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40 – 그녀들의 의도 (1)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사인이 들리자, 우리는 미소와 함께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1시간 정도 쉬었다가 오늘 마지막 신 촬영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장 밖으로 걸어 나왔고.
저 멀리서 브루노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희성 씨, 고생했어요.”
“감사해요. 브루노는 다음 신 촬영인가요?”
“네, 오전에 촬영 끝나서 내내 트레일러에서 쉬다가 나왔어요.”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희성 씨는 이제 퇴근해요?”
“음… 우선 제 촬영이 끝나기는 했어요.”
브루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지금 커피나 한 잔 같이할래요?”
그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굳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송유나가 팬이라고 말하는 유일한 연예인인 브루노.
그 말인즉, 브루노가 이 업계에서 엄청나게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배우라는 뜻이지.
나 역시 브루노의 팬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외모 또한 뛰어난 배우였다.
그런 브루노가 언젠가부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시점에서부터 친분이 생겼냐고 묻는다면, 그 점을 꼽을 수는 없지만.
그는 쉬는 시간마다 나를 불러 함께 트레일러에서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렇게 다가와 주는 브루노가 나는 고마웠지.
이들의 성향을 모두 모르기에, 내가 다가가 친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늘은 여기 앞에서 놀까요?”
그는 트레일러 근처에 마련된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죠.”
곧장 자리에 앉자, 브루노가 자신의 트레일러에서 커피를 꺼내 다가왔다.
“희성 씨는 촬영 끝나면 바로 한국 가는 겁니까?”
“네, 그러고 보니, 우리 촬영도 정말 끝나가네요.”
“맞아요. 2주밖에 안 남았는…….”
그때.
“어? 우리도 여기 앉아도 되나요?”
리암과 찰스가 다가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당연하죠.”
그들의 말에 브루노는 의자를 내밀며 말했고.
어느새 우리 넷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촬영이 2주밖에 안 남았다니, 끝나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저는 이게 할리우드에서의 첫 작품이라 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찰스는 특유의 하이 톤 목소리로 코를 찡긋거렸다.
“리암이나 브루노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만날 수 있지만, 희성 씨는 한국 가버리면 언제 또 볼 수 있나….”
“작품이 잘된다면, 제가 또 할리우드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겠어요? 하하.”
“그러네. 이번 작품이 꼭 성공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생겼는데?”
“맞아. 우리 힘내봅시다. 하하.”
리암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리 꼭 다음 작품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친분이 생길 줄 몰랐던 한 사람.
그게 바로 리암이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동양인 무시와 멸시를 일삼는 인물이었지.
어느새 그는 자신이 언제 나를 미워하고 싫어했냐는 듯, 지금은 나를 너무 아껴주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늘 내가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고 엄지를 치켜들어 주는 그였으니까.
이제는 모든 배우와 친분이 꽤 두터워졌다.
그래서 더더욱 촬영의 끝이 보이는 게 아쉬웠지.
배우뿐 아니라 촬영 스태프들과도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할리우드는 특히나 더 그러했다.
내가 이곳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은 배우들과 스태프들밖에 없었기에.
그들과의 친밀도가 점차 높아진 것이지.
그때.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배우들은 서둘러 현장으로 떠났다.
마지막 신 촬영이 없었던 나는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형.”
김 실장은 내가 배우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장 내게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다 했어?”
“응, 다들 촬영 들어갔어.”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배우들이 틈만 나면 너랑 이야기하려고 하더라?”
“그래?”
“응, 다들 쉴 법도 한데, 항상 촬영 없을 때 너한테 오더라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가?”
“엊그제 스태프들이랑 한잔했거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맞아. 형이 나갔다고 온다고 한 날?”
“응, 그날 스태프들이 그러더라. 배우들 중에 너랑 제일 친하고, 편하다고.”
김 실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나 역시 그 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어떤 이유인지는 듣지 않아도, 나에 대한 평가가 좋은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좋은데?”
“희성이 네 성격 좋은 거, 할리우드에서도 먹히나 봐.”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차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제 곧 촬영 끝날 텐데, 끝나고 나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김 실장의 질문에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곧장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며 답했다.
“나 한국 가고 싶어.”
내 답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물었다.
“뭐야, 향수병은 없는 것 같더니… 한국이 많이 그리웠어?”
심각하게 묻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아니, 한식이 너무 먹고 싶어. 빨간 국물에 뜨뜻한 음식들.”
“내가 한식당 엄청나게 데리고 다녔잖아.”
“아니야. 그걸로는 충족이 안 돼. 엄마가 차려준 집밥이 너무 먹고 싶어.”
“아… 오케이, 그건 완전 인정이지!”
나와 김 실장은 군침을 삼키며 차에 올라탔다.
***
대망의 마지막 촬영이 끝난 뒤.
모든 작품의 일정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몇 달간 함께 고생한 우리.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스태프와 배우들은 빠짐없이 한곳에 모이기로 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난 저녁.
우리는 제작사에서 마련해준 이곳에 문을 열었다.
“이야….”
나와 김 실장은 입을 떡 벌린 채 앞쪽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형… 여기 미쳤다.”
LA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김 실장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내게 말했다.
“아까 스태프가 나한테 제작사 루프탑이 진짜 멋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네.”
“여기 진짜 좋은데, 왜 회식할 때마다 여기로 안 왔대?”
“여기가 항상 열어주는 게 아니래. 작품 끝나고 파티할 때만 열어주나 봐. 그래서 소속 감독들도 아무 때나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게 아니라더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그럴 만도 하다. 이렇게 성대하게 파티를 차려주는데, 아무 때나 올 수가 없긴 하겠어.”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스케일.
이렇게 큰 루프탑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였다.
반짝이는 조명과 오색찬란한 장식들.
그리고 간단하게 집어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와 샴페인이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김 실장이 다시 입을 떡 벌린 채 내게 말했다.
“희성아, 저기 좀 봐. 저 샴페인들 다 비싼 건데… 우와.”
평소 샴페인에 관심이 많던 김 실장은 혀를 내두르며 자연스레 발길을 옮겼고.
그가 향한 곳에는 비싸기로 유명한 샴페인들이 줄 지어 있었다.
“형, 오늘 이 술 다 마셔보겠네?”
“어…. 와, 여기 진짜 좋다.”
“형, 이거 봐. 여기 술에는 금가루도 들어 있는데?”
술을 그렇게 즐겨하지 않는 내게도 신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술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엄지를 조심스레 치켜들며 말했다.
“작품 마무리 잘하면, 이렇게 어메이징하게 파티하니까 감독들은 작품 찍는 맛이 나겠는데?”
계속해서 루프탑 파티에 감탄을 쏟아내던 그때.
제프리 감독이 샴페인 한잔을 허공 높이 들고 소리쳤다.
“다들 그동안 촬영한다고 고생 많았고, 오늘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하게 즐겨요.”
그의 말에 우리는 환호로 화답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하늘 높이 샴페인 잔을 올렸다.
“치얼스!”
♪♬.
현장은 금세 파티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심장을 쿵쾅이는 비트.
군데군데에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살랑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파티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함께 술을 마시자고 부추기는 사람도, 인사를 하겠다고 데리고 가 주야장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각자 이 분위기에 취해 즐기고 있었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다가 이야기도 나누며, 각자 그렇게 촬영 끝의 아쉬움을 자유롭게 표출했다.
그때.
“희성 씨.”
샴페인 잔을 들고 내게로 다가오는 사람.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와 내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고.
챙-.
청아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샴페인을 들이켰다.
“고생했어요, 희성 씨.”
“고마워요. 에블린도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에블린이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고생은 뭘요. 희성 씨랑 함께 촬영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제가 영광이죠. 하하.”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희성 씨는 한국에 들어가는 건가요?”
“네, 이번 주 안에 들어갈 것 같아요.”
에블린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쉽네요. 이야기도 많이 못 나눴던 것 같은데.”
“다음에 또 좋은 기회로 작품 같이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한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휴대 전화를 흔들며 내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자신의 얼굴을 밀착한 채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소곤거리며 말했다.
“희성 씨한테 SNS로 메시지 보낼게요.”
할 말이 끝난 그녀는 얼굴을 내 옆에서 스윽 빼냈고.
아주 가까이에서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입술을 길게 휘었다.
내가 한국에 가도 연락하겠다는 그녀의 말.
표정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듯 보였지만, 나와의 인연을 놓지 않겠다는 뜻 같아 그저 고마울 뿐이었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 답에 에블린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고 있었다.
***
“형, 우리 도착하자마자 저녁 먹으러 갈까?”
내 말에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딱 비행기 착륙한다는 안내 나오자마자 저녁 정하는 거야? 하하.”
“당연하지. 이제 착륙하면, 바로 먹으러 가야 하니까. 지금부터 정하자.”
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그러자. 김치찌개? 아니면 삼겹살?”
“크으, 삼겹살도 좋고, 국물도 좋고….”
나와 김 실장은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저녁 메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어느새 비행기는 한국의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김 실장과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발길을 옮겼다.
“빨리 엄마 밥 먹으러 가고 싶다.”
“본가는 언제 내려갈 거야?”
“나 본가는….”
김 실장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입국장의 문이 열리자, 나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찰칵, 찰칵-.
파앗-.
멈추지 않고 터지는 플래시.
계속해서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 음에 나는 화들짝 놀라 앞에 있는 수많은 기자를 바라보았고.
눈을 깜빡이며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자를 향해 물었다.
“오… 뭐예요? 오늘 누구 와요?”
내 말에 앞에 서 있던 몇십 명의 기자들은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공항을 울릴 듯했고.
“오늘 희성 씨 오는 날이잖아요.”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 기자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찍으러 온 사람이… 저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