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43 – 내가 할 수 있는 건 (1)
할리우드로 떠나기 일주일 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평온해졌다.
이제 1만 년의 시간이 그 끝에 다다랐고.
그럴수록 정리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서, 오히려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할리우드에 가 연기를 하면서 느낄 내 감정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러했다.
한국에서의 할 일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차분히 하나씩 해나갔다.
그 시간 중 첫 번째 할 일.
부모님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일지, 내 1만 년의 생에서 마지막 일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전의 집과는 다른 주소지를 향해 가는 길.
내가 부모님에게 새로 마련해준 보금자리로 가는 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선물해드린 집을 보고 몇 번이나 거절하셨지만, 나는 그 거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무(無)로 돌아간다면, 어차피 없어질 돈들.
이렇게 열심히 연기하는 것 또한 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 연기하며 배우의 삶에서 성공하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으니까.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니 자연스레 돈이 따라온 것이었다.
그 돈으로 사치를 부리기도 하고, 떵떵거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지.
내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있으면 사치에는 전혀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 돈은 내가 떠난 후에도 남을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을 뿐.
그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부모님이었다.
몇 시간 후 도착한 고급스런 주차장.
이전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좋아진 건 비단 주차장뿐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아파트 입구, 복도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엄마, 아빠!”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모님이 나를 환하게 반겼다.
“아들, 왔어?”
“네, 잘 지냈지?”
어머니는 나를 와락 품에 안아 반기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요즘 이렇게 아들 자주 보니까 너무 좋다.”
그녀의 말에 아버지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제 곧 촬영하러 미국 가는 거지?”
아버지의 말에 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나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다음 주에 가요. 이제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한국에 있을 때 자주 온 거야.”
어머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잘나가니까 너무 기분은 좋은데, 또 한참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슬프네.”
이내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휴지를 툭 건네며 말했다.
“애도 힘들게 일하러 가는데, 그렇게 희성 엄마가 속상해하면 희성이도 힘들어. 울지 마.”
“아유… 엄마가 주책이다. 우리 아들 고생하러 가는데……. 몇 달만 참으면 되는걸.”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몇 달이 아니었다.
이번에 LA로 떠나 영화 촬영을 끝내고 나면… 다시는 부모님을 못 볼 테니까….
차가운 듯한 아버지는 우는 어머니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재차 휴지를 건넸고.
나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지만, 그 눈물을 꾹 참아냈다.
부모님을 두고 사라져버릴 거라는 건, 나밖에 모르는 사실이니까.
그저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부모님을 안심시키려 입을 열었다.
“아휴, 항상 하는 일인데, 뭘 이렇게 속상해해.”
나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향해 재차 말했다.
“엄마, 나 엄마 밥 먹으러 왔는데, 밥 안 줄 거야?”
내 말에 어머니는 급히 눈물을 훔치며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해줘야지. 우리 아들이 엄마 밥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이 제일 듣기 좋더라? 호호.”
어머니는 이내 활짝 웃으며 주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평소라면 어머니가 힘들세라 항상 외식을 추구했지만.
오늘만큼은 어머니의 밥이 먹고 싶었다.
또다시 먹을 수 없을 테니까….
식사를 모두 마친 후.
재빨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직 해야 할 일도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더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만난 사람.
“오셨습니까, 진희성 님.”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반기는 사람.
내 담당 황주섭 변호사였다.
“황 변호사님, 오랜만입니다.”
그와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회사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 개인 변호사를 둘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번에 변호사에게 부탁해야 할 일들이 생겼고.
예전부터 나를 담당한 변호사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이지.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저번에 회사 일로 한 번 뵌 적이 있었죠.”
그는 내 앞에 차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렇죠.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갑작스레 찾아가겠다고 연락한 터라, 황 변호사는 내게 그 이유를 물었고.
나는 차를 한 입 조심스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예, 제가 죽게 됐을 때… 재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커지려는 목소리를 겨우 눌러내고 말했다.
“네? 죽게 됐을 때라니요…?”
내가 사라지게 되는 게 언제인지, 어떻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대비해둬야 했다.
남은 이들에게 내 죽음의 슬픔을 남기는 건 안타깝고 슬펐지만.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남은 재산뿐이었다.
재산은 미리 생각해둔 대로 대부분은 부모님에게로 가도록 정리를 했고.
일부는 김 실장에게로 지정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잖아요. 미리 해둬서 나쁠 게 없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황 변호사는 굳은 얼굴로 내 이야기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희성 님.”
***
김 실장과 나는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다, 희성아. 네 덕분에 오늘 일찍 오기는 했는데. 무슨 일로 그렇게 일찍 나와 있었어?”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냥. 형 전화 오기 전에 주차장으로 내려가 있었지. 그래서 편하지 않았어?”
늘 스케줄을 갈 때마다 시간을 정해두지만.
김 실장은 연예인인 내가 홀로 주차장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며, 늘 전화를 주면 그때 집에서 나오라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김 실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주차장에 있었고.
그 모습이 궁금하고 의아했던 모양이다.
“뭐, 편하긴 했는데. 그래도 다음부터는 내가 말하면 내려와.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몰라. 언제 어디서 괴한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하하, 알겠어.”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할리우드 간다고 설레서 일찍 나와 있었구나?”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그런 것도 있지. 근데 형이 와서 전화하면 전화가 안 될 거 같아서 내려가 있었어.”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화가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리지?”
김 실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내 손에 들린 휴대 전화를 보이며 답했다.
“나, 이거 정지시켰어.”
“뭐라고?”
그의 큰 목소리에 옆에 앉은 승객이 김 실장을 흘긋 바라보았고.
김 실장은 승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서둘러 내 눈을 보았다.
“휴대 전화, 해지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잠깐 멈추는 게 아니라, 아예 해지를 했다는 말이야?”
“어, 해외에서 오래 있을 거잖아.”
내 말에 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번 작품보다 더 짧게 있을 거잖아. 이번에는 짧고 빠르게 찍기로 해서, 몇 달만 있을 건데. 대체 왜?”
그의 말이 맞았다.
지난번 작품으로 LA에 있을 때도 나는 휴대 전화를 단 한순간도 정지한 적이 없었다.
국제 전화라 대부분 데이터만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지를 할 생각도 없었지.
하지만 더욱 짧은 기간을 떠나는데, 휴대 전화를 해지했다는 말에 김 실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서서히 모든 것과 멀어지려는 생각이었다.
한순간에 쓰윽 사라지는 건, 나를 위해서도 남은 이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테니까.
세상과도, 그리고 마음들과도 정리를 하려는 것이지.
김 실장이 내 눈을 바라보며 쓰읍 소리를 내뱉었다.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가서 이것도 잘 안 쓸 텐데, 뭐.”
나는 휴대 전화를 흔들며 말했고.
“희성아, 너 무슨 삶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 같다? 하하.”
그는 농담 섞인 말투로 내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가슴을 쿡 찔러왔다.
“정리는 무슨….”
김 실장의 농담에도 나는 그와 함께 호탕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씁쓸한 미소로 그에게 답을 보낼 뿐.
그 말이 진실이었으니까.
***
LA에 도착해 우리는 영화 ‘다시 살아온 생명체들’ 측에서 제공한 호텔로 이동했다.
지난 ‘9월 11일’에서의 숙소는 대저택의 느낌이었다면.
이번 숙소는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다.
“형, 여기 호텔이야?”
김 실장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몇 층인 줄 알아?”
기대감에 가득 찬 그의 눈빛.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김 실장과 함께 들어선 곳은 호텔의 가장 높은 층.
무려 펜트하우스였다.
몇 평인지도 알 수 없는 드넓은 거실.
김 실장은 입을 떡 벌린 채 소리쳤다.
“와아… 여기 대체 뭐야?”
그의 말에 나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주변을 살폈다.
김 실장이 빠르게 방 안을 뒤적였기에.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만큼 방문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이었지.
그러고는 이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김 실장의 목소리.
“희성아, 여기 화장실만 4개야. 욕조가… 와아… 나 이런 욕조 영화에서 본 적 있는데!”
김 실장은 그렇게 한참을 멈추지 않고 방 구경을 했다.
몇십 분 뒤.
김 실장이 진정을 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거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형, 근데 너무 좋은 데로 준 거 아니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치, 네가 봐도 장난 아니지?”
“어, 여기 대체 하룻밤에 얼마래?”
김 실장은 아무도 듣지 않는, 우리밖에 없는 방이었지만 주변을 쓰윽 둘러보는 시늉과 함께 조심스레 말했다.
“하루에 보통 10,000달러래.”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
“…천 달러도 아니고, 만 달러라고?”
만 달러라면, 환율마다 다르겠지만 한화로 하룻밤에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근데 장기 숙박이라 대충 한 달에 250,000불 정도로 합의 본 것 같더라고.”
“아니… 형, 그럼 지금 환율로만 봐도 거의 3억이 넘는 돈이잖아. 한 달에 숙박에만 3억…?”
내 말에 김 실장이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미국 스케일은 매번 놀랍지. 애초에 희성이 너 출연료 얼마인지 기억 안 나?”
그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출연료를 떠올렸다.
“…500만 불.”
“그래, 우리나라 돈으로 60억이 넘는 돈이야. 그러니 숙소에 이 정도는 해줄 만하지.”
“아무리 그래도….”
김 실장이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너 휴대 전화도 새로 하자.”
“응?”
“나랑 몇 달 동안 24시간 붙어 있을 것도 아니고, 연락은 하고 지내야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그래도 여기서 새로 휴대 전화나 장만할까 생각하기는 했어.”
그는 피식 웃으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답했다.
“희성이 너 미국에서 휴대 전화 새로 사고 싶어서 한국에서 해지하고 온 거구나?”
그의 말에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장단을 맞췄다.
“그렇다고 하지 뭐.”
내 미소를 보며 김 실장은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근데 할리우드 스케일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기는 하다. 이런 펜트하우스에 60억의 출연료에. 크으….”
김 실장의 말을 곱씹으며 나 역시 호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마 내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이번 영화.
아니, 내 모든 삶… 1만 년의 정수가 녹아든 마지막 작품.
단 한순간도, 단 한 장면도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되돌아봤을 때, 모든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