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44 – 무성한 소문 (3)
몇 주째 LA에 홀로 있는지 이제는 날짜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 실장이 먼저 한국으로 떠난 뒤, 계속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호텔을 나서는 날은 답답함을 느끼는 날뿐.
남은 이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지는 날에는 호텔을 벗어나 항상 찾는 바다에 가고는 했다.
고요한 바다에서 철썩이는 파도를 보는 게 유일한 힐링이었지.
“하아….”
호텔에 앉아 있으면 딱히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LA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을 것이고.
그래서 매일 눈을 뜨자마자 LA 관광도 하고, 집 앞을 늘 구경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광 따윈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LA 곳곳의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1만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한국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LA, 뉴욕, 시카고 등 미주는 물론 전 세계 어디든 다 살아 봤으니까.
예전에는 몰랐지만, 1만 년의 삶이 끝나 가고 있는 지금.
그 오랜 기간의 시간과 생활이 빠짐없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물론 내가 LA에 거주했을 때와는 몇십 년에서 최대 몇백 년, 몇천 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굳이 나가서 바뀐 것들을 보며 감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현재 미국에서도 ‘더 빌런’ 영화가 꽤 흥행한 터라.
자칫 잘못하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굳이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사실 웃으며 사람들을 대할 기운이 남아 있지도 않았지.
그때.
지이잉.
휴대 전화의 알람.
그 알람을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누구에게서 연락이 온 건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 실장은 여전히 내게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내고는 했다.
그래서 내 휴대 전화의 알람 지분율 99%는 모두 김 실장이었지.
답장을 보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김 실장은 홀로 LA에 남아 있는 내가 외롭거나 쓸쓸할 거라 생각해 여전히 연락을 보내왔다.
-희성아, 오늘 한국에서 네 영화 주제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도 했다?ㅋㅋ.
-희성아, 호텔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추억도 쌓고 해.
-어제 TV에 너 호텔 근처의 맛집이 나왔던데, 내가 주소랑 링크 보내줄게!
김 실장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나를 챙기느라 바빴고.
그의 그런 마음에 고마움은 느꼈지만, 일부러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한국에 있는 내 사람들과 정을 떼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고.
그 사람들 안에는 김 실장 역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김 실장에게도 슬슬 잊혀 가는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그를 밀어낼수록 김 실장은 점점 더 나를 크게 안아가고 있었다.
그의 문자를 보며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이 옅게 올라갔다.
“추억도 쌓으라고?”
김 실장에게서 온 문자를 보며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추억 남기기?
그런 건 내게 의미가 없었다.
1만 년의 마지막이 다가와 내가 무(無)로 돌아가는 순간.
이생의 기억 역시 공중에 흩뿌려질 테니까.
***
‘더 빌런’이 개봉한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은 기간.
호텔에만 있어도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TV를 틀어도 나오는 미국의 현지 반응.
그리고 매일같이 보내는 김 실장의 문자.
소식들을 굳이 찾아 듣지 않더라도 알 수가 있었다.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김 실장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못 본 체하며 휴대 전화를 덮었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나는 끝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희성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아… 그냥 쉬고 있었어. 왜?”
-요즘 통 연락이 안 돼서 전화했지. 문자는 다 보고 있는 거지?
“응, 읽었어.”
-답장도 없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연락했어.
김 실장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그 역시 낮은 내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삼키는 듯했다.
-한국에 언제 들어올 거야?
“아직 모르겠네?”
-거기는 지낼 만해? 필요한 건 없고?
“응, 생기면 말할게.”
-알겠어. 타지에 혼자 놔두니까 걱정이 돼서….
“괜찮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응, 그리고 오전에 보낸 문자 확인했어?
“어떤 내용?”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문자를 다시금 확인했다.
김 실장에게서 온 문자가 한두 통이 아니었기에, 어떠한 내용을 말하는지도 모두 기억할 수가 없었지.
-오늘 ‘더 빌런’ 최종 스코어 나왔거든.
“아… 1,500만 나왔다고 한 거?”
-응, 그것 때문에 오전에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못 받았어.”
-진짜 대단한 기록이잖아. 오늘 네 기록 보고, 회사에서도 회식한다더라. 하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1,500만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건 엄청난 것이었다.
국내에서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명량대첩’.
그 영화는 12일 만에 1천 만의 관객 수를 기록했고.
최종 스코어는 1,761만을 기록했다.
그리고 내가 출연한 ‘더 빌런’은 무려 11일 만에 1천 만의 관객 수를 찍으며, 최단 기록 흥행 1위 자리를 차지했지.
하지만 최종 스코어는 부동의 1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리고 관객 수 2위를 차지하고 있던, 기존의 영화 ‘천상신들과 함께’.
그 작품은 1,441만의 기록이었고.
내가 1,5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로 ‘천상신들과 함께’를 3위로 밀어냈다.
-최단 기록 흥행 1위 차지에, 최종 스코어 2위까지. 한국에서 지금 ‘더 빌런’ 영화 이야기로 아주 난리야.
“다행이네.”
-다행 정도가 아니지. 2위에 오른 영화가 할리우드 작품이잖아. 그리고 그 주연이 희성이 너인 거고. 한국이 완전 발칵 뒤집혔다니까? 하하.
김 실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띄웠고.
그럼에도 나는 그의 텐션을 따라가지 못했다.
“열심히 했는데, 기록이 따라줘서 만족스럽긴 하네.”
-지금 희성이 네가 한국에서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감자야. 한국 오면 공항부터 마비될 거니까, 올 때 꼭 가드 여러 명 붙여야 할 거야.
“알겠어. 미리 연락할게.”
-밥 잘 챙겨 먹고. 문자 보면 답장도 하고 그래.
“그럴게. 형도 잘 지내고.”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답했다.
-뭐야, 다시는 연락 안 할 사람처럼.
“아니, 그냥.”
-알겠어. 또 연락할게, 희성아.
김 실장과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흥행을 했다는 건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흥행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연기했던 거니까.
다만 흥행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에 더욱 매진했던 거지만 말이다.
한숨을 내쉰 건,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김 실장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
내가 사라졌을 때, 그에게 남겨질 슬픔과 걱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왔다.
***
북적이는 회의실.
회의실 문에는 커다랗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시크릿 토크쇼’
그들은 각자의 앞에 노트북을 올리고, 서칭과 동시에 회의를 이어갔다.
“그래서 다음 회차 게스트는 누가 좋겠어?”
PD의 이야기에 작가와 스태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연히 ‘더 빌런’에 나온 배우요.”
“맞아요. 진희성이라는 배우 아시죠?”
그들의 말에 PD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걔는 안 돼.”
단호한 PD의 답에 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인이라서요?”
“아니, 예전에도 한국에 영화감독 한 번 나온 적이 있잖아.”
“그럼 이번에는 한국 배우도 한번 게스트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옆에 앉은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이슈도 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요. 요즘 K-영화, 드라마가 K-팝을 이어서 유명해졌잖아요.”
PD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지. 근데 진희성 배우가 거절했어.”
그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
“거절을 했다고요?”
“어, 방송을 안 한다네?”
“아니, 시크릿 토크쇼라는 걸 아는데도 거절했다는 말이에요?”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국에서 몇 년간 1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토크쇼.
그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배우, 가수, 유명인들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출연할 수 있는 방송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방송에 출연했던 한국 사람은 영화감독 단 한 명뿐이었고.
그 또한 영화 업계에서 큰 상을 받아, 딱 한번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방송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에 모든 스태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대체 왜 우리 방송을 거절한 거지?”
“설마… 시크릿 토크쇼를 모르는 건 아니겠죠?”
“에이, 말도 안 돼. 세계에서 우리 방송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른다고 해도 미국 영화를 찍고, 우리 방송을 거절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그들은 진희성이 출연을 거절한 이유를 찾고자 토론을 펼치듯 대화를 이어갔고.
PD 또한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아무 방송도 하지 않겠다고 했대.”
“정말요?”
“어, 이유가 그게 다야. 어떤 방송 출연이든 하지 않겠다고.”
진희성의 알 수 없는 마음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은 건가?”
“이미 이번 영화로 유명해져서 그런 거 아니야?”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할리우드에서 유명해지려고 할 텐데, 대체 왜지?”
회의실은 한참 동안 진희성의 거절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언성을 높이듯 대화를 이어갔다.
***
같은 시각.
국내에서는 어둑한 밤이 찾아왔고.
한 본부장과 김 실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희성이는 LA에 더 있겠대?”
한 본부장의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전에 통화했는데, 아직 한국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챙-.
그들의 술잔이 찰랑였고.
단번에 술잔을 들이켠 김 실장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희성이 걱정입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한 본부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회사에서는 지금 답답한 상태야.”
“네?”
“김 실장도 생각해봐. 희성이한테 이제 한국이 아니라, 해외에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그의 말에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긴 한데… 희성이 상태가….”
한 본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당장 노를 저어야 한다고. 김 실장도 알잖아. 연예계가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지 않으면, 금방 물이 빠진다고.”
그는 술잔을 들이켜며 말을 이어갔다.
“대중들은 반짝 관심을 줄 뿐이야. 치켜세워 줄 때, 열심히 해야지. 저렇게 활동 안 하면, 대중들한테 금방 잊혀 버린다고.”
“그건 맞죠.”
김 실장은 그의 빈 잔을 채웠고.
“희성이 지금 김 실장 연락만 받잖아. 뭐 특별한 얘기는 없어?”
“네, 좀 더 쉬고 싶은 것 같더라고요.”
“하아….”
한 본부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희성이 은퇴하려는 건 아니지?”
그의 말에 김 실장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회사 측에서는 몸값이 훌쩍 뛴 진희성이 혹여나 은퇴라도 하게 되면, 엄청난 자원을 잃는 것이기에.
한 본부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번 작품에 너무 몰입해서 헤어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하긴, 저 작품 시작 전부터 고생한 거 알기는 하지.”
챙-.
또다시 진희성의 걱정을 삼켜낼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지금 당장 프로그램도 나가고, 광고도 해야 돈을 쓸어 모을 텐데……. 대표님한테 이야기 듣는 것도 한두 번이지. 힘들다.”
한 본부장은 김 실장에게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쏟아냈고.
그는 진희성의 편에 서서 눈에 힘을 주고 답했다.
“아쉽지만, 희성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무리하게 진행했다가는 단순히 계약 해지 수준이 아니라, 희성이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 알기야 하지. 근데 그거 하나하나 우리가 봐주고, 따져줄 수가 없잖아.”
김 실장 또한 회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돈보다는 자신이 가족처럼 아끼는 진희성의 상태가 먼저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희성이랑 자주 연락하면서, 희성이 멘탈 금방 회복하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알겠어.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게 해.”
“네.”
그들은 같은 대상을 떠올리고 있지만, 각기 다른 고민에 잠긴 채.
그렇게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