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47화 (247/303)

247화 #45 – 1만 년의 삶 (2)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 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내내 믿기지 않았다.

김 실장과 통화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넋을 놓은 채 깊은 생각에만 잠겼다.

“내가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하고 싶은 일은 다 했다….”

배우의 삶을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건, 연기로 정점을 찍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모든 배우를 통틀어 내가 최고의 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연기로써 하나씩 상을 받으며 인정받았다고 자부했다.

신인상부터 인기상, 남우 주연상까지.

이후 한국 배우라면 진출하고 싶어 하는 할리우드에도 진출했고.

더 나아가 할리우드에서 주연의 역할을 맡으며 입지를 굳혀갔다.

이쯤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이 생에서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진희성의 몸으로 살면서 배우로 많은 것을 해냈으니 말이지.

하지만 갑자기 이 끝자락에 찾아온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시상식… 가는 게 나한테 의미가 있을까…?”

사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지만.

상을 받는 건, 앞으로의 배우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배우로서의 삶을 끝내는 내가.

아니, 1만 년의 긴 생을 마감하는 내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가는 경험이 중요할까?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상식도 시상식이지만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건, 비단 배우라는 직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릴 내 인생.

그리고 남은 이들을 떠올리면 계속해서 속상함만이 남을 뿐.

아직 김 실장에게 확답을 던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민만 하며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낮잠인지, 밤잠인지도 모를 암흑 같은 호텔에서 잠을 청한 뒤.

“하아… 하아….”

오늘도 어김없이 꾼 악몽에 땀을 주륵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짜 힘들다….”

이제는 잠에서 깨자마자 하는 일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곧장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힘에 겨워 눈을 뜨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으니까.

샤워를 하며 겨우 정신을 차리자, 애석하게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왔다.

“그래도 이제 이런 지옥 같은 악몽… 조금만 더 버티면 꾸지 않을 수 있겠지?”

이제는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앞으로 무(無)로 돌아간다면 이런 힘든 일은 겪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한참 전부터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떠나면 남은 이들이 슬퍼할세라 걱정하고, 나 역시 그들을 그리워할 것 같아 비통했지만.

어쩌면 나 역시 서둘러 1만 년의 삶이 끝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만이 내가 행복, 아니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마치 그날을 기다리듯 손꼽아 마지막을 기다렸다.

괴로움에서 몸부림치는 건…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해 뜬눈으로 생활하고 있어도 피로감은 점점 더 누적되었다.

당연했다.

사람은 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해야 하는데, 몇 달째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로지 ‘잠’만을 잔 적이 없었으니.

퀭해진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때.

지이잉.

휴대 전화의 알람이 울렸고.

눈썹을 들썩이며 화면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

LA에 와서 휴대 전화를 새로 개통한 뒤, 모르는 번호로부터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애초에 이 번호를 알려준 사람은 김 실장과 부모님, 데이빗 감독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단 네 명에게만 연락이 오는 휴대 전화였지, 단 한 번도 새로운 번호에서 실수라도 전화가 걸려온 적은 없었다.

“누구지?”

전화를 받아볼까 했지만.

김 실장의 전화도 일부러 피하는 나였기에,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굳이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떤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일까가 궁금했을 뿐.

이내 진동은 허공에 흩어지고, 다시 빈 휴대 전화가 검은 화면을 드러냈다.

잠시 뒤 다시 울리기 시작한 휴대 전화.

또다시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방금 걸려왔던 번호.

번호 뒷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번호… 왜 조금 낯익은 것 같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받을 생각은 없었고.

다시금 전화는 끊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휴대 전화를 엎은 채, 생각을 전환시켰고.

그때.

딩동-.

호텔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

룸서비스를 시킨 적도, 청소를 부탁한 적도 없는 방.

갑작스레 울린 초인종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달력을 바라보며 쓰읍, 소리를 냈다.

“체크아웃 날짜는 아직도 멀었는데, 무슨 일이지?”

전화와는 달리, 이 초인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방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지.

조심스레 출입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마치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희성아!”

“어?”

내 이름을 부르는 한국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진희성,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서빈 선배님이 여기에 왜….”

내게 지금껏 전화를 걸었던 사람도.

LA 호텔, 문 앞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도 모두 최서빈이었다.

너무 뜬금없는 그의 등장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

“선배님, 여기에 대체 왜 계신 거예요?”

내 말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너 대체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거야?”

“저는… 혼자 좀 쉬고 싶어서…. 그나저나 선배님은 여기에 어떻게 오신 거예요, 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LA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영화가 그렇게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는데도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고 있으니.

쉬쉬한다고 해도 금방 이야기가 퍼진 듯했다.

하지만 지금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건, 가족과 김 실장 외에는 알지 못했다.

굳이 내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 주소를 김 실장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가 너 좀 만나고 싶어서 찾아냈지.”

최서빈은 김 실장을 통해 내 호텔 주소와 호실을 알아낸 모양.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셨구나. 정말 저만 만나러 오신 거예요, 선배님?”

“그럼.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술도 한잔하고 싶어서.”

최서빈의 스케일에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네, 그럼 나가실까요? 저도 근처에서 술을 많이 마셔보지는 못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우리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고.

나 역시 LA 번화가에 나오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

호텔 근처의 작은 바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의 앞에 술 한 잔씩을 내려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은 언제 들어오려고?”

“아직 모르겠습니다.”

“너 이번 작품 완전 대박 났잖아. 지금 한국에서 희성이 네 몸값 장난 아닐 텐데, 왜 안 들어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값….

내가 배우 생활을 시작하며, 아니 어쩌면 1만 년의 생을 살며 지금이 가장 비싼 몸값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몸값을 위해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시기였지.

“음… 그렇긴 하지만 조금 쉬고 싶어서요.”

“그럴 수 있지. 내가 희성이 널 알게 된 후로 넌 한 번도 쉰 적이 없었으니까.”

챙-.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고.

최서빈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성아.”

“네, 선배님.”

“나 솔직히 말하자면 네 재능이 부러웠다?”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최서빈의 말에서는 진심이 우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말에 그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인정할 수도, 부정을 할 수도 없는 그의 속마음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네가 할리우드 가겠다고 우리가 만났던 날. 그때 내가 널 질투했던 것 같아.”

“…….”

나를 질투했다는 그의 말이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시샘과 질투라는 감정이 드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게 나쁜 행동이나 심리만은 아니다.

다른 이를 질투하고, 부러워하면서 깎아내리지 않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노력한다면 그건 오히려 자신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터.

최서빈과 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피하던 그때, 순간 그와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최서빈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네?”

“이제는 그 질투할 선을 넘어섰다고, 네가.”

“아… 아닙니다.”

최서빈은 술잔을 들었고, 그와 잔을 부딪치자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너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 남우 주연상 후보로 올랐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이제는 온전히 그냥 널 응원하게 됐어.”

“…감사합니다.”

“네가 대견하고 대단해. 그래서 그런 네가 자랑스럽더라고.”

최서빈의 미소에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고.

“희성이 네가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한국 배우들의 앞길을 터주는 셈이 될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고.

최서빈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더 훨훨 날아라. 그래서 한국 배우들도 더 나아갈 수 있게. 네가 선두 주자가 되어주는 거지.”

그의 말을 들은 나는 그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니까.

내가 선두 주자로 한국 배우를 이어갈 수가 없으니까.

“희성아?”

그는 재촉하듯 내게 답변을 물었고.

나는 그저 의뭉스레 입술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글쎄요….”

***

한 본부장은 저 멀리에서 걸어가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김 실장!”

그의 부름에 김 실장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갔고.

“네, 본부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안 그래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회사 한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희성이, 아직 한국 온다는 이야기는 없지?”

“네, 아직인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한 본부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희성이 자식, 지금 한국에 있었으면 지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돈을 쓸어 모았을 텐데 말이다.”

한 본부장의 말에 김 실장은 손을 모은 채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나저나 희성이 서류나 정리 좀 해라.”

“어떤 서류 말씀이십니까?”

“세금 서류들 때문에 아까 이야기 나왔던데, 가서 확인해봐.”

“아… 네.”

진희성이 갖고 있는 집으로 인한 재산세와 주민세 등.

그의 앞으로 나온 세금들은 정리해야 할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그 업무를 대신 처리해주는 것 역시 소속사의 몫.

즉, 진희성의 매니저인 김 실장이 회사와 이야기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평소 진희성이 서류를 챙기기는 했지만.

LA에 오래 머물고 있기에, 대신해서 김 실장이 업무를 봐야만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일 처리 잘하고, 특이 사항 있으면 이야기해줘.”

“예.”

김 실장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고.

진희성과 관련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희성에게 받은 자료와 그의 담당 변호사를 통해 전달받은 수많은 서류들.

김 실장은 하나하나 살피며 업무를 처리해 갔고.

그때.

“…이게 뭐야?”

김 실장의 미간을 찌푸려지게 만든 서류 하나.

“변호사 공증?”

그는 서둘러 자료를 살폈고, 읽으면 읽을수록 김 실장의 얼굴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유언 공증? 미친… 이게 대체….”

김 실장은 서류를 확인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둘러 진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지만 받지 않는 전화.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진희성에게 전화 연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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