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40 – 그녀들의 의도 (4)
딸랑.
술집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
흑발의 긴 생머리, 새하얀 피부의 여성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쌍꺼풀이 진한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콧대에 웃는 게 아름다운 그녀.
한눈에 보아도, 그리고 오랜만에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기서 날 보며 웃고 있는 저 사람이 내 첫사랑, 신다영이라는 것을.
“오오, 다영이 왔어?”
“이야, 신다영 오랜만이다.”
이명진과 박지온은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신다영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은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잘 지냈어?”
나는 고개를 들고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 오랜만이네.”
그녀는 내 앞에서 서성였고.
신다영이 이명진을 향해 눈길을 쓰윽 주더니, 이내 이명진은 옆으로 자리를 한 칸 옮겼다.
그렇게 내 옆에 앉은 그녀.
박지온은 신다영의 잔을 빠르게 세팅하며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우리가 불러도 안 나오더니. 오늘은 나왔네?”
그의 말에 신다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번에 연락할 때는 약속이 있었지. 오늘 마침 시간이 되기도 했고… 그리고 희성이도 오랜만에 왔다길래….”
그녀는 곁눈질로 나를 쓰윽 바라보았고.
나 역시 미소를 띤 채로 술잔을 들었다.
신다영은 대학 시절, 소위 말하던 ‘여신’이라고 불리던 존재였다.
학과마다 신입생 중 가장 예쁘게 생긴 사람을 연극 영화과 여신.
잘생긴 사람을 연극 영화과 남신이라 부르고는 했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어렸기에 그런 별명을 붙이고는 했다.
연극 영화과가 배우, 연예인이 많이 탄생되는 과였고.
그래서 당연히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중에서도 선배들과 동기들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뽐내던 사람.
‘여신’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사람이 내 옆에 앉은 신다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에서 꽤 유명한 편이었다.
교양 수업 때는 그녀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타 학과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만인의 첫사랑인 그녀.
물론 당시 내게도 신다영은 그런 존재였다.
신다영이 술잔을 들고 있는 내 앞으로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희성아,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건데. 이렇게 만나니까 정말 반갑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게. 우리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의 대화에 건너편에 앉은 신현수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연극 영화과 만인의 첫사랑 둘이 앉았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에이, 다영이는 그랬지만, 나는 아니지.”
내 말에 신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긴. 너도 인기 많았어, 인마.”
그의 말에 보태듯 박지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피아노학과랑 패션 디자인학과 여자애들이 너 번호 알려달라고 나한테 얼마나 붙었다고!”
박지온은 당시를 떠올리며 인상을 쓴 채로 머리를 휘저었고.
그의 태도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온이 너도 그랬냐? 나도 진희성이랑 다니면서, 괜히 오징어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젠장.”
나는 손을 허공에 휘이휘이 저으며 답했다.
“됐어. 다들 기억 조작 아니야? 하하.”
우리는 그렇게 술잔을 들이켜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렇게 술병이 쌓여가고.
자연스레 이 테이블의 대화는 대학 시절에 머물렀다.
“희성이가 그때 다영이 좋아하지 않았나?”
신현수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고.
그런 그의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나 오랜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추억이라고 불릴 만큼 과거의 일.
“그건….”
옆에 앉은 박지온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 말을 잘라냈다.
“현수야, 다영이 좋아한 게 어디 희성이뿐이겠어? 나도 좋아하고, 아마 저 자식도 다영이 좋아했을걸?”
박지온의 손가락은 나를 지나쳐 이명진에게로 향했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솔직히 우리 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다영이 좋아해 봤잖아?”
이명진의 말에 박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다영이가 워낙 예쁘기도 하고 착하고, 우리랑 친하기도 했고.”
그의 말에 신다영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말했다.
“뭐야, 너네 나 좋아했냐?”
신다영은 활짝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고.
“하긴… 그러면 뭐 해. 진짜 옛날 일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놓고 나 대학교 1학년 때, 고백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 기억나지?”
신다영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신다영에게 남자 친구는 없었다.
“그래? 너 매일같이 고백 받은 거 아니었어?”
이명진의 말에 그녀는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좋다고 소개해 달라는 사람은 많았는데, 막상 고백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기하지….”
그녀의 말에 이명진과 박지온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네가 너무 넘볼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랬을 거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학교에서 여신이라고 불리는데, 섣불리 다가가서 고백하기가 쉽지는 않지.”
신다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챙-.
또다시 부딪치는 술잔.
연거푸 들이켜는 술에 하나둘 볼이 발그레해졌고.
신다영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이 너는 예전 그대로다.”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답했고.
“어, 널 보면 예전에 대학교 때도 생각나고 그런 것 같아.”
신다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 재미있었는데, 밤새 모여서 연기 연습도 하고… 과제도 하고 말이야.”
“맞아. 그때도 너는 항상 열심이었지. 남들보다 더 많이 연습하고, 그래서 이렇게 좋은 배우가 된 거 아닌가 싶어.”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 하하.”
내 말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와 부딪쳤다.
“우리 한잔하자.”
“그러자.”
챙-.
신다영은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술잔을 들이켰고.
그녀의 눈빛에는 아련함이 가득 묻어 있는 듯 보였다.
“나 너 드라마부터 작품 전부 챙겨 봤다?”
“정말? 고마워.”
“이번에 할리우드에서 작품 한다는 거 기사도 다 보고, 주변에 자랑도 했어. 희성이가 내 친구라고.”
신다영은 입꼬리를 올린 채 내게 말했고.
그녀의 말에 앞에 앉은 박지온과 신현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나도. 진희성이 내 친구다, 자랑했지.”
“맞아. 친구가 유명하니까 자랑하고 좋더만. 주변에서 안 믿는 애들도 많은데, 다음에 영상 통화해도 되냐?”
그의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래.”
그때.
신다영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읊조렸다.
“아… 머리 아프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한 그녀의 얼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영아, 취할 것 같으면 그만 마셔.”
내 말에 그녀는 내 귓가로 쓰윽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나랑 잠깐 바람 좀 쐬러 갈래?”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지금?”
“응, 머리가 아파서… 같이 잠깐 나가주라.”
신다영은 내 팔을 끌며 말했고.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희성이랑 잠깐 편의점 다녀올 건데, 너네 아이스크림 먹을래?”
신다영의 말에 박지온이 몸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자.”
그러자 그녀는 손을 허공에 휘이 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그럼 현수랑 명진이만 있으니까 심심할 거 같은데? 바로 앞이니까 희성이랑 빨리 다녀올게.”
“그래도….”
신다영은 내 팔을 잡아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성이가 돈 잘 버니까, 희성이 돈으로 아이스크림 뜯어올게.”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를 이끌었고.
우리는 곧장 술집에서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성아, 우리 잠깐만 여기 앉아서 바람 좀 쐬고 갈까?”
그녀는 편의점이 보이는 길가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나란히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도로의 차를 바라보며, 신다영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렇게 너 보니까, 옛날 생각이 자꾸 난다.”
“그래?”
“응, 그때 나도 너 좋아했거든.”
“…….”
그녀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대학 시절,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연기에 열중하기 위해 그녀에 대한 마음을 키우지 않았지.
항상 연기를 함께했던 동기이자, 친한 친구였기에.
그런데 그녀 역시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너는 어때?”
“응?”
신다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그런 신다영의 질문과 태도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몸을 더 가까이 당겨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몸을 내민 채로 물었다.
“그럼 내일 뭐 해, 우리 둘이서만 보는 건 어때?”
신다영은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 깊숙이에 묻어두었던 첫사랑인 그녀.
그 시절 내가 호감을 가졌던 신다영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순수했던 그때, 그리고 내 마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 그 마음이 여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다영 역시 그때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친구로서 둘이 만나 커피를 마시고, 술 한 잔 정도는 충분히 기울일 수 있지만.
지금 내게 질문을 던진 그녀의 의도는 그런 순수한 만남이 아닌 듯했고.
어쭙잖은 답으로 그녀를 헷갈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신다영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영아.”
“응?”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미안하지만, 내일은 안 될 것 같아.”
“그럼 다른 날은? 같이….”
“아니, 다른 날도 안 될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너랑 잘해보고 싶어. 오랜만에 만나니까, 예전 감정도 다시 피어오르고….”
나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우리 좋은 동창, 좋은 기억, 그리고 좋은 추억으로 남자.”
“…뭐?”
“추억은 추억으로 남았을 때가 가장 아름답잖아. 추억 속의 나는 너와 감정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아니거든.”
“…….”
그녀는 내 말에 시선을 회피했고.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할게. 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아이스크림 사서 들어가자.”
***
일주일간의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서울.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회사로 향했다.
“희성아, 푹 쉬고 왔어?”
“응, 형도 잘 쉬었어?”
내 말에 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일주일 내내 한식만 먹었다니까? 하하.”
“나도.”
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스케줄 달력을 쓰윽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형, 제프리 감독 영화 국내에도 동시 개봉이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동시 개봉인데, 아직 개봉일은 안 잡혔더라고.”
“그래?”
김 실장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말했다.
“근데 저번에 말했던 것보다 개봉이 앞당겨질 것 같더라. 편집도 빨리 끝나가고, 제임스 감독 작품보다 빨리 개봉하고 싶나 봐.”
“하긴, 그렇겠지. 서로 눈치 싸움 엄청나게 하고 있겠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형, 나 그럼 이제 일할까?”
“무슨 일?”
“이제 쉴 거 다 쉬었는데, 홍보라도 하게 다른 프로그램들 좀 나가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
김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말했다.
“안 그래도 홍보 때문에 너한테 예능이나 다른 프로그램들 하는 건 어떤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잘됐네. 하자. 아직 개봉일은 안 정해졌어도, 몇 달 안으로 나오니까. 예능 프로그램들 나가면, 자연스레 홍보도 되겠네.”
그는 내 말에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알겠어. 그럼 프로그램 찾아보고 이야기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