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슬프다는 감정까지도.
송유나에 대한 내 복잡한 마음이 적힌 낙서 같은 종이를 함께 일기장에 끼웠고.
이것들은 내가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짐을 하나씩 정리하니, 마음이 점점 더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짐이 사라지니까, 삶도 정리되는 것 같네.”
몇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을 비우고 주변을 청소하며,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다.
***
아주 일찍 일어난 탓에 몇 시간 동안 이곳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여전히 해는 하늘에 높이 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참나… 생을 끝내는 날에도 배는 고픈가 보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저 호텔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그래도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1만 년이나 세상에 살면서, 진짜 마지막으로 만찬은 즐기고 가자. 뭘 먹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민했고.
LA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생각보다 한정적이었다.
한국이라면 분명 고민도 없이 집밥.
어머니의 밥을 먹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가장 따스하고 행복한 한 끼일 테니까.
하지만 LA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식사는 한국식 돼지갈비였다.
할리우드에서 촬영을 하며 힘든 날, 김 실장과 자주 갔던 돼지갈비 집.
그곳에 홀로 가본 적은 없지만.
자주 생각나는 식당이었다.
그 식당에 가면 함께 가던 김 실장이 떠오를까 봐, 혼자 찾아가지를 않았지.
하지만 오늘은 꼭 그곳에 가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김 실장이 떠올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를 떠올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 날, 이 순간에 김 실장을 떠올리고 싶었다.
나와 가장 많은, 그리고 오랜 추억이 쌓인 그였으니까.
자신의 가족처럼, 어쩌면 자신의 몸처럼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김 실장이었다.
그와의 추억이 가득한 돼지갈비 식당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한국식 돼지갈비 집.
김 실장과의 추억,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고픔을 느끼는 내 배를 채우러 도착했다.
하지만 굶주린 배와는 달리, 내 입맛은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씹고 싶지도 않았지.
돼지갈비의 달달한 향이 코에 맴돌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젓가락질이 빠르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는 먹지 못할 이 세상의 음식인데, 그래도 먹어는 봐야지.”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불판 위 돼지갈비를 하나 집었고.
꾸역꾸역,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럼에도 많이 남은 음식들.
도저히 더 넘길 수 없었고, 나는 결국 식당을 빠져나왔다.
“배가 고파도 음식이 넘어가지를 않네.”
식당에서 나와 호텔로 향하기 전, 내가 발길을 옮긴 곳은 할리우드 번화가였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LA에 머물면서도 이곳에는 할리우드에 첫발을 들였던 그날.
벅찬 마음으로 구경을 온 이후에 단 한 번도 다시 찾지를 않았다.
무(無)로 돌아갈 건데, 구경을 해서 뭐 하고 눈에 담아 뭐 하나 싶어 호텔에만 있던 나날들.
하지만 막상 마지막, 세상에서 사라지려는 날이 되자 괜스레 밖으로 나서고 싶었다.
그래도 하나하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아가고 싶었다.
북적이는 할리우드 거리.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행복함을 펼치듯 웃으며 여행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가 스르륵 번져왔다.
“하아… 이제 이런 모습도 정말 끝이네.”
입꼬리를 올리고는 있지만, 마음은 점점 더 아려왔다.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정말 마지막이 다가오니, 이 순간들이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
어둑해지는 하늘.
LA에 깊은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고.
그 말은 즉, 내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구나.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생에 마지막 순간….”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으니,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야지.”
시끌벅적한 거리.
서로 행복함을 표출하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포옹하며 사랑에 대해 속삭이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이제 무(無)로 돌아가 고통스러움을 잊어야지.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말이야….”
번화가를 벗어나, 조금은 더 이 밤을 느끼고 싶었기에.
택시가 아닌 도보로 터덜터덜 호텔로 향했다.
그런 내 손에는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이 안에는 다량의 수면제가 담긴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마저도 고통스럽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감으면… 다시 뜨지 못하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싶었지.
그렇게 몇 시간을 힘없이 걷다 도착한 호텔.
호텔 안은 새로 입실한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아침에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도록 모든 짐을 정리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호텔.
턱-.
다량의 수면제가 담긴 봉지를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8시 50분.
“하아… 진짜 끝이 보이네….”
사람들과 마주하며 생을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살짝 들었지만.
호텔에 홀로 앉아 적막함을 느끼며 다시금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지금 수면제를 먹을까?”
내게 남은 시간은 4시간이 채 남지 않았고.
지금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든다고 하면, 비로소 생은 끝이 날 것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1만 년의 삶.
그리고 그 기나긴 삶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몸을 담았던 이 ‘진희성’이라는 인간.
“그래도 꽤 행복한 순간들이었어….”
진희성으로 살며 느꼈던 생각과 기분들.
그 기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고, 하나하나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번져왔다.
“이 삶은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네. 나를 사랑해주는 부모님부터 김 실장, 그리고 많은 팬들.”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송유나까지.”
갑자기 차오르는 송유나의 생각에 눈을 번쩍 떠버렸다.
아려오는 가슴.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며 슬픔과 애틋함으로 눈을 감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는 조금이라도 편안히.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으니까.
“마음을 좀 차분히 진정시키고, 그리고 수면제를 먹어야겠어.”
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았고.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저 1만 년의 긴 벌을 받았고, 이제 벌이 끝났다고만 생각하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큰 괴로움 속에 작은 행복들도 존재했으니 말이야….”
***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정리를 마친 후.
시간을 바라보니,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가도 되겠어. 굳이 마지막 날을 꽉 채울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커다란 컵에 물을 한가득 담았고.
그 컵 옆에 있던 수면제가 잔뜩 담긴 봉지를 들고 침대로 향했다.
“…잘 지냈다.”
물을 한 모금 벌컥 마셨고.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제 정말 가도 되겠어….”
순간 눈앞에 부모님과 팬들, 김 실장, 최서빈과 수많은 지인들이 떠올랐고.
한 손 가득 담긴 수면제를 차마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하아….”
그들을 생각하니 먹먹해진 가슴.
순간 떠오르는 ‘송유나’의 얼굴.
그녀를 생각하자 시야가 흐릿해져 왔다.
“결국, 마지막으로 송유나도 못 보고 가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흐릿해진 시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약해져서는 안 돼.”
그럼에도 마지막을 맞이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다시 지옥의 순간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니까.
그냥 지옥에서 겨우 생명을 연장해가는 일일 뿐이니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마음을 다잡았고.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수면제를 입에 가져대려는 그때.
딩동-.
“뭐야?”
호텔의 초인종이 울리자, 나는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딩동.
딩동, 딩동-.
계속해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고.
내가 대답이 없자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호텔을 울리기 시작했다.
쾅쾅-.
쾅쾅쾅!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문 두드림 소리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하아… 이 시간에 갑자기 누가 찾아온 거야.”
내 마지막 순간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를 떠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누구세요.”
타악-.
찌푸려진 얼굴로 문손잡이를 잡아 홱 열었고.
그 앞에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유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