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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48화 (248/303)

248화 #45 – 1만 년의 삶 (3)

끝내 받지 않는 전화에 김 실장은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둘러 날짜와 시간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아카데미 시상식 준비하느라 못 받는 건가?”

그는 미국 현지 시간을 확인하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말이야….”

김 실장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고.

서둘러 다른 전화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는데 김 실장이 한국인 이유.

미국 현지 매니저에게 진희성의 일일 매니저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김 실장이 진희성에게 하루를 위해서라도 가도 충분했지만, 진희성은 그에게 재차 거절을 했다.

무슨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을 위해 번거롭게 오지 말라는 진희성이 내뱉은 강조의 말에 차마 미국으로 향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

그는 현지 매니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희성이 지금 연락이 안 되는데, 옆에 잘 있는지 시상식 준비하고 있는 건지 답변 보내주세요.

현지 매니저에게 문자를 보낸 김 실장은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유언 공증을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일단… 여기에 나온 변호사님부터 당장 찾아가 봐야겠는데?”

그의 불안함을 감싸는 ‘유언’.

상상치도 못한 단어에 김 실장은 자꾸만 마음이 졸여왔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춘 채 서둘러 진희성 담당 변호인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한 진희성에게 붙어 있던 현지 매니저는 한국에서 보내온 김 실장의 연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준비 잘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안부를 묻는 것 같은 질문은?”

그의 중얼거림에 진희성이 입을 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이제 곧 입장하실 겁니다.”

“네.”

현지 매니저는 의자에 기대 멍하니 있는 진희성을 보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김 실장에게 답변을 보내기 시작했다.

***

대기실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린 지 벌써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라, 초청을 받았지만.

무조건 참석을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수상을 하든 하지 않든, 참석하는 건 내 자유였지.

그래서 며칠 동안 참석 여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몸.

그런 와중에 시상식에 참석해 웃으며 사람들과 만나고, 카메라에 비친다는 게 내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받는 것.

그건 당연히 내 오랜 꿈이자 상상에 그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지금 이 상황에 올 줄은 몰랐지.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김 실장에게 전달하려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사라진다면, 사라지게 될 몸이라면.

내 꿈 정도는 이루고 가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배우를 하며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이건 꿈을 넘어 그저 머릿속에서나 행복하게 그리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입장하실게요.”

스태프의 안내에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린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대기실을 나섰다.

길게 깔린 레드 카펫.

한국에서 몇 번이나 갔던 연기 대상과는 스케일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전 세계에서 참석한 수많은 기자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보던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도 보였고.

취재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앞에 선 내 몸까지 달아오르는 듯했다.

찰칵, 찰칵-.

팟-!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환호.

한국에서 온 배우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함성과 박수를 받는다는 게 가슴이 너무 벅차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얼마 만에 짓는 미소인지 나조차 기억나지를 않았다.

억지로 미소 짓기 시작했지만, 이내 나를 환호해주는 사람들을 향해 기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게 이거였지. 내가 그토록 꿈꾸던 배우의 최종 목적지. 오스카상을 타는 것도 있었으니까.’

웃으며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내 꿈…?

그러고 보니, 그 꿈은 누구의 꿈인 거지?

배우를 하던 진희성….

내가 진희성의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몸의 주인이 꾸던 꿈인가?

아니면 내 영혼이 꾸던 꿈이 배우인가?

진희성이 나인지, 진희성의 육체가 따로 있는 것인지.

이제는 모든 게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꿈을 이룬 건.

진희성의 육체와 1만 년을 살아온 내 마지막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

자리에 앉아 시상식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현장은 한국 시상식 대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엄숙하거나 긴장된 무드가 아닌, 마치 곧 파티의 시작을 알릴 것만 같은 화합의 장.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굳이 나서서 여러 배우에게 다가가 사교적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의지와 기운도 없었지.

그저 시상식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내가 이 시상식에 온 건, 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보다는.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을 이뤘다는 성취감이 가득했으니까.

앞에 놓인 생수를 들이켜며,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시작했으면 좋겠네.”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

그런 분주한 관중 사이에 홀로 고독한 인물로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희성!”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사람.

내 첫 할리우드 작품인 ‘9월 11일’에서 주연을 맡았던 리암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마치 무장 해제라도 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리암.”

내 인사에 그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고.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거 소식 들었어요. 너무너무 축하해요.”

그의 말에 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할리우드에 왔을 때 나를 가장 싫어하고 증오했던 사람.

동양인 비하를 일삼았던 그가 이제는 나를 응원해주는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이제는 그와 친분이 두터워졌기에, 그의 응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고마워요, 리암.”

그와 손을 마주 잡고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악수로 풀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무리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이야… 우리 한국 최고의 배우 진희성.”

“희성 씨, 이게 얼마 만이에요.”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들.

이들도 할리우드에서 만났던 ‘9월 11일’ 작품의 배우들이었다.

브루노와 찰스는 나와 인사를 나누고, 옆에 있는 리암과도 반갑게 대화를 나눴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그들 또한 오랜만에 만나는지 회포를 나눴고.

나는 그들의 북적거림에 끼지 않고,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곁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희성 씨, 오늘 수상 소감은 준비했어요?”

브루노의 말에 찰스도 보태듯 내게 말했다.

“맞아요. 나는 희성 씨가 상 받자마자 달려 나가서 꽉 안아줄 거예요. 하하.”

“오케이. 그럼 희성 씨, 상 받으면 내 이름 ‘리암’도 외쳐줄 수 있나? 하하하.”

그들의 대화에 나는 그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냥 참석에 의의를 둔 거지. 상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내 말에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 이번에 ‘더 빌런’ 연기 장난 아니었잖아요.”

“그럼. 올해 완벽하게 흥행한 작품인데, 희성 씨가 아니면 대체 누가 오스카상을 받겠어요.”

그들은 나보다 더 흥분한 상태로 말을 주고받았고.

나는 그저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브루노는 내 어깨에 손을 슬며시 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희성 씨, 무슨 일 있어요?”

브루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요?”

“긴장해서 그런 건가, 오늘 평소와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모습이에요.”

예전 작품을 찍을 때도 늘 나를 예의 주시하던 브루노였기에.

오늘 내 달라진 모습에 놀라고 걱정이 가득한 듯 보였다.

“아니에요. 평소랑 크게 다른 건 없는데….”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썹을 늘어뜨린 채 답했다.

“텐션이 너무 낮은데… 오늘 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희성 씨인데.”

브루노의 말에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런가 봐요.”

내 말이 끝나자 찰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흔들며 나를 향해 말했다.

“제가 열심히 응원할게요, 희성 씨 힘내요!”

“네, 고마워요.”

리암은 시끌벅적한 이 테이블에서 브루노와 찰스를 손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 무리하지 말고. 우리는 저쪽에서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컨디션 조절 잘하고, 이따가 상 받으면 다시 축하해주러 올게요.”

리암은 그들을 손으로 밀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시상식이 시작되고.

한참 시간이 흘러 시상식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꽃이자 마지막인 ‘남우 주연상’.

그 후보에 오른 사람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 올랐고.

내가 이 후보들 사이에서 수상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점점 더 들기 시작했다.

4명 중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배우를 꼽으라면 단번에 말할 수가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오랜 시간 동안 탑을 찍고 있는 연로한 에런.

그의 경력을 꼽으라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런 에런이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를 응원했다.

에런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할리우드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배우니까.

두 번째는 작년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한 배우 도미닉이다.

그는 30대의 나이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배우였고.

연기력에 대해서는 박수를 받지만,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를 떠올렸을 때.

단번에 생각나 연호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배우였지.

그리고 세 번째는 감독들과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그레디 배우.

그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꾸준한 연기력과 좋은 작품에 출연해, 항상 대중들의 사랑보다는 관계자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였다.

그래서 그레디가 이 후보에 오른 것 또한 사람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던 부분이지.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후보인 나, 진희성.

이 중 유일한 동양인이자, 올해부터 할리우드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물론 올해의 인기는 충분했다.

‘9월 11일’에서 펼쳤던 연기로 할리우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얼마 전 막을 내린 ‘더 빌런’은 북미 박스 오피스에 오랫동안 1위를 기록했지.

그리고 미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내가 이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찾아온 마지막 순서.

사람들은 바로 발표를 앞둔 올해의 남우 주연상 후보들에게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와아!”

“꺄아…!”

사람들의 환호에 내 심장은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작년 남우 주연상 수상자인 배우가 미소를 지으며 발표를 뜸 들이고 있었다.

“빨리요!”

관객들을 포함한 배우들은 장난스런 야유를 보냈고.

그는 나와 나머지 후보들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여유로움으로 시상을 긴박하게 조여왔다.

“자, 그럼 이제 정말 발표하겠습니다.”

두구두구-.

무대에는 웅장한 BGM이 울려 퍼졌고.

이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무대 위 마이크를 쥐고 있는 배우의 입을 주목했다.

“올해 아카데미 오스카, 남우 주연상을 차지할 배우는….”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이내 내가 아닌, 다른 배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축하합니다, 도미닉 배우!”

도미닉 배우가 호명되자, 그는 감격스러움과 함께 눈물을 머금었다.

“오마이갓….”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무대로 향했고.

나는 그를 향해 손뼉을 부딪쳤다.

물론 내가 상을 받지 못하게 된 건, 당연히 아쉬웠다.

후보까지 올랐지만, 눈앞에서 다른 이가 상을 받았다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렇지만 단연컨대 후회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쳤고.

내가 보여주었던 말과 표정, 눈빛.

그 모든 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도미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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