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40 – 그녀들의 의도 (6)
“희성아!”
회사 연습실에 있던 나를 보자마자 김 실장이 달려 들어왔다.
그런 김 실장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형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그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양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우리 잡혔어.”
“응? 뭘 잡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그는 침을 크게 삼키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개봉일.”
개봉 날짜가 잡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올 일인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 때문에 이렇게 급히 온 거야?”
“개봉일이 더 앞당겨졌거든.”
“헐, 더 당겨졌다고?”
그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답했다.
“응, 진짜 할리우드가 대단한 건지, 제프리 감독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임스 감독이랑 개봉일 딱 맞췄더라. 그래서 엄청나게 빨리 작업을 끝낸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정면 승부하려고 제프리 감독님이 애 좀 쓰셨겠네.”
“게다가 우리 예능 프로그램 방영 날짜가 개봉일 이 주일 전이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딱이네!”
“어, 프로그램에 날짜 최대한 미뤄줄 수 있냐고 하려던 참이었거든. 아무리 일찍 예능 프로그램 나와서 홍보한다고 해도, 개봉 직전에 방영하는 게 제일 좋기는 하니까 말이야.”
“그렇지. 그래야 방송 보고 사람들이 바로 영화 보러 갈 테니까.”
김 실장 역시 입꼬리를 올린 채 머리를 끄덕였다.
“완전 잘된 거지. 가서 잘하고 와.”
“응, 예능에서 홍보 열심히 하겠지만,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홍보가 되겠다.”
그와 나는 눈을 맞춘 채 미소를 지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
예능 프로그램에서 내 이미지가 급격히 꺾이지만 않는다면, 영화 홍보는 무조건 도움이 될 것이다.
기대감을 가진 채 입꼬리를 올렸고.
동시에 느껴진 부담감에 어깨가 내려앉았다.
할리우드의 영화가 한국에서 늘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9·11테러를 다룬 인기 감독의 영화 두 개가 동시에 개봉하고.
한국에서는 그 경쟁의 중심에 한국 배우인 내가 있으니까 말이다.
비슷한 관객 수로, 겨우 제프리 감독 영화가 이기게 된다면.
언론에서는 분명 내 탓으로 돌리거나, 이겨야 본전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감독의 영화가 이기게 된다면.
그 패배의 원인은 오롯이 한국 배우인 내가 떠안게 될 터.
무조건 내가 출연한 영화, 제프리 감독의 영화가 제임스 감독을 이겨야만 한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미 촬영은 끝이 났고, 나는 촬영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노력은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홍보뿐.
당장 출연하게 될 예능 프로그램에 온 정성을 쏟아내야만 한다.
***
드디어 예능 프로그램 ‘토요일의 수다’ 녹화가 있는 날.
홍보를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현장으로 향했고.
방송국에 다다를수록 프로그램을 잘 찍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희성아.”
“응?”
“긴장돼?”
내 표정을 단번에 알아차렸는지,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살짝.”
“예능 프로그램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 편하게 하고 와도 돼.”
“그렇긴 한데…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영화 관객 수에 영향을 미칠까 봐 좀 걱정이 되네.”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이미 네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거, 그리고 제프리 감독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어. 가서 편하게 하고 싶은 말 하고 와도 돼.”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김 실장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갔다.
“가서 굳이 뭘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그저 네 이야기 편하게 털어놓고 와.”
그의 진심이 담긴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형.”
“응, 곤란한 질문도 없을 거고, 재밌는 인터뷰한다고 생각해. 편하게 즐기고 와.”
“고마워.”
김 실장의 응원과 함께 나는 스튜디오로 발길을 옮겼다.
짝-!
슬레이트와 함께 밝혀진 불.
환한 조명이 내 시선을 가득 채웠다.
눈에 가득 담긴 밝은 조명에도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미소를 유지하며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푹신한 소파.
그리고 앞에 놓인 음료와 다과.
내 옆 소파에 앉은 MC 이승현이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토요일을 뜨겁게 불태우는 토요일의 수다, 이승현입니다!”
그의 오프닝 인사와 동시에 현장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늘 저와 함께 긴 수다를 떨어주실 분. 긴말하지 않고, 바로 소개 올리겠습니다.”
이승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에는 영상이 재생되었는데.
그동안 내가 출연했던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들을 편집한 것이었다.
영상을 바라보며 이승현이 입을 열었다.
“떠오르는 신예라고 소개하던 배우. 하지만 그 신예는 순식간에 안방 배우로, 그리고 국민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배우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배우가 되어 할리우드로 진출했죠?”
나를 치켜세우는 멘트에 멋쩍은 미소로 마른침을 삼켰다.
“할리우드에서 제프리 감독과 손을 잡아 촬영한 뒤, 돌아온 우리의 배우! 진희성 배우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그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모니터의 영상도 종료되었고.
나와 이승현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희성 배우님. 저희 토요일의 수다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한번 부탁드릴게요.”
“네.”
“물론 진희성 배우를 모르시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의 너스레에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고 빨간 불빛이 들어온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제프리 감독님과 함께 ‘9월 11일’ 영화를 촬영한 배우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내 말에 이승현은 박수로 나를 환호했고.
그는 바로 내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희성 씨를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하신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많은 관심 역시 희성 씨에게 쏟아졌는데요. 우선, 할리우드에 진출하시게 된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승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우선 제가 운이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뉴욕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저도 알고 있는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뉴욕에서 즉흥 연극 영상이 돌았던 거,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그게 연극을 보러 갔을 때, 즉흥으로 연기를 펼치게 되었는데요. 그 영상이 그렇게 퍼질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못 했죠.”
이승현은 환하게 웃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미 유명한 영상이지만, 아직 그 영상을 접하지 못하신 시청자분들을 위해 먼저 보여드리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영상 보시죠!”
이내 현장에는 내가 뉴욕에서 펼친 연극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 우연한 계기로 할리우드의 몇 감독님들이 제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럼 뉴욕에 홀로 여행을 가셨던 건….”
이승현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고.
나와 그는 서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점점 분위기가 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촬영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 밝은 목소리와 환한 미소로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그럼 희성 씨는 할리우드에서 그 배우분들을 모두 보시고, 대화도 나누셨겠네요?”
워낙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했던 촬영.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그 배우들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는 듯 물었고.
나는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그럼요. 대화뿐이겠어요?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는걸요? 하하.”
내 말에 그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요. 함께 촬영하면 당연한 건데. 리암, 브루노 등 여러 배우와 함께하셨다는 게 너무 신기합니다. 하하.”
“저도 처음에는 정말 신기했어요. 이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다니, 내가…. 이런 느낌으로요.”
나와 이승현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그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물었다.
“그럼 혹시 9월 11일에 출연하시는 에블린 배우님과 함께 모임도 하고, 파티도 하신 건가요?”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하죠.”
“우와….”
그는 지금껏 묻던 말과는 달리, 어투에서 팬심이 뚝뚝 묻어 나왔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승현 씨, 에블린 배우님 팬이세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죠. 에블린 배우 팬이 아닌 사람도 있을까요?”
그는 서둘러 나에게 재차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제가 진희성 님 팬이기도 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촬영이 끝나고도 다른 배우 분들과도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그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일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서로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이승현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혹시 전화 연결 가능한 배우님이 계실까요?”
그의 말에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음… 어떤 배우에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다 문득 이승현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이내 입꼬리를 길게 휘며 말했다.
“그럼 에블린에게 한 번 전화해 볼까요?”
내 말이 끝나자 이승현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우와, 저 에블린 배우님 정말 팬이거든요. MC인 제 생각까지 해주시다니, 진희성 배우님은 정말 멋진 분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지금 시간이… 안 받을 수도 있지만,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을 확인했고.
미국과 엄청난 시차가 나기에, 에블린이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 전화에 마이크를 연결한 채 발신 버튼을 누르자,
울리는 신호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연결음.
연결음이 몇 번 반복되자, 이승현이 눈썹을 늘어뜨린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아무래도 시차 때문에… 전화를 받으실 수가…”
그때.
-오오, 희성!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에블린의 밝은 목소리.
이승현은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블린, 나예요. 진희성.”
-당연히 알죠.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럼요. 에블린, 지금 내가 한국에서 방송을 하고 있는데….”
에블린은 나와 있었던 촬영장 소소한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듯 얘기했다.
그녀의 덕에 내 위상이 오르고 있었고.
이승현은 엄지를 치켜들며 탄성을 내질렀다.
“크으, 역시 월클! 월드 클래스시네요, 희성 배우님.”
“아닙니다.”
“인맥이… 대단하세요.”
그렇게 나는 프로그램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은 채로 촬영을 이어갔다.
***
-토요일을 뜨겁게 불태우는 토요일의 수다, 이승현입니다!
TV 속 목소리에 박순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소리쳤다.
“드디어 희성 오빠 나오는 토요일의 수다 시작한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시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TV 속 진희성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헐, 희성 오빠 오늘도 잘생긴 것 좀 봐….”
박순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진희성의 모습을 눈에 담기에 바빴다.
그렇게 프로그램에 집중한 채로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한쪽에는 TV, 다른 한쪽에는 팬 카페를 켜둔 노트북을 열어두고,
실시간으로 다른 팬들과 소통하며 방송을 바라보았다.
“역시 우리 오빠 할리우드 다녀오더니, 더 멋있어진 게 분명해.”
그녀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TV 속 진희성을 찍었고.
캡처한 그 화면을 팬 카페에 게시했다.
-희성 배우님이 월클인 거죠.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주연도 맡으시고, 더 잘나가시면 오늘 저와 했던 방송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승현의 말에 진희성이 민망한 듯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
-아휴, 당연하죠. 앞으로 더 좋은 모습으로 시청자 여러분 앞에 서겠습니다. 그리고 제 팬 진희성수기 여러분께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배우가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희성의 말에 박순희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눈을 연신 깜빡였다.
“뭐야… 우리 오빠 진짜 월드 클래스 되어 가는구나…!”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물을 머금은 채 읊조렸다.
“우리 오빠 잘되니까, 진짜 너무 행복해. 당장 영화 예약 예매부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