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39화 (239/303)

239화 #43 – 내가 할 수 있는 건 (2)

시차 적응과 함께 호텔 방을 나가지 않고 며칠 동안 연습에 매진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찍고 싶었던 영화이기에, 첫 촬영을 하기 며칠 전부터 LA에 도착한 것이었지.

그리고 결국, 내가 원하던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맡은 배역에 딱 맞는 컨디션.

김 실장은 차에 올라타는 나를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출발할게.”

내가 맡은 이 영화의 배역은 인간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존재였다.

여러 실험으로 만들어진 생명체.

그리고 정부와 세상에 복수를 꿈꾸는 ‘어둠’.

그 어둠이라는 표현도 가벼웠다.

짙고 어둑해 숨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는 극강의 존재.

그걸 의인화한다면?

내가 생각한 이 배역은 그러했다.

내 의도대로 나를 만들려 했고, 그 과정은 큰 노력 없이도 나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원룸에도 갇혀 있어 보고, 정신 병원까지 제 발로 감금이 되어도 봤지만.

가장 확실하게 내가 이 어둠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꿈’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꿈의 연속.

매번 눈을 뜨면 식은땀을 닦아내는 것도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몇 달간 반복하다 보니, 내 주변에는 자연스레 어둠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낌새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은 어두워진 나를 밝게 바꾸려, 굳이 예전으로 다시 돌리려 노력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힘들게 배역에 몰입한 거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어둠을 내뿜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걱정과 근심은 눌러둔 채, 그저 내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놔두었지.

몰입에서 깨지지 않도록, 차에서도 최대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감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그렇게 한참 정적을 유지한 채로 차는 금세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데이빗 감독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희성 씨 왔어요?”

“네,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이 인사가 전부였다.

시시콜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곧장 자리로 돌아가 대본에 집중했고.

데이빗 감독 역시 촬영 첫날이라 준비할 것이 많아 보였다.

그렇게 데이빗 감독과 짧은 인사를 한 뒤, 트레일러로 돌아왔고.

그 외에 다른 배우들과는 그 어떤 대화나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지금 배역에 몰입한 탓인지, 꿈으로 인해 내게 어두운 기운이 풍겨서인지.

혹은 그들과 굳이 친분을 만들 생각이 없는 탓인지.

이번 작품의 배우들에게 먼저 나서서 친분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지.

지금은 현재 남아 있는 지인들과의 마지막을 보내기도 벅찬 순간들이었기에.

새로운 지인, 만남 등은 내 관심사 밖이었다.

그곳에 에너지를 쓸 힘조차 없었으니까.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본을 다시금 복기했다.

한국에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연습한 탓에 몸을 툭 치기만 해도 대본이 입 밖으로 쏟아질 경지였지만.

연습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내 영혼을 모두 담아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 싶었다.

***

에디는 할리와 제이슨을 불러 자신의 트레일러 앞에 섰다.

“저기 보여요?”

에디의 말에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이번에 주연을 맡은 그 동양인 트레일러죠?”

“맞아요. 연기를 잘한다고 하던데, 얼마나 잘할지 궁금하네요.”

할리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9월 11일 영화에서 꽤 활약을 했더라고요. 근데 이렇게 바로 주연을 맡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근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에디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보았고.

이내 몸을 기울여 그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진희성, 동양인 배우 출연료 들었어요?”

그의 말에 할리와 제이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맞아요. 저도 들은 적은 없어요. 에디는 알아요?”

그들은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고.

에디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답했다.

“네, 무려… 500만 불이나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할리와 제이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500만 불이요?”

“와아… 그렇게나 많이요?”

“예, 500만 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전 작품이 주연급은 아니었는데, 너무 세지 않나요?”

에디의 말에 동조하듯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원래 주연 라인에 있던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동양인이 할리우드에서 첫 주연인 것치고는 너무 많네요.”

“저도 좀 과하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잘하긴 했던 것 같은데, 500만 불이나 받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진희성을 평가하는 건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연기를 잘하긴 하지만, 주연을 맡게 된 것도.

출연료로 500만 불이나 받게 된 것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진희성의 연기에 의문을 가지거나 그의 실력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는 눈살을 찌푸린다는 의견이었다.

“오늘 첫 촬영이 그 동양인 진희성 배우던데, 한번 실력이나 보러 가자고요.”

“좋아요. 같이 보러 갑시다.”

그들은 마치 어디 한번 연기를 봐보자, 라는 듯이 각자 팔짱을 낀 채 현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촬영 현장.

수많은 카메라는 진희성에게 주목하고 있었고.

진희성의 옆에서는 마치 CG를 입힌 듯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그의 모습.

집중한 데이빗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그들 주변으로는 에디와 할리, 제이슨과 같이 조금은 부정적인, 진희성의 실력을 의심하는 듯한 시선들이 가득했다.

그런 여러 감정이 가득한 시선들 가운데에 놓인 진희성.

많은 평가가 오고갈 첫 번째 신.

“레디, 액션!”

데이빗 감독의 목소리로 카메라의 빨간 불이 밝게 들어왔다.

카메라가 돌자마자 진희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꽉 쥐었는지 양 주먹이 부들거리며 팔까지 떨리고 있었고.

진희성의 안면 근육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내가 왜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거지?”

그의 시선은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고.

“내 살갗, 몸 안에 돌고 있는 검디검은 피. 이 중에 뭐 하나라도 진짜가 있을까?”

진희성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손바닥으로 자학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볼과 팔뚝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악… 죽여 버릴 거야. 날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들의 가족까지도 모두….”

진희성은 무엇엔가 홀린 듯 눈을 뒤집고 정신을 잃었다.

툭-.

그러고는 눈을 번뜩 뜬 상태로 바닥에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의 연기에 현장은 숨이 멎은 듯 고요했고.

이내 데이빗 감독의 목소리로 얼어붙었던 현장이 깨지는 듯했다.

“컷, 오케이!”

짝짝짝-.

첫 신에서부터 모든 이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고.

이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작품에서 첫 촬영, 첫 신은 그 작품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기에 적게는 몇 번, 많게는 몇십 번까지도 재촬영을 한다.

그래야만 감독이 원하는 방향, 배우들이 해나가야 할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진희성의 첫 연기에 데이빗 감독은 너무나 흡족하다는 듯 손뼉을 부딪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 역시 환호를 내질렀다.

“이야….”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희성을 바라보고 있던 몇몇 배우들.

할리는 제이슨을 팔로 툭 치며 읊조렸다.

“이건 미쳤어요. 현장에서 봐서 그런 건지, 실력이 더 는 건지….”

“이거 봐요, 할리. 내 팔에 소름 돋은 것 좀 보라고요. 저 연기를 실제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해요.”

“그러니까요. 저 내일 진희성 배우와 함께 촬영하는데, 벌써 기대돼요.”

그들의 말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에디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 정도면 동양인 중에 톱이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인데?”

그의 말에 할리와 제이슨은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500만 불… 받았다는 거요. 진희성 배우, 너무 저렴하게 출연료를 받고 온 거 아닐까요?”

불과 몇십 분 전.

500만 불의 출연료에 불만을 가졌던 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게요. 솔직히 몇 백만 불은 더 받아야 할 실력인데.”

“실력에 비해 싸게 왔는데요?”

진희성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180도 돌변해 있었다.

***

뿌연 연기 사이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들.

검고 긴 망토를 등에 두른 남성이 모니터 속에서 괴로움에 머리를 부여잡은 진희성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입꼬리는 길게 휘어졌다.

“저 고통스러워하는 것 좀 봐. 이제 진짜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이 오겠구만.”

그의 말에 중절모를 눌러쓴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이제 마지막을 맞이하겠네. 마지막은 보통 다 똑같지?”

망토를 휘두르던 신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아, 자네는 다른 인간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나?”

“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 저렇게 1만 년, 아니 1천 년 이상 형벌 받은 놈들도 이제는 많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긴, 게다가 자네는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구만.”

검은 망토를 휘이 휘날린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1만 년까지 받은 놈은 나도 거의 못 봤어. 1천 년 이상 형벌 받은 놈들은 다 거기서 거기지.”

그의 말에 옆에 앉은 남성이 중절모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어떤데?”

“음… 보통은 자살을 하지.”

“마지막 날?”

검은 망토를 두른 남성은 모니터 속 진희성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정확히 따지면, 1만 년의 마지막 날. 형벌을 받은 죄인은 그날 목숨을 끊으면 무(無)로 돌아가.”

그 이야기에 중절모를 쓴 남성도 진희성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혹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만약 죽지 않고 버틴다면 말이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몸. 저 진희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거야.”

“얼마나?”

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글쎄, 그건 진희성 저 인간의 목숨 운명에 달렸지. 진희성이라는 몸이 가진 원래의 나이. 80살까지 운명을 가졌다면, 80살. 90살까지 사는 운명이라면 90살까지 살 거야.”

“그러고 난 후에는 죽는 건가?”

“아니. 그렇게 본연의 생명을 살고 난 다음에는….”

검은 망토의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다시 1만 년의 삶을 반복할걸세.”

그의 말에 중절모를 쓴 남성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1만 년을 산다는 말인가? 그건 너무 지독한데.”

“그렇지. 아주 끔찍한 벌이지. 하지만 새로 시작하게 될 1만 년은 더욱 지독하고 잔인할 거야.”

“왜?”

“지금 저 모습을 봐. 지금까지 1만 년을 편히 살다가 얼마 전부터 저렇게 모든 기억에 힘들어하고 있지?”

그의 말에 중절모를 쓴 남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지옥과 같은 꿈을 반복하니까 말이야.”

“근데 한 번 더 살게 될 1만 년에는 그동안의 모든 기억을 다 안은 채로 살아가기 시작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죽는 게 낫겠네.”

“그렇지. 신으로서 1만 년을 사는 우리의 삶도 지독한데, 인간계에서야. 게다가 현세의 1만 년 윤회의 삶을 전부 기억한 채로 살아가는 건… 나라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렇게 다시 1만 년을 살겠다고 버틴 사람도 있었나?”

검은 망토를 휘날리던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택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두렵지 않나?”

“마지막엔 지난 1만 년의 생이 선명하게 떠올라. 오히려 서둘러서 목숨을 끊고 싶을 거야.”

그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만하네.”

검은 망토의 남성은 입술을 잘근 깨문 뒤 말했다.

“1년간 지옥같이 힘든 꿈을 꾸면서, 망각이 아니라 그게 영원한 기억이라는 저주로 바뀌는 거야.”

그러고는 모니터 속 진희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인간은 망각이란 축복을 받은 생물이야. 그 망각이 사라지는 순간, 견디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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