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41 – 결실 (4)
이렇게 수많은 대본 중 하나의 작품에 미친 듯이 꽂힐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많은 대본은 모두 보석과 같은 작품들이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고를 수가 없을 정도로 전부 완벽한 작품이었지.
그래서 작품을 고르는 데만 몇 주, 아니 몇 달이 걸릴 거라 예상했다.
완벽한 작품들 사이에서 내게 더 맞는, 나를 잘 표현하고 ‘진희성 배우’를 증명할 만한 작품이 필요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줄곧 하나의 작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너무 하고 싶은,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나는 그날 이후 하나의 대본만을 수십, 수백 번 보고 공부하기 시작했지.
그렇게 오늘도 대본을 보기 위해 회사 연습실에 도착했고.
앉은 자리에서 다시금 대본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여러 번 반복하여 살펴보았다.
“이건 아무리 읽어도 새로운데?”
눈썹을 들썩이며 대본을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김 실장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희성아!”
그의 부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형!”
우리는 고작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마주 보며 소리쳤고.
그는 밝은 얼굴과 약간 검게 탄 모습으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김 실장이 없는 일주일은 처음이었다.
물론 스케줄이 없을 때, 김 실장 없이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을 다닌 적은 있지만.
그가 없이 회사에 매일 나온 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꼭 김 실장을 만났으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근데 뭐 빈자리가 느껴지기는 하더라?”
내 말에 김 실장은 오히려 기분이 좋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희성이 네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니까?”
“에이, 이제 그런 말 하면 큰일 나. 형수님이 들으시면 우리 사이 의심하실걸? 하하.”
그는 내 말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김 실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형.”
“응?”
“뭐야, 그러고 보니까 형 왜 이렇게 살이 쪽 빠졌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고.
나는 심각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분명히 살 빠졌어. SNS 보니까 매일 먹는 거 엄청나게 올리더니.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이 핼쑥해져서 온 거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입술에 힘을 주고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로 내 몸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있어. 우리 희성이는 어리니까 아직 몰라도 돼.”
“…뭐야. 하하.”
김 실장이 허공에 손을 휘이 가로저으며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휴, 됐고. 너 이거나 받아.”
“이게 뭔데?”
그는 내게 쇼핑백을 건네며 말했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쇼핑백을 받았다.
“신혼여행 갔는데, 마땅히 사올 건 없고. 가서 예쁜 옷 있길래. 네 형수랑 같이 골랐어.”
서둘러 쇼핑백을 열자,
그 안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의 셔츠가 몇 장 들어 있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쳤다.
“뭐야, 왜 이렇게 비싼 걸 샀어. 그리고 한 장이면 되지, 뭐 이렇게 여러 벌이야?”
김 실장이 내게 선물로 건넨 셔츠는 다름 아닌 명품들이었다.
내가 쇼핑백을 밀어내며 그에게 말하자, 김 실장이 다시 쇼핑백을 손으로 밀며 답했다.
“받아. 그리고 너 왜 그렇게 축의금을 많이 했어!”
그가 내게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을 담아 다그치듯 말했지만.
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몰라. 그럼 아무튼 이 선물은 잘 받고, 잘 입을게. 형수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줘.”
“응, 조만간 여자 친구, 아니 이제 아내라고 해야지. 아내랑 같이 식사 한번하자. 좋은 거 살게.”
“좋지!”
그때 김 실장이 눈을 크게 뜨고 내 앞에 놓인 대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 뭐야, 대본 골랐어?”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 이거 대본 봤어?”
“아직. 근데 이번 대본 좋은 거 정말 많더라.”
김 실장의 말에도 나는 내 앞에 놓인 대본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는 이거 말고는 이제 눈에 안 들어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이거로 내가 미팅 한번 알아볼게.”
아직 대본을 읽지도 않은 그가, 바로 미팅을 알아보겠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대본 안 읽었다며?”
“응, 근데 네가 이미 이거 말고는 눈에 안 들어온다며. 이제 나는 네 안목을 진짜 믿거든.”
그는 대본을 집어 들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목소리.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쩍쩍 갈라지고,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한숨뿐.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꿈이라는 것을….
눈을 뜨자 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
그리고 무너져가는 집들.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
이곳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
사람들은 도망치며 소리쳤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안겨 생을 마감하고 있는 사람.
숨이 간당간당 붙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 사람.
그녀를 안은 채 나는 울부짖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아무리 소리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살아올 수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1910년대…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다.
쉽게 목숨을 살리지도, 산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나는 행복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살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녀를 보내줄 뿐….
“사… 사….”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입에서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뻥긋거렸고.
나는 사시나무 떨듯 하는 몸을 겨우 참아내며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 사랑해,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만…나자, 우리….”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입술에 피가 흐를 정도로 잘근 깨물었고.
결국, 그녀의 입에서 듣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
“안 돼!”
그렇게 나는 정신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안은 채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고.
가빠지는 호흡.
흐릿해지는 시야.
점점 눈앞에 어둠이 보일쯤.
팟-!
“하아… 하아….”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이런 꿈이….”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내 목숨보다 사랑한 그녀를 잃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그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송유나.”
할리우드에서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녀가 내가 사랑한 이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다시금 그녀와 생이별을 하는 꿈을 꾸자, 나는 지금껏 느끼지 못한 슬픔에 잠겼고.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달력을 끌어당겨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1년 남짓… 남은 거네.”
1만 년의 삶.
이제 그 삶이 정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송유나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그녀와 함께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촤르르 펼쳐졌다.
1910년대에 만났던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던 송유나의 과거.
그리고 그 이후의 생에서도 만났던 송유나.
그녀는 비록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가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신은 지독하게도 또다시 내 눈앞에 송유나를 데려다 놓았다.
“이제 진짜 마지막인 건가?”
송유나와 수없이 마주했던 생.
하지만 이번 생은 정말 그녀와 마지막이겠지.
두 뺨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고.
지금 떠오르는 이 느낌이 1만 년의 삶이 끝나 가서인지, 송유나를 떠올려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송유나’ 그녀뿐이었다.
***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탓에 가시거리는 코앞에 앉은 사람뿐이었다.
“저기 멀리에 가는 저자가 내가 말한, 500년을 살았던 자라네.”
“그때 인간 세상에 300년 살 때 만났다던 자가, 저자구먼?”
그럼에도 그들의 시야에는 아주 먼 곳까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왜냐, 그들은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그러니까 태어나 순리대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보통의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름과 같은 새하얀 연기 위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등받이가 위로 길쭉한 빨간 벨벳 소재의 천.
그 빨간색을 고급스럽게 감싸고 있는 번쩍이는 황금색의 테두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
중절모를 쓴 자가 검은 망토를 감싼 사람에게 물었다.
“맞다, 그때 이야기한 첫 번째 생(生)을 사는 그 인간은 어떻게 되었나?”
그의 물음에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은 이제 정말 마지막을 앞두고 있을 터인데.”
“이제 슬슬 끝나가지 않나? 이미 끝이 났나?”
중절모를 쓴 사람이 흥미롭게 재차 물었고.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은 입꼬리를 올리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타앗-!
그의 손길에 켜진 모니터.
그 모니터에는 진희성이 침대에서 일어나 이유 모를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진희성의 오열하는 모습에 중절모를 쓴 사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살아 있구먼그래. 내가 아주 재밌는 장면을 놓칠 뻔했네.”
“그래, 1만 년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그 재미난 일을 놓쳐서 되나. 지금 저렇게 울고 있는 걸 보니, 이제 곧 시작되겠구만.”
그의 말에 중절모를 쓴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시작되다니?”
검은 망토를 감싼 자가 망토를 쓰윽 넘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형벌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될 걸세.”
“하이라이트라…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건가?”
그는 몸을 앞으로 당겨 흥미로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썹을 들썩이며 읊조렸다.
“이제 저자는 매일같이 꿈을 꿀 거야.”
“설마… 그 꿈을 매일 꾼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기겁하듯 물었고.
검은 망토 남성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아주 지옥 같을 거야.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말이야.”
옆에 앉은 남성이 치를 떨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중절모를 푸욱 눌러쓰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하지만. 1만 년의 삶을 사는 저 벌은 정말이지 잔혹해.”
“그렇지. 하지만 그 1만 년을 살며 느꼈던 고통보다 이제 곧 다가올 마지막 선택이 가장 잔인할 거야.”
중절모의 남성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이제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오겠구먼.”
그는 깍지를 낀 채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빨리 그날이 다가오면 좋겠어.”
옆에 앉은 남성이 망토를 휘이 둘러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렸다.
“저 인간에게 남은 시간이 애석하게도 끝이 보이는구먼그래. 과연 인사나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