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44 – 무성한 소문 (1)
“희성아,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은 커다란 캐리어 3개에 짐을 가득 챙기며 말했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을 바라보며 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을 터.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고민하고 또 미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내일이었으니까.
“…형.”
내 부름에도 김 실장은 옷장에서 짐을 꺼내는 데 집중하였고, 시선은 캐리어에 고정한 채 답했다.
“응?”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당연하지. 말해.”
“…….”
답이 없자, 그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뭔데. 편하게 말해도 돼.”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우리 새벽 비행기라, 얼른 짐도 싸야 하는데. 거실로 나가서 해야 할 이야기야?”
김 실장은 널브러진 짐과 시간을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아니야, 짐 싸면서 들어도 돼.”
“알겠어. 뭔데 그래?”
그는 다시금 시선을 짐으로 돌렸고.
“형, 나 LA에 더 있고 싶어서.”
“에이, 더 놀고 싶어도 들어갔다가 또 오면 되지.”
김 실장은 내 말이 농담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니, 내일 한국 안 가려고.”
툭-.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은 손에 들고 있던 옷걸이를 떨어뜨린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한국에 안 간다고?”
김 실장은 그제야 심각성을 느끼고 싸던 짐을 멈춘 채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와 봐. 거실에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 좀 하자.”
그가 끄는 손길에 이끌려 거실 소파에 앉았고.
“자세히 말해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 그대로야. 나 한국 안 가려고. LA에 더 있으려고 해.”
김 실장은 한층 굳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왜 LA에 더 있어, 촬영도 끝났잖아.”
“그냥. 한국에 당장 가고 싶지 않아서.”
김 실장은 당황한 채로 눈만 끔뻑끔뻑 뜨고 있었고.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잘 곳은?”
“호텔 잡아뒀어.”
“어디?”
미리 예약해둔 호텔 자료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근처의 호텔이야. 여기 펜트하우스는 돈도 돈이고, 혼자 이렇게 큰 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서. 바로 근처에 호텔 잡아뒀어.”
“…….”
김 실장은 그제야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삼켜냈다.
“아니, 대체 왜 한국에 갑자기 안 가겠다는 거야. 몇 달이나 여기에 있었잖아. 본가도 가고….”
나는 그의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다음에. 그냥 LA에서 쉬고 싶어.”
“그래도 한국에 가서 쉬어도 괜찮잖아.”
그의 말에도 나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은 그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LA에 남고 싶은 이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해야겠지.
한국에 있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고.
그들을 계속 마주한다면 내가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립든, 아련하게 떠오르든, 어떻게 되든 간에 내게 마지막은 오는 거니까.
그래서 한국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없는 LA에 있다면.
내 1만 년의 생을 조용히 마무리해도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여기서 쉬고 싶어.”
단호한 내 말에 김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정적을 깨며 내게 말했다.
“그럼 나도 회사에 이야기하고 여기에 남을게. 같이 있자.”
“아휴, 형. 매일 붙어 있었는데 뭘 또 여기에서까지 더 붙어 있으려고. 형은 한국 가야지.”
“너 여기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형은 신혼이잖아. 얼마나 기다리시겠어. 얼른 가.”
내 말에 김 실장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신혼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달간 LA에 출장을 와 있는 그였으니까.
당연히 한국에 가고 싶을 터.
“말했잖아. 나 정말 혼자 쉬고 싶어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진짜 가도 돼. 아니, 형 진짜 갔으면 해.”
“…알겠어. 그럼 대신에 무슨 일 생기거나, 필요하면 연락해. 바로 올 테니까.”
“그럴게.”
***
혼자 남게 된 LA.
정말 아무도 없이 홀로 있기에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런 외로움이 힘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오롯이 홀로 있어야 기나긴 생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적막한 호텔 방 안.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호텔 안에서 고요하게 머물렀다.
그때.
지이잉.
적막한 이곳에서 울리는 유일한 소리.
휴대 전화의 진동이었다.
LA에 도착해 새로 만든 전화였기에,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김 실장과 부모님, 그리고 데이빗 감독.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었던 휴대 전화를 찾았고.
여전히 휴대 전화는 진동 소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발신인: 데이빗 감독]
데이빗 감독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화 일정에 대해서, 혹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내가 아닌 회사나 김 실장을 통해서 했고.
그동안 내게 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걸려온 데이빗 감독의 전화에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희성 씨, 바빠?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 작품 개봉일은 매니저 통해서 들었지?
“네, 확인했습니다.”
-이제 다 마무리했거든. 그런데 희성 씨한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어떤….”
-본격적인 영화 광고를 시작 전에, 급하게 제목을 바꿨거든.
“제목을요?”
그의 말에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화 제목을 바꾼다는 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개봉을 코앞에 둔 지금.
갑자기 제목을 바꿨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갑자기 제목을 바꾸다니요?”
내 말에 데이빗 감독은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완성을 한 영화를 벌써 수십 번이나 봤어. 근데 도저히 기존 제목으로는 갈 수가 없겠더라고. 그렇게 가서는 안 될 것 같아.
“기존 제목이라면, ‘다시 살아온 생명체들’이 별로라는 말씀이십니까?”
-어, 새롭게 만든 제목은 ‘더 빌런’이야.
“네? 더 빌런이라면….”
새로 바뀐 제목에 놀라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빌런은 오로지 나뿐이었고.
제목이 ‘더 빌런’이라는 건, 주연이 오직 나 하나라는 말일 테니까.
데이빗 감독은 그제야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답했다.
-그래. 희성 씨, 자네 연기 때문에 내가 제목을 바꾼 거야. 이 영화는 진희성 배우 하나로만 승부를 보게 될 영화가 될 테니까.
“…….”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고.
서 있던 자리에서 발이 묶인 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영화.
그래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열연을 펼쳤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저 내 마지막 작품에 영혼을 갈아 넣듯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 결과가 ‘더 빌런’이라는 제목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
쿵쾅거리는 BGM이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그 소리에 송유나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었다.
그러다 그녀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더 빌런’
화면에서는 진희성의 모습과 함께 그가 출연하는 ‘더 빌런’ 영화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진희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참나. 영화 촬영이 아니라, 당장 개봉하게 생겼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어?”
그녀는 황급히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의 전원을 껐다.
“진짜 짜증 나. 이렇게까지 남남처럼 지내는 이유가 대체 뭐야?”
분노에 차오른 듯 송유나는 씩씩대며 생수를 들이켰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그동안 진희성에게 보냈던 SNS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바뀐 번호는 알려줄 생각도 없고. SNS 메시지를 읽지나 말든가. 다 읽어놓고 대체 왜 씹는 거야. 기분 나쁘게….”
휴대 전화를 침대 위로 집어 던졌고.
“몰라. 나도 이제 다시는 연락 안 해!”
송유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렇게 고요해진 공간.
스르르 눈을 뜨고 꺼져 있는 휴대 전화를 흘긋 바라보았다.
“근데 내가 미국까지 와서 연락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녀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진희성에 대한 걱정이 피어올랐고.
그의 SNS를 클릭해 새로 올라온 게시물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송유나가 이렇게 진희성의 SNS를 살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같이 하는 행동이자, 하루의 일과였다.
“내가 미국에 와서 한 달 넘게 지내면서 연락하는데, 한 번쯤은 답장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한테 무슨 화라도 난 거야…?”
하지만 진희성의 SNS에는 몇 달간 게시물은커녕, 그가 댓글을 달았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노에서 걱정, 그리고 체념으로 접어든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됐어. 내가 진희성한테 아쉬울 게 어디 있어. 할리우드 갔다고 사람이 변한 거야, 뭐야. 이제는 절대 연락 안 할 거야!”
그녀는 진희성에게 보냈던 메시지 화면을 꺼버렸고.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
쏴아아-.
오랜만에 찾아온 이곳.
촬영할 때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 오고는 했다.
인적이 드문 바다.
이 파도를 보며 답답함을 늘 털어냈고.
그저 멍하니 파도만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있었지.
하지만 이제 홀로 있는 LA에서 이 바다에 매일 찾아오지는 않았다.
어차피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호텔 방 안에 나 혼자만이 있으니까.
방 안에서 생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멍하니 있어도 충분했지.
그런데 며칠 전부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결국, 호텔을 나서고 말았다.
“하아… 그래, 여기라도 와야 생각을 떨칠 수가 있지.”
내 머릿속을 자꾸만 괴롭히는 한 사람.
그 사람은 송유나였다.
꿈에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송유나의 모습만으로도 너무 벅찼는데.
얼마 전부터 그녀는 잠을 자지 않고, 꿈이 아니어도 눈앞에서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래서 이 바닷가에 오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송유나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이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지 않으려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건데.
송유나가 떠오른다고 그녀를 볼 수는 없었지.
“1만 년의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송유나를 한 번은 보고 갈 수 있을까?”
계속해서 송유나가 눈앞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매일 꿈에서 그녀를 보기 때문일까?
내 1만 년의 생 중에 가장 사랑한 사람이 그녀였다는 걸 알아채서였을까?
“…….”
그리고 철썩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자꾸만 송유나가 생각나는 건, 결코 지난 과거와 꿈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그녀를 향한 마음, 그리움은 이번 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진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번 마지막 생.
이 몸에서 만나 감정을 교류한 배우 송유나가 그리운 게 분명했다.
이 마음은 그저 ‘정’이 들었기 때문인 걸까?
그녀를 마주해 대화를 나누거나, 미래를 꿈꾸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감정에서 송유나가 그립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