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40 – 그녀들의 의도 (3)
“와아… 이게 다 뭐야?”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한 상.
구수한 된장찌개와 잡채, 소불고기, 갈비찜, 계란말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반찬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심지어 접시를 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반찬에 접시는 겹쳐져 식탁에 겨우 올라가 있을 정도.
내가 탄성을 내지르자 어머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더 많이 해뒀어야 했는데, 어제 장을 못 본 게 있어서….”
“엄마, 장을 제대로 봤으면 아주 동네 잔치하겠는데?”
나는 서둘러 자리에 앉으며 손뼉을 부딪쳤다.
“이거 다 아까워서 어떻게 먹나.”
아버지는 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아까우면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아들.”
“어휴, 집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이거 다 먹으면 나 배 터져 죽는 거 아니야? 하하.”
그렇게 우리는 웃음이 가득한 주방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헐, 진짜 맛있다. 엄마.”
나는 한 입을 먹을 때마다 감탄을 쏟아냈고.
어머니는 젓가락을 들고 자신의 입에는 음식을 넣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 반찬을 챙겨주었다.
“엄마도 좀 먹어.”
“나는 음식 만들면서 간 봤더니, 별로 배가 안 고프네?”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 역시 생선 가시를 발라 내 밥 위에 올리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아빠도 좀 드시고. 왜 이렇게 나만 챙겨.”
“아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까 그러지. 외국 생활이 얼마나 힘든 건데, 몇 달을 고생하다 왔으니까. 많이 먹어.”
아버지는 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생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말에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이제는 내 앞길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동안도 늘 응원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응원보다 걱정이 컸던 것이지.
나는 그렇게 음식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먹은 듯 배를 채워갔다.
오늘도 그렇듯, 식사를 마친 뒤의 뒷정리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빈 그릇을 싱크대에 옮기고 있었고.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식탁을 치웠다.
그리고 어머니는 바삐 과일과 차를 세팅하고 있었지.
“나 잠깐만 방 좀…!”
그런 부모님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왔고.
미리 챙겨온 가방을 꺼내 다시 거실로 향했다.
그사이 거실 테이블에는 어머니가 과일과 차를 올려두었고.
“희성아, 얼른 와서 과일이랑 차 좀 마셔.”
“네.”
나는 얼른 앞에 앉아 어머니가 건네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리고 서둘러 챙겨왔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엄마, 아빠. 이거….”
커다란 가방을 본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물었다.
“이게 뭐야?”
“빈손으로 오라니까, 외국에서 뭐 사온 거야?”
그들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아니, 이번에는 선물 안 사왔어.”
“그럼 이건 뭔데?”
아버지는 궁금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고.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두 분이 쓰시라고, 용돈을 드리려고요.”
내 말에 부모님은 동시에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아휴, 용돈은 무슨.”
“그래. 힘들게 연기해서 번 돈인데, 우리까지 챙겨줄 필요 없어.”
나는 가방을 부모님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래도 용돈 좀 두둑하게 드리고 싶었어. 해외 가서 열심히 연기해서 돈 벌었잖아.”
하지만 아버지는 가방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한 돈을 왜 우리한테 줘. 고생한 너한테 써야지.”
그의 말에 나는 코를 찡긋거렸다.
“엄마, 아빠 아니었으면, 나 이렇게 크지도 못했고. 지금 연기해서 이렇게 돈도 못 벌었을 거야. 그러니까 받아요.”
나는 가방을 열어 부모님에게 용돈을 보여주었다.
돈을 본 부모님은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뜬 채 입을 떡 벌렸다.
돈을 보고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액수를 보고 놀란 것이었지.
“어머, 이게 다 뭐야?”
어머니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용돈이라며,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1억이요.”
“뭐?”
“두 분이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편히 쓰시라고요.”
내 말에 부모님은 내게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우리한테 주면 어떻게 해.”
“그래, 우리는 이렇게 많은 돈 필요 없어. 희성이 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나는 어머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그러니까. 나만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아니라, 엄마와 아빠도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나 낳고 돈 벌고, 키우느라 두 분은 하고 싶은 것도 포기했을 거 아니야.”
내 말에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너 키우면서 엄마, 아빠는 행복한 일밖에 없었어.”
“그래도 엄마 아빠도 좋은 옷, 맛있는 음식, 여행도 가고 싶었을 텐데…. 나 키우느라 다 포기하고 사신 거잖아요. 앞으로는 제가 열심히 일해서 효도할게요.”
결국 어머니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렀고.
아버지는 침을 삼키며, 눈물을 삼켜내는 듯 보였다.
그러곤 내 눈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희성아… 잘 커줘서 너무 고맙다.”
“저 할리우드에서 돈도 많이 줬어요. 앞으로 더 좋은 거 많이 드릴게요.”
내 말에 아버지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우리한테 쓰지 말고, 너한테 써도 돼. 우린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행복함을 느끼니까.”
아버지의 말에 나는 시큰거리는 코를 손으로 문지르며 참았고,
곧장 1억이 든 가방을 부모님께 밀며 말했다.
“나도 엄마 아빠가 행복한 게, 나한테도 행복한 거야.”
그리고 이 분위기를 풀어내고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부모님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 연기 잘해서 돈 많이 버니까, 앞으로는 더 많이 드릴게요. 하하.”
***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침대에 누워 뒹굴던 오후.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물론 할리우드에 있을 때도 촬영이 끝나고 난 후, 주말이면 숙소에서 쉬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꽤나 달랐으니까.
거실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방까지 들려왔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천장 역시,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따스함이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을 만끽하며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내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뜬 이후.
SNS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고.
그중에는 나를 기다린 팬들의 댓글이 많이 있었다.
그들을 위해 나는 근황을 올리기로 생각했고.
몇 시간 전, 집에서 먹었던 집밥 사진을 업로드했다.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글이 SNS 계정에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 팬들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연락하는 인물.
서인우가 SNS에 댓글을 달았다.
-희성 선배, 맛있는 거 먹었네? 우리도 조만간 얼굴 보자!
함께 작품을 찍으며 친분이 두터웠던 우리.
하지만 각자 스케줄이 바빠져 연락이 뜸했다.
뜸했던 건, 비단 서인우만은 아니었다.
쉬지 않고 했던 많은 작품들.
그리고 할리우드로 진출하면서 몇 달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
할리우드에 적응하고, 연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그들과 연락도 자주 주고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여유로워진 지금.
그동안 미뤄뒀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만날 약속을 잡거나, 무언가를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
서인우에게 문자를 보낸 뒤.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다른 배우들의 연락처를 뒤적였다.
안부도 묻고 편하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게 발신 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이들도 내 전화가 반가울까?
혹시 촬영하고 있는데, 내가 전화를 거는 건 아니겠지?
함께 촬영할 때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니, 막상 섣불리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연락해서 잘 지내나는 물어봐야겠다. 나도 반가우니까, 이들도 반갑지 않겠어?”
괜스레 밀려오는 긴장감에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발신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지이잉.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 연극 영화과 이명진]
“어? 명진이가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가운 마음과 함께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진희성!
“어, 명진아.”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인마, 한국 왔으면 재깍재깍 형한테 생존 신고를 해야지. 너 한국 온 것도 내가 SNS로 봐야겠냐?
“하하, 형은 무슨.”
-심지어 너 집 왔더만. 뭐 하고 있어?
“지금?”
-아니다, 됐다. 지금 당장 나와. 술이나 먹게!
이명진의 다그치는 말에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알겠어. 어디로 갈까?”
조금 전 다른 배우들에게 연락할 때는 전화를 거는 버튼 하나 누르는 것조차 망설이던 나였지만.
오래된 동창과 통화하는 것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혀 조심할 것도, 예의를 차려야 할 것도 없었지.
이 친구들과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내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어도 괜찮았으니까.
그래서 마음이 편한 친구들이었다.
서둘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야, 진희성. 여기!”
술집 문을 열자마자 나를 향해 소리치는 사람.
박지온이었다.
“이야, 지온아 오랜만이다.”
나는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고.
그의 옆에는 신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소리쳤다.
“우리 할리우드에 진출한 대배우님!”
“됐어, 인마. 하하.”
나는 박지온과 신현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명진이는?”
“명진이 잠깐 앞에 나갔어.”
“왜?”
내 물음에 박지온이 의자를 가리키며 답했다.
“일단 앉아.”
“그래.”
박지온은 내 앞에 미리 세팅되어 있는 잔에 술을 따라 부으며 말했다.
“명진이 잠깐 통화하러 나갔어.”
“누구랑?”
신현수는 내 눈치를 쓰윽 보며 말했다.
“민준이. 우리 모이고, 너도 온다고. 민준이도 오라고 전화하러 나간 것 같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준,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나락으로 한 번 떨어진 후, 여전히 조연에서 머물고 있는 그였으니까.
그렇게 나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던 박민준은 어느새 자신의 앞가림도 하기에 벅찼는지, 더 이상 나를 견제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견제하기에는 그와 내 차이가 너무나 벌어져 있지만 말이다.
그때.
이명진이 전화를 끊었는지, 술집으로 들어오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스타님!”
그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스타는 무슨. 하하.”
나는 내 옆에 앉는 이명진을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박민준은 온대?”
내 물음에 그는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못 온대.”
그의 말에 박지온이 작게 읊조렸다.
“안 오는 거겠지.”
그 말을 들었지만, 나는 굳이 박민준에 대해 또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오느냐, 마느냐도 사실 큰 상관은 없었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나와 라이벌로 불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좋은 감정도, 그렇다고 나쁜 감정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나는 술잔을 들고 화제를 돌렸다.
“우리 술이나 마시자!”
“그래.”
챙-.
술잔이 부딪치고, 술을 입에 털어 붓던 그때.
이명진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맞다, 오늘 다영이도 온다고 했는데?”
그의 말에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다영이?”
신다영… 내 첫사랑.
“어, 아마 지금쯤 도착할….”
딸랑.
그때, 닫혔던 술집의 문이 열리고.
흑발의 긴 생머리.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이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