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40 – 그녀들의 의도 (5)
몇 달간 해외에서 촬영했고, 개봉을 앞두고 있기에.
다른 작품을 찾기 위해 대본을 보지는 않았다.
제프리 감독과 함께한 첫 할리우드.
그 작품이 발판이 되어, 다음 작품은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아직 다음 작품을 정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판단이었고.
내게는 그저 휴식을 취하라는 것뿐이었지.
하지만 나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회사에 나와 연습해야 할 대본은 없었지만.
헬스를 하며 몸을 만들고, 여러 역할의 대본을 보며 연습을 이어갔다.
다음 작품에서 어떤 배역을 맡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기에.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사에 나와 연습을 하던 그때.
똑똑.
김 실장은 연습실 밖에서 웃으며 노크를 했고.
“어, 형.”
“희성아, 또 연습하고 있었어?”
그는 내 앞에 쌓인 대본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응, 안 해봤던 배역들로 연습 좀 해보려고.”
김 실장이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형, 갑자기 여기는 왜 온 거야?”
“아, 할 말이 있어서.”
“뭔데?”
그는 앞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내게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예능. 하나 잡혔어.”
“진짜?”
나는 보고 있던 대본을 덮고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응, 이번 달 안으로 촬영할 거고, 방송 날짜는….”
그는 내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했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김 실장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직 영화 개봉일이 잡히지 않은 상황이라, 날짜를 딱 맞출 수가 없었기에.
방송 날짜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음… 좋은데. 개봉일이 얼른 정해졌으면 좋을 텐데.”
“맞아. 근데 이미 제프리 감독이랑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거 기사 통해서 다들 알고 있고. 지금부터 서서히 대중들에게 각인시켜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네. 유명한 예능 몇 편 나가고, 개봉 때쯤 방송 더 하면 충분하겠다.”
“어. 사실 예능 안 한다고 하더라도, 희성이 네 팬분들이랑 제프리 감독의 팬들도 많으니까. 충분하기는 하지.”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고.
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도 열심히 홍보해야지. 제임스 감독 영화보다는 꼭 잘되어야 하니까. 근데 형, 이번에 잡힌 예능은 뭐야?”
내 말에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이번 예능 잡은 거, ‘토요일의 수다’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오오, 토요일의 수다. 요즘 엄청나게 시청률 높은 거 아니야?”
그는 내 답에 입꼬리를 올렸다.
“어. 그거 방송 끝나면, 항상 SNS에 짤들도 돌아다니고 편집본도 엄청나게 나오는 거 알지?”
토요일의 수다, 예능 프로그램은 토요일 황금대의 시간인 저녁 7시.
방송 3사를 통틀어 시청률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한 명의 MC, 한 명의 게스트로 이루어진 방송.
매주 한 명의 게스트로만 이루어진 방송이기에, 출연하는 게 쉽지 않은 방송이지.
“알지. 형, 그 방송 게스트들 엄청난 연예인들만 나오잖아.”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지. 요즘 새로운 드라마, 영화가 빨리 나오고 들어가잖아. 그래서 홍보하러 나와야 하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게스트가 한 명밖에 안 되니까 경쟁이 치열해.”
“크으, 근데 그 방송을 잡았네?”
나는 김 실장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또 누구야. 희성이 네 일이라면 열심히 해야지. 하하.”
“이야, 거기 나가면 홍보는 진짜 제대로 되겠다. 형, 고마워.”
김 실장이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고맙긴. 네가 잘돼야 나도 잘되는 거니까. 사실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지, 뭐.”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나가서 홍보 제대로 하고 올게.”
***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 아침.
매일 출근해 헬스와 연기 연습을 병행했지만,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하루였다.
따사로운 햇살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던 그때.
“맞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서둘러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하자, 송유나에게 만나자고 연락하기로 했던 주였고.
나는 식사 약속을 잡기 위해 송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짜가 더 미뤄졌다가는 까칠한 그녀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를 테니까.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나 씨, 통화 가능해요?”
조심스레 묻는 내 말에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예요. 이번 주에 연락한다더니, 내일이면 다음 주 될 뻔했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 전화 많이 기다렸나 보네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거든요? 괜히 약속 겹칠까 봐 그랬죠. 참나, 누가 누구를 기다렸다고….
“그래서 유나 씨, 오늘 뭐 해요?”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했다.
-음… 오늘 바쁘기는 한데….
“그럼 다음 주로 미룰까요?”
-됐어요. 그냥 오늘 봐요. 저 다음 주에도 계속 바쁘거든요.
“아, 오늘 괜찮아요?”
-오늘도 바쁜데, 잠깐은 시간 낼 수 있어요. 대신 맛있는 거로 사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 같이 먹어요.”
-네, 그러죠.
나는 송유나와 가기 위해 미리 찾아둔 식당 여러 개를 그녀에게 나열하듯 말했고.
“제가 찾은 게, 유나 씨랑 말했던 강남의 그 레스토랑이나 아니면… BH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나를 막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거기 두 곳 다 사람 엄청나게 많잖아요!
“유명하니까 많기는 한데, 그래도 두 곳 다 프라이빗이 된 곳이라 골랐죠.”
-괜히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해요. 또 스캔들 나려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유명하고 사람들이 있는 식당으로 가야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면 또다시 스캔들 날걸요?”
-네? 그게 무슨….
“스캔들 안 나려고 몰래 데이트하는 커플이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거 봤어요? 제가 스캔들 안 나도록 만나서 미리 선수 칠게요.”
-어떻게요?
“제가 다 생각이 있어요. 유나 씨 먹고 싶은 곳으로 가요.”
그녀는 쓰읍, 소리를 내며 식당을 골랐다.
-그럼 BH 빌딩으로 가요.
“알겠어요. 그럼 이따 봐요, 유나 씨.”
-네.
***
송유나와 전화를 끊자마자 연락해 예약을 한 BH 빌딩의 레스토랑.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해, 레스토랑 안으로 향했고.
“안녕하세요, 저 진희성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직원은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하고는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 배우 진희성 님 맞죠?”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스크를 쓰거나, 흔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오히려 얼굴을 꽁꽁 싸매고 송유나를 만난다는 자체가 더 스캔들 감이었으니까.
당당하게 만나 연애를 하는 연예인은 없었지.
나는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나를 드러내고 송유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직원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진짜 팬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맞다, 얼른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자리에 도착해 물을 한 모금 마실 때쯤.
“희성 씨.”
송유나가 안경에 모자, 마스크까지 얼굴을 꽁꽁 숨긴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모습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나 씨?”
“네, 뭐야. 이렇게 하나도 안 가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예약자 이름도 그냥 진희성으로 했던데.”
그녀는 주변에 기자는 없는지, 파파라치는 없는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살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손을 휘이 저었다.
“유나 씨, 우선 그 모자랑 마스크, 안경 좀 벗어요.”
“아니. 또 스캔들 나면 나 진짜 안 된다니까요?”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 카메라를 열어 화면 안에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몸을 돌려 휴대 전화 화면에 송유나의 얼굴까지 함께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유나 씨, 여기 봐요. 같이 사진 찍게.”
“네? 사진이요?”
카메라를 본 그녀는 자연스레 포즈를 취했고.
나는 찍힌 사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사진 SNS에 먼저 올릴게요. 기자들이 스캔들 내기 전에, 선수 쳐야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저번처럼 연인이라고 하기 전에, 우리는 친구 사이라고 먼저 SNS에 올려 버리려고요.”
내 말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쓰윽 벗었다.
-‘친구’랑 밥 먹는 중^^.
송유나와 방금 찍은 셀카와 함께 적은 짧은 한 문장.
그리고 그 사진에 송유나의 SNS 계정을 태그했다.
그리고 화면을 그녀에게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올릴게요, 어때요?”
내 말에 송유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무슨 선수를 치는 건가 했는데, 이거였네.”
나는 그녀의 말과 동시에 게시물을 등록했고.
“이제 마음 편하게 밥 먹어요, 우리.”
내 말에 송유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식사가 이어지던 도중.
나는 테이블에 올렸던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고.
화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로 SNS의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서둘러 SNS를 열자, 송유나와 찍은 사진에 댓글이 무수히 올라왔고.
나는 그 댓글에 웃음을 터트리며, 송유나를 향해 말했다.
“유나 씨, 우리 아까 올린 게시물에 댓글 엄청나게 달렸어요.”
“뭐래요?”
“같이 볼래요?”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에게 물었고.
송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네, 같이 봐요.”
나는 몸을 테이블 쪽으로 당겨 휴대 전화를 내밀었고.
그녀 역시 내 쪽으로 다가와 함께 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헐ㅋㅋ. 봐, 둘이 그냥 친구였네.
-둘이 얼굴 조합 미쳤다.
-둘이 사귀면 비주얼 커플 탄생이었는데ㅠㅠ.
-역시, 송유나랑 사귀는 게 아니었네! 다행.
-진희성, 송유나 친구 조합 찬성!
-우정 영원하세요~!
-‘친구’랑 밥 먹는 건데, 또 기사 내는 기자 없겠쥬?ㅋㅋ.
송유나는 댓글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희성 씨 말대로 먼저 선수 쳐서 올리니까, 기사가 잠잠하네요?”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또 스캔들 안 날 거라고 했죠?”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띠링-.
휴대 전화의 알람이 울렸고.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내 휴대 전화로 향했다.
화면 상단에 뜬 알람.
SNS에 온 메시지였다.
‘evelyn: I miss you….’
함께 작품을 했던 에블린에게서 온 메시지였고.
그녀는 보고 싶다는 말을 아련하게 보내왔다.
나는 그 메시지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고.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던 송유나는 순식간에 미소를 지워냈다.
그녀의 표정은 정색에 가까웠다.
“뭐…예요. 이거?”
“네?”
송유나는 휴대 전화를 들고 내게 내밀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블린, 저번에 할리우드에서 봤던 배우잖아요.”
“…예, 그렇죠.”
송유나가 촬영장에 놀러왔을 때, 에블린과도 인사를 주고받았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게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설마… 둘이 그런 사이예요?”
진지하게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아니에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침을 삼켰고.
“뭐예요. 웃으면서 대답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요. 둘이 무슨 사이예요?”
계속해서 심각한 듯 묻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제 게시 글 보고, 그냥 생각나서 보낸 거 같은데요?”
“그래도 보고 싶다면서 뒤에 쩜쩜쩜까지 아련하게 찍는 건….”
나는 손을 허공에 재빨리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에블린이랑 썸씽이 있을 거였으면, 미국에 있을 때 났겠죠.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송유나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읊조렸다.
“그래도 그때는 서로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가져와 화면이 바닥을 향하도록 뒤집었고.
“이거 식겠어요. 유나 씨, 얼른 먹어요.”
내 말에 그녀는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에블린한테 답장 안 해요?”
송유나의 눈길은 내가 아닌, 내 휴대 전화에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송유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블린한테 답장하는 게 급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 유나 씨랑 밥 먹는데요, 뭘.”
“…….”
내 말에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휘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