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41 – 결실 (3)
백억이 넘는 돈.
김 실장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함과 더불어 그에게 최고의 결혼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김 실장을 위해 그가 항상 꿈꿔오던 드림 카를 선물해 주었고.
그 순간만은 내가 뭐라도 된 듯 너무나 행복하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쓰고, 선물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할 일인가?
그리고 여전히 내 통장에 남은 잔액은 100억, 그 이상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로 멍하니 통장 잔고를 바라보았다.
“의미 있게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나를 위한 플렉스.
그동안 고생하며 일한 내게 주는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마땅히 원하는 건 없었다.
“1만 년이나 살았는데… 물욕이 있을 리가….”
지나온 삶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1만 년 동안 플렉스했던 것들.
나를 위해 필요한 물품, 값비싼 것들을 수없이 사기도 했다.
그런 필요한 것을 떠나, 말 그대로 사치일 필요는 없지만 사고 싶은 물건들까지 모두 사봤지.
1만 년을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해야 하는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까지 모두 하며 지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큰돈이 쌓여 있어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걸 해봤기는 하지.”
그리고 순간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백억을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그리고 알차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마친 후.
그로부터는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님의 집을 사드리는 일.
몇 주 내내 홀로 부모님 지역의 집을 알아보았고.
이제는 부모님을 그 집으로 모시고 갈 차례였다.
“그래서 우리, 밥은 어디로 먹으러 갈 건데?”
차에 탄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밥 먹기 전에 어디 좀 들르려고.”
“그래, 희성이 아빠도 배 많이 안 고프죠?”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희성이 갈 데 있으면, 들러도 돼.”
“응, 잠시만요.”
달리던 차는 이내 내가 계약한 아파트에 멈춰 섰고.
나는 터져 나오려는 뿌듯함이 섞인 미소를 겨우 삼켜내며 차 문을 열었다.
“엄마, 아빠. 여기서 내리면 돼요.”
“여기는 아파트 아니야?”
“네, 여기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러자.”
부모님은 어리둥절해했지만, 그럼에도 내 말에 곧장 차에서 발을 내렸고.
나는 계약해둔 호수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쿵쾅대는 심장.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찾은 집.
마음에는 들어 하실지, 어떤 반응으로 기뻐하실지, 너무나 기대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나는 3001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빠. 여기가 내가 들른다고 한 곳.”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물었고.
아버지 역시 내게 말했다.
“그래, 여기 진짜 좋은 아파트잖아. 이 아파트가 한 층에 호실도 딱 하나야. 특히 이 101동이 평수가 엄청나게 큰 거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상업적으로 쓸 호실이 아닌 것 같은데?”
이곳은 당연히 부모님의 동네였기에 이 아파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 집 문을 열 듯 비밀번호를 클릭해 문을 열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무슨 일이냐는 듯 당황한 얼굴로 따라오는 부모님.
나는 곧바로 문을 열며 소리쳤다.
“여기 이제 엄마, 아빠 집이야!”
“뭐?”
드넓게 펼쳐진 거실.
30층인 만큼 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 뒤를 따라왔고.
어머니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내게 물었다.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여기가 이제 엄마, 아빠 집이야.”
“아니… 새집은 아닌 것 같은데? 안에 가전 가구가 이렇게 다 들어와 있잖아. 여기가 대체….”
그녀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엄마, 이거 내가 다 사둔 거야. 어때, 최대한 엄마 아빠 취향으로 고른다고 골랐는데, 마음에 드셔요?”
아버지는 당황한 얼굴로 집을 둘러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물었다.
“뭐야, 장난이야 진짜야? 다 늙은 부모 놀리면 못 써.”
“하하, 아빠 진짜야. 마음에 들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부모님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아버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희성아… 아니, 힘들게 벌어서 우리한테 이렇게 쓰면 어떻게 해….”
어머니는 끝내 오열하듯 눈물을 두 뺨에 흘렸고.
나는 그들의 모습에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왔다.
서둘러 눈에 눈물을 감춰내고, 자리에 앉아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 이제 돈 많이 벌어요. 이 정도는 부모님한테 효도할 능력이 되는 아들이라는 거지.”
“그래도….”
“엄마, 아빠. 그리고 이제 일도 은퇴하셨으면 해요. 제가 매달 용돈 충분히 보내드릴 수 있고요. 엄마, 아빠도 그동안 힘들게….”
아버지는 눈물을 삼켜내며 내 말을 잘랐다.
“희성아,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우리는 일을 쉴 사람들이 못 돼. 오히려 우리는 쉬는 게 더 힘들어.”
그의 말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맞아. 너도 이제 미래도 준비해야 하고, 우리 노후는 충분히 우리가 신경 쓸 수 있어.”
차마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게 미래가 있을까?
1만 년의 삶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아니야. 나 이렇게 잘 키워준 부모님에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나도 계속 일하면서 돈 벌 건데, 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아버지가 그 적막을 깨며 내게 말했다.
“아들, 그럼 이건 어때?”
“네?”
“우리에게 매달 용돈을 주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건물을 사자. 서울에는 가격이 비쌀 테니까, 여기에 건물 사놓고, 그렇게 세 받으면서 꾸준히 자산을 불려나가는 게 더 낫다고 보는데. 아들 생각은 어때?”
아버지의 말에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서울이 아니기에, 이렇게 넓고 전망 좋은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부모님에게 매달 용돈을 드리지 못할 터.
이렇게 건물을 남겨 부모님 앞으로 돌려드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아빠가 부동산에 대해 더 잘 알고, 이 동네는 아빠가 훨씬 더 많이 아니까. 엄마, 아빠가 건물 알아보고, 관리해 주세요.”
내 말에 아버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알아볼게.”
여전히 눈가에 눈물이 고인 아버지와 눈물을 계속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
나는 그런 부모님을 바라보며 겨우 눈물을 삼켜냈다.
그리고 가장 의미 있게 쓰이게 된 돈.
확 줄어버린 통장을 생각해도 나는 너무 뿌듯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것일 테니까.
***
한 달 뒤.
이제는 정말 쉴 만큼 쉬었다 생각했다.
일을 손에서 놓은 채, 부모님과 길게 보냈던 휴식.
그리고 그 덕에 김 실장도 결혼 준비 막바지를 알차게 보냈지.
이제는 다시 작품을 찾아야 할 때였다.
연습실에 앉아 김 실장을 기다리던 그때.
아버지에게서 온 톡 알람.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들, 저번 주에 같이 봤던 그 건물들로 오늘 계약했다. 건물 3개. 건물 이름은 차례로 ‘진’, ‘희’, ‘성’으로 지었어.^^
본가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며, 부모님과 보고 다녔던 건물들.
결국, 마음에 들었던 건물 3개로 계약을 한 듯했다.
아버지가 지은 건물 이름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짜… 건물 이름 짓는 것까지. 아들밖에 모르신다니까. 하하.”
그때.
김 실장이 연습실 문을 벌컥 열었고.
그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형, 그게 다 뭐야?”
“이거 대본이지.”
“그게 전부?”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에 대본을 와르르 쏟았다.
“나 잠깐 본부장님 좀 만나고 올게. 이거 보고 있어.”
“알겠어.”
김 실장이 떠나고 남은 대본들.
“와아….”
나는 내 앞에 쌓인 대본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건 지금까지 받았던 대본들에 비해 어마어마한 양이 아닌가.
대본의 개수 자체가 예전과는 비교 불가였지.
아니, 양을 떠나 작품과 내가 맡을 배역이 굉장히 달라졌다.
할리우드의 작품들도 눈에 띄게 보였고.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작품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내가 항상 바라고 바라던 꿈.
나는 대본을 바라보며 벅찬 가슴으로 읊조렸다.
“이제 꿈을 이루기까지는 정말 몇 발자국 안 남았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쌓인 대본을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대본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전에는 아무리 많은 대본이 쌓여 있어도,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작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저 그런 작품의 대본들.
이게 내게 들어온 게 맞는 건가? 싶은 대본들도 많았지.
많은 대본 중 보석을 찾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대본이 보석과 같았다.
그만큼 내 위치가 올라갔다는 것이고, 이전과 동일하게 보석과 같은 작품을 골라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나를 증명해낼 수 있는 작품을 골라야만 한다.
***
북적거리는 이곳.
서둘러 준비해온 봉투를 꺼내 건넸다.
내 봉투를 보고 놀라는 눈빛들.
“…헐.”
하얀 봉투 모서리 네 면이 찢길 정도로 두둑하게 담은 노란색 지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내밀었고.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남성이 내게 말했다.
“아… 맞다. 그… 식권…. 식권은 몇 장 드릴까요?”
나는 당황한 그의 말에 방긋 웃으며 검지를 뻗었다.
“한 장 부탁드릴게요.”
“네, 여기….”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김 실장에게 몸을 돌렸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야, 새신랑. 이렇게 형이 차려입으니까, 완전 딴사람 같은데?”
“그래? 하하, 다행이네.”
“어. 오늘은 형이 연예인이고, 내가 매니저야. 열심히 사회 볼 테니까, 떨지 말고 멋있게 입장해.”
그는 파르르 떠는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고맙긴, 떨지 말고!”
“응, 그럴게.”
김 실장의 부탁으로 보게 된 결혼식 사회.
연예인이라는 직업 특성상, 자칫하면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에게 민폐가 될까 걱정돼 사회를 거절했지만.
재차 부탁하는 김 실장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수였다면 축가를 하겠지만.
배우인 내가 그를 위한 축하 무대를 할 것이 없었으니까.
축가 대신 자신의 결혼식 전체를 도맡아 줬으면 한다는 그의 부탁이었다.
몇십 분 뒤.
나는 심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 마이크 앞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아, 잠시 뒤 결혼식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내 말에 북적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
김 실장은 결혼식이 끝난 후 곧장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에도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내게는 쌓여 있는 대본, 숙제가 있었으니까.
나를 보여줄, 나임을 증명해 보일 작품을 고르려면.
당연히 이 작품을 모두 읽어야 했다.
나는 오늘도 아침부터 눈을 비비며 어제 보던 대본을 이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어느새 안 읽은 대본이 몇 권 남지 않았다.
“하암….”
몇 시간째 움직이지 않고 대본을 보다 보니, 찌뿌듯한 몸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잠깐의 휴식만을 취한 채, 나는 다시금 대본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때.
“어? 이거 뭐야.”
내 시선을 이끄는 한 대본.
그 대본을 빠른 속도로 읽어 넘겨갔고.
어느새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왔다.
“…이거다!”
그런 후 대본을 덮고 제목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할리우드… 다시 가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