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43 – 내가 할 수 있는 건 (3)
팟-!
“하아… 하아….”
여전히 반복되는 악몽.
이제는 깊은 잠을 청한 뒤에도, 오랜 시간 잠을 자고 난 후에도.
컨디션 회복은커녕 오히려 피로감이 더해졌다.
언제쯤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이번 작품에서 내 역할이 밝은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어둠의 기운이 뿜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현장에 나가 밝게 웃으며 연기해야 했다면 그게 더욱 힘들었을 테니까.
지금은 현장에서 펼칠 연기도 현재 내 기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둠이 가득한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너무나 잘 소화할 수밖에 없는 현재 내 상태.
작품에 나오는 배역, 그대로였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뿜어지는 잿빛의 기운.
오늘도 꿈에서 깨어 겨우 현실을 자각한 뒤.
이 기분, 이 느낌 그대로 현장으로 출발했다.
몇십 분을 달려 도착한 현장.
“안녕하십니까.”
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 데이빗 감독에게 인사를 보냈다.
할리우드에 와서도 내 인사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항상 웃으며 인사하던 그 웃음기만 사라졌을 뿐.
“네, 희성 씨 왔어요?”
“예, 좋은 아침이에요. 희성 씨.”
그래서 인사 이후 그들과의 대화는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았다.
굳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들 역시 나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이미 내 얼굴과 몸에서는 어두운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암울함, 그 자체였지.
그래서인지 주연임에도 내게 다른 말을 거는 배우들조차 없었다.
친분을 쌓기 위해 다가오는 배우들이 간혹 있었지만.
내게 인사 외에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게 말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듯한 그들의 눈빛을 너무나도 잘 읽을 수가 있었지.
하지만 그 눈빛을 읽은 후에도 나는 그저 그들을 외면하고 회피했다.
모든 이들과 행복하게 지낼 만큼의 심적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끝나가는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그리고 이 작품에 어떻게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연기를 녹여내야 할지.
이와 같은 두 고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내 답답한 마음에 트레일러에 있지 못하고, 그 밖을 서성였다.
그때.
“저… 희성 씨.”
나를 부르는 스태프.
그 목소리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곧 촬영 들어가야 해서요. 준비하시고, 오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스태프에게 최대한 살갑게 표현한다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내 답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서둘러 현장으로 걸어갔고.
현장에 다다르자 들려오는 스태프들의 이야기.
“와… 진희성 배우 분위기 느꼈어?”
“어, 장난 아니더라. 다크함밖에 없는 사람 같아.”
“맞아. 아니, 진짜 배역에 나오는 가짜 인간 같더라니까?”
그들은 내가 근처에 있는 것을 모르는지, 나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대화의 내용은 전부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에 대한 이야기였다.
“몰입을 잘 하는 건지, 그 배우 자체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좀 무서워.”
“다르게 해석하자면, 배역을 잘 소화한다는 거잖아. 진희성… 그 배우 연기도 대박이고.”
“그건 맞지. 이번 작품… 일낼 수도 있겠는데?”
***
“레디, 액션!”
데이빗 감독의 말에 카메라에는 빨간 불빛이 점등됐고.
카메라 앵글 안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각자의 배역에 몰입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쇼핑몰 안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쇼핑을 하고 있었다.
시끌시끌하고 북적이는 쇼핑몰 안.
몇십 대의 카메라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각자 담아내고 있었고.
북적이기는 했으나, 평화로운 쇼핑몰일 뿐이었다.
“이거 다른 색상도 있나요?”
“네, 흰색도 있는데 그걸로 보여 드릴까요?”
여유로운 쇼핑을 하고 있는 한 부부.
“그래, 당신한테는 흰색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흰색으로 좀 보여 주시겠어요?”
“역시 당신은 나를 잘 안다니까? 하하.”
화목함을 뽐내며 옷을 고르는 그들을 향해 진희성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진희성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 든 물체는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진희성은 아무런 대화도, 표정도 없이 그저 그들의 곁으로 걸어왔고.
이내 한 부부의 앞에 멈춰 섰다.
“어서 오세요.”
진희성이 한 가게 앞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직원.
하지만 진희성은 그녀의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했다.
“…천천히 보시고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그 모습에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옷을 보던 부부에게로 발길을 옮겼고.
커다란 쇼핑몰 한구석에 상자를 내려놓는 진희성의 모습.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진희성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살짝 열린 상자 틈을 카메라가 당겨 잡았다.
…폭탄.
상자 안에 든 것은 폭탄이었다.
알 수 없는 몇십 개의 전선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진희성이 상자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폭탄 화면에는 빨간색의 숫자가 떠올랐다.
10:00.
9:59
9:58
빠르게 떨어지는 숫자.
남은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곧 폭탄이 터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북적이는 쇼핑몰 안의 그 누구도 내려놓은 상자, 그 폭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더불어 멀어지는 테러범인 진희성 역시 바라보지 않았지.
진희성은 그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한 쇼핑객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유유히 쇼핑몰 문을 열고 나왔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하나 끝.”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주머니에서 검은 물체를 하나 꺼냈고.
그의 손에는 하나의 버튼이 있는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진희성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쇼핑몰을 등진 채 그저 앞을 향해 발길을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삑-.
진희성이 오른손에 들린 리모컨의 버튼을 세게 눌렸다.
쾅-!
버튼이 눌림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고.
쇼핑몰에 놓아두었던 폭탄이 버튼을 통해 터지고 말았다.
진희성의 귓가에 들려오는 폭발음.
하지만 진희성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고, 몸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한쪽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고 있었다.
씨익-.
소름 돋는 미소가 지어진 진희성의 입술.
눈에는 웃음기가 단 하나도 깃들어 있지 않았고.
그저 그의 입술만 길게 휘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몇십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잡았고.
이내 데이빗 감독의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
“컷, 오케이!”
데이빗 감독의 사인과 함께 현장에서는 박수 대신 탄성이 쏟아졌다.
“와아….”
“…저거 연기 맞지?”
“미쳤다….”
배우, 스태프 등 너 나 할 것 없이 진희성의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나 지금 온몸에 소름 돋았어.”
“저 배우 뭐야, 어떻게 저런 미소를 저렇게 지을 수 있는 거지?”
무자비한 테러를 저지르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미소를 짓는 진희성의 얼굴.
그 모습에 현장은 진짜 테러범을 본 듯 고요해졌다.
그저 조용히 감탄을 쏟아내며 진희성의 모습을 바라볼 뿐.
진희성은 언제 소름 돋는 미소를 지었냐는 듯 다시금 입꼬리를 내렸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희성은 곧바로 다음 촬영을 위해 카메라 밖으로 향했고.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데이빗 감독의 눈빛.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해.”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조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이 장면, 분명 명장면으로 유명해질 거야.”
그의 말에 조감독은 곧장 고개를 주억거렸고.
데이빗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명장면으로 남지 못하면… 그건 편집을 잘하지 못한 감독인 내 잘못일 거야.”
조감독은 데이빗 감독이 아닌, 멀어져 가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저런 연기 처음 봅니다.”
“저 연기 보고도 못 살리면 안 돼. 이거… 무조건 살린다!”
데이빗 감독의 말에 조감독은 자신의 팔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
소파에 기댄 채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잔뜩 찡그린 얼굴의 송유나였다.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휴대 전화를 허공에 휘이 저었다.
“대체 왜 문자 답장을 안 하는 거야. 어이없어, 진희성.”
송유나가 바라보고 있는 화면은 그녀가 진희성에게 보냈던 문자였고.
그 문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진희성이 할리우드로 떠나기 전부터 가끔 문자를 보냈고.
그 문자는 일방적이었다.
몇 개의 발신 문자는 있지만, 진희성에게 온 답은 없었다.
“아니,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답장 하나를 안 해?”
송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혔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움직였다.
그렇게 몇 분간 고민을 하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멈춰 섰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송유나는 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듯 발을 구르고 있었고.
소파에 다시금 등을 기댄 채 진희성의 번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송유나의 손은 진희성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으로 움직였고.
“같은 회사 식구인데, 전화해서 물어봐야지. 그게 도리지.”
그녀는 이내 진희성의 번호를 꾸욱 눌러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서둘러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건 신호음이 아닌, 알림 메시지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송유나의 얼굴은 곧장 얼어붙었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소리쳤다.
“뭐야, 없는 번호?”
송유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재차 진희성의 이름을 확인해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하지만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알림 메시지는 다르지 않았다.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사라진 번호에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다는 생각에 송유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이내 그 민망함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진짜 열받아!”
송유나는 끊긴 전화를 소파에 집어 던졌다.
퍽-.
“나도 연락 안 해. 번호까지 바꾸고, 바뀐 번호를 알려주지도 않는 사람 걱정을 내가 왜 해?”
그녀는 씨익거리며 한숨을 연속해서 내쉬었고.
“완전 어이없어. 걱정돼서 연락한 거 가지고, 뭐… 내가… 참나!”
한참 어깨를 들썩이며 분노를 표출하던 송유나.
몇 분 뒤,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휴대 전화를 당겼다.
“근데… 뭐 괜찮은 건가?”
그녀는 서둘러 SNS를 클릭해 회사에서 올린 진희성의 근황을 찾았고.
“예전에는 회사에서도 진희성 사진을 올리더만, 왜 할리우드에 가고 난 후에는 안 올려. 회사 일 안 하는 거야?”
송유나는 찌푸려진 얼굴로 자신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번 달에 스케줄도 없는데… 미국이라도 가봐?”
그녀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미쳤나 봐. 아니, 내가 왜 진희성 때문에 미국에를 가?”
그때.
지이잉.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송유나는 그 전화에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발신인을 확인했다.
“아… 매니저잖아….”
실망감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
이내 수신 버튼을 클릭해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어, 유나야. 통화 가능해?
“응, 왜?”
-이번에 뮤직비디오 섭외가 왔는데….
“뮤비? 나 뮤비 안 찍잖아.”
그녀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매니저에게 답했지만.
매니저는 서둘러 그녀에게 말했다.
-알지. 근데 가수가 박윤기거든. 저번에 윤기 씨가 너 출연하는 드라마에 OST도 불러줬잖아. 그래서 부탁을 하더라고. 혹시 섭외 가능한지 말이야.
“하아… 오빠.”
그녀의 한숨에 매니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 게다가 이게 미국까지 가야 하고, 뮤비니까 돈도 안 되잖아. 너 귀찮을 텐데 그래도 이야기는 해야겠다 싶어서 전화했어. 내가 다른 스케줄 핑계 대고 거절할….
“아니야, 할게.”
-어? 한다고?
“응, 한다고. 내가 윤기 씨한테 OST 받은 적이 있잖아. 그러니까 나도 신세 갚아야지!”
-아… 근데 미국까지 찍으러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하아… 오빠, 내가 뭐 거리 따져서 그러는 사람이야?”
-그건 아니지….
“나 빚지고는 못 살아. 찍는다고 해.”
-알겠어. 그럼 바로 연락 다시 줄게.
통화를 끊은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미국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