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39 – 그녀와의 기억 (6)
드르륵.
차 문이 열리자 어딘가 불편한 듯한 얼굴로 서 있는 송유나의 모습.
“얼른 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고.
송유나는 차에 올라타며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그냥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괜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여행 끝나고 가시는 길인데, 어떻게 대배우님을 혼자 보내겠습니까. 같은 회사 식구잖아요.”
송유나가 LA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비행기 시간을 알게 된 나와 김 실장은 송유나를 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 식구이기도 했고.
이곳에서 고마운 점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 일정에서 3일을 나와 보내게 된 것.
그렇게 오랜 시간을 빼지 않아도 됐음에도 어쩔 수 없이 내게 3일을 쓰게 되었고.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김 실장이 없는 밤에 병원에서 나와 밤을 지새웠다.
그건 내게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김 실장 또한 자기 대신 송유나가 있어줌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했다.
송유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투정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불편해서 그렇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와 김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불편하다고요?”
그러자 송유나가 팔짱을 낀 채로 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또 신세 지고는 못 살아서 말이에요. 괜히 앞으로 저도 뭔가를 갚아야 될 것 같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와 김 실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저희가 신세를 갚는 거예요.”
“맞아요. LA에서 저도 고마운 거 많았잖아요. 이거로 신세를 갚는다고 하기에는 너무 약소하지만, 두고두고 갚을게요.”
우리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팔짱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나는 송유나를 향해 물었다.
“이제 한국에 가면 바로 일 시작하는 거예요?”
“음… 아마도요. 매니저 오빠한테 들어보니까, 광고도 있고 화보 촬영이랑….”
끝도 없는 그녀의 스케줄.
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한국 가자마자 바쁘네요. 그래도 LA에서 조금은 휴식 취했으니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를 곁눈질로 쏘아보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식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게 휴식이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과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그런 그녀의 태도에서 우리가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그녀와 작품을 할 때.
그리고 이후에 다른 작품이나 장소에서 만날 때에도 송유나와 가까워졌음을 느꼈던 순간은 없는 것 같았다.
워낙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의 사람이었고.
그녀 또한 자신의 위치가 있기에, 쉽게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했지.
그런데 내가 할리우드에 오기 전.
그리고 이번 LA에서의 만남을 통해 송유나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짐을 서로 느낀 듯했다.
내게 장난까지 스스럼없이 치는 그녀였으니까.
송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에서 남은 일정은 좀 쉬엄쉬엄하면서 해요. 이 업계 일도 오래 해 먹고살려면, 체력이 제일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그럴게요.”
“참, 근데 희성 씨 오늘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손뼉을 부딪치며 내게 물었고.
“오늘 오후부터 촬영 시작이라, 유나 씨 공항에 내려주고 가면 딱 맞아요.”
“아, 다행이네.”
한참 공항을 향해 차가 달렸고.
이내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유나 씨, 조심히 가고 한국 가면 봐요.”
“뭐… 그러든가요.”
송유나는 캐리어를 손에 끈 채 조수석 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고.
열린 창문으로 김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한국에서 봬요.”
그녀의 말에 김 실장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 유나 씨, 조심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송유나는 우리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공항 안으로 걸어갔고.
김 실장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유나 씨, 사람이 차가운 거 같기도 하고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읊조리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야.”
***
송유나와 헤어진 후.
몇 시간이 지나 우리는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물론 시간은 전혀 늦지 않았고, 오히려 약속 시간에 비해 일찍 온 편이었다.
현장은 오전 촬영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오전 촬영이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현장을 정리했고.
그사이 나를 발견한 사람들.
“어?”
“희성 씨, 왔어요?”
“희성 씨 쓰러졌다면서요. 몸은 좀 괜찮은 거예요?”
“맞아요. 우리 다 걱정했어요.”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게로 다가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밝게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그리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휴, 당연히 걱정이 됐죠.”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제프리 감독이 다가왔다.
“희성 씨, 몸은 괜찮아요? 오늘 촬영도 힘들면 쉬어도 된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이제 다 나았어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촬영이랑 오늘 촬영 스케줄을 변경해주신 것도 감사하고, 죄송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죄송하긴. 며칠 펑크 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스케줄 변경은 가능한 거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때였다.
나를 발견한 에블린이 내게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오오, 희성 씨!”
그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고.
에블린은 내 앞으로 다가와 양팔을 붙잡은 채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예요?”
나는 그녀의 양손에 몸이 묶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는 괜찮습니다.”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떼어지도록 팔을 슬쩍 움직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오려고 했는데, 소문이 벌써 퍼졌네요. 하하.”
나는 머쓱한 얼굴로 모든 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촬영장은 쉬는 시간이 이어졌고.
우리는 다음 촬영을 위해 각자 트레일러가 아닌, 현장 한쪽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그러자 찰스가 무리로 다가오며 내게 초콜릿을 건넸다.
“희성 씨, 피곤할 때는 초콜릿이 좋아요. 이거 먹어요. 제가 힘들 때마다 하나씩 먹는 건데, 맛있어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 모습에 브루노도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나도 지칠 때 먹는 거 있는데, 이따가 내가 희성 씨 트레일러로 가져다줄게요.”
“네?”
“영양제인데, 피로 회복에 완전 최고거든요.”
그들은 과로로 한번 쓰러진 내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기에 바빴다.
내가 쓰러진 이유가 과로는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 과로라고 퍼진 게 가장 무난하고, 무던하게 지나갈 수 있기에.
나는 그들의 호의에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오오, 그렇게 챙겨주지 않으셔도 감사한데….”
“아니, 좋은 건 함께 먹으면 좋죠. 이따가 촬영 끝나고 주러 갈게요.”
내 몸을 챙겨주는 동료 배우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한국에서 다른 배우들에게서 느꼈던 ‘정’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 이 작품을 촬영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양인 배우인 내게 관심이 없던 배우들.
하지만 이제는 이들과 진짜 한 ‘팀’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같은 작품을 찍는 한 팀이었지만.
이제는 몸과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같은 길을 향해 걷는 동료가 된 것이지.
예전에 느껴지던 거리감은 온데간데없는 듯한 느낌.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 덕에 배우들과의 친밀감을 몸소 느끼게 되어 절로 미소가 번져왔다.
그러던 중.
스태프들이 우리에게 달려와 입을 열었다.
“매니저분들에게는 전달했는데, 내일부터 며칠간 비가 심하게 온다고 해서 촬영 일정이 변경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비가 심하게 온다고 하던데….”
“네, 자세한 일정은 오후에 다시 전달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촬영 시작이니까, 배우분들은 준비해 주세요.”
나는 조금씩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오늘 촬영은 끝났고, 결국 내일부터 이틀간 비로 인해 촬영은 딜레이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틀간의 휴일.
비도 오는데,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리암이 내게로 다가와 제안을 던졌다.
“희성 씨, 오늘 뭐 해요?”
“오늘요?”
“네, 내일 촬영 없잖아요. 그래서 배우들이랑 같이 한잔할까 하는데, 같이 가요.”
그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나를 가장 싫어했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
그런 리암이 내게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는데,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
나 역시 이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제는 먼저 내게 친분을 제안하며 손을 내미는 그에게 고마움까지 느꼈다.
“좋아요!”
현장이 마무리된 후.
나와 배우들은 각자의 집이 아닌, 리암이 초대한 곳으로 함께 이동했다.
커다란 주택 앞에 멈춰 선 차.
나는 그 집의 규모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으리으리한 집.
지금 내가 머무는 숙소 또한 엄청났지만.
이곳은 그곳과 비교할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이야… 여기가 리암 집이에요?”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요. 여기는 별장이에요. 집은 여기랑 멀리 떨어져 있어요. 촬영이 이쪽에 많아서 별장을 하나 장만했지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문을 열었고.
밖에서 보던 저택 안을 상상하며 기대감에 가득 차 안으로 향했다.
“우와….”
집 안 역시 내가 상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높은 층고와 몇십 명이 뛰어놀며 파티를 열어도 될 만큼 커다란 거실.
우리보다 미리 도착해 있던 리암은 언제 이렇게 준비했는지, 간단히 집어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들과 샴페인을 거실에 세팅했다.
한국에서 배우들과 촬영 후 가졌던 회식과는 사뭇 다른 느낌.
“오늘 재밌게 놀아봅시다!”
리암의 말에 우리는 샴페인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치얼스!”
챙-.
기다란 샴페인 잔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우리는 각자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샴페인을 마셨다.
그렇게 여러 배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그때.
에블린이 샴페인 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희성 씨, 한잔할까요?”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잔을 내밀었고.
챙-.
그녀와 내 잔은 아주 가까이서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켜는 그녀.
에블린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는 미국인 만나본 적 있어요?”
“네? 어떤 미국인이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코를 찡긋거렸다.
“애인이요.”
“아… 아니요.”
물론 전생에서는 있었다.
1만 년의 그 기나긴 삶 중 한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진희성의 몸으로는 한국인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과도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지.
“에블린은요?”
내 말에 그녀는 샴페인 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나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영국인, 프랑스인….”
에블린은 여러 나라를 천천히 읊으며 손가락을 접었고.
“뭐 만나본 사람들 나라별로 더 이야기해요?”
자신이 만났던 여러 나라의 남자들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그녀.
출중한 외모였기에,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의 명수만 얼핏 들어도 어마어마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 아니에요.”
그러자 에블린이 고개를 내 쪽으로 쓰윽 내밀고 한쪽 눈을 깜빡여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근데 내가 딱…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더라고요.”
의미심장한 그녀의 눈빛과 말투.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애써 미소를 지었고.
에블린은 눈웃음을 보내며 말을 이어갔다.
“듣기로는 한국인들이 친절하다던데, 정말 그런지 한번은 만나보고 싶더라….”
그때.
“희성아!”
에블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이 나를 다급히 부르며 달려왔고.
그 덕에 에블린과 나의 대화는 뚝 끊겨버렸다.
“무슨 일 있어?”
헐레벌떡 달려온 김 실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내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그가 내민 휴대 전화 화면에는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속보] 진희성♥송유나 열애설, 오붓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