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39 – 그녀와의 기억 (5)
부스럭부스럭.
삐거덕-.
깜깜한 눈앞.
깊은 잠에 든 나를 깨우는 소리.
스르르 눈을 뜨고 말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떠 천장과 가까운 하얀 벽을 바라보자, 시간은 아직 6시 20분.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에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았고.
바스락바스락-.
하지만 재차 들려오는 소리에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무슨 소리….”
고개를 돌리자 내 시선 끝에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고 있는 송유나가 들어왔다.
“어, 유나 씨…!”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일어났어요?”
“아…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그녀는 잠에서 깬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쓸어내리며 내게 말했다.
“아니,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네?”
나는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등을 기대앉았고.
“간이침대라 매트리스도 딱딱하고, 게다가 1인실이라 넓고 좋을 줄 알았는데. 뭐가 이렇게 불편한지… 아무튼, 눈 감고 제대로 잠든 게 1분이나 채 되려나?”
송유나의 말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어젯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고.
새근새근하게 숨소리를 내뱉고, 내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했으면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니.
그녀의 투정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지.
내 웃음을 본 송유나는 금세 뾰로통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뭐예요, 그 웃음은?”
“아… 아니에요. 잘 잤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잤다고 하셔서요.”
송유나는 팔짱을 끼고 내가 아닌 침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요. 아유, 정말. 잠을 푹 못 잤더니, 다크서클 내려오게 생겼잖아요.”
“와줘서 고맙고 미안해요. 저도 오전에 퇴원이니까, 얼른 호텔로 가서 조금이라도 눈 붙여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가져왔던 담요를 챙겨 넣었다.
“그래야죠.”
송유나가 떠난 뒤.
이미 잠에서 깨어 버렸기에, 씻은 후 병원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 실장이 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희성아!”
“어, 형. 왔어?”
“응, 몸은 좀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완전 좋아졌어. 이제 바로 퇴원이지?”
“다행이다. 어, 너 준비 다 되면 퇴원해야지.”
그의 말에 나는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답했다.
“나 미리 준비해뒀어.”
김 실장은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응, 누구 덕분에 빨리 준비했지.”
“누구…?”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고.
나는 서둘러 김 실장에게 화제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형, 그래서 퇴원 수속은 끝난 건가?”
“맞다. 아니, 내가 지금 얼른 하고 올게.”
“오케이.”
김 실장은 서둘러 퇴원 수속을 위해 나갔고.
나는 마지막으로 병실을 둘러보고 체크한 뒤 병실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탄 우리.
출발하기 전, 김 실장이 나를 아련하게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너 이제는 휴식도 잘 취하면서 일해야 해. 이제 촬영 중반부가 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언제든 힘들면 꼭 말하고.”
“네네, 알겠어.”
나를 걱정하는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차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김 실장을 향해 손뼉을 부딪치며 물었다.
“맞다, 형. 나 오늘 촬영은?”
일요일이었지만, 추가 촬영이 있다는 게 문득 떠올랐고.
내 말에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독님한테 이야기해 뒀어.”
“아… 나 괜찮은데, 촬영장 갈 수 있어.”
그는 룸 미러를 통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병원에서 오늘까지는 안정을 취하라고 했어.”
“그래도 촬영이라….”
가뜩이나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이라고 무시하거나, 말이 많은 것을 보고 느꼈기에.
최대한 촬영 현장에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동양인을 대표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볼 때는 내가 동양인의 표본처럼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게으르지 않은 한국인 배우, 꾀병을 부리지 않는 배우.
연기를 잘하고, 부지런하며 열정 넘치는 한국 배우의 모습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내 걱정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김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감독님도 너 쉬라고 먼저 제안해주신 거야. 내일이랑 스케줄 바꾼 거고. 단순히 스케줄 스위칭이니까, 전혀 문제 될 건 없어.”
“그래?”
“어, 감독님이 이야기해준 거야. 네가 하는 걱정이 뭔지 아는데, 전혀 걱정 안 해도 되는 부분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근데 몸이 너무 가뿐한데, 괜히 죄송하네.”
“죄송할 건 없지. 단순히 다른 날짜와 바꾼 거니까. 현장에 손해 끼치는 것도 없어.”
“응, 그럼 이왕 스케줄 없는 거, 푹 쉬어야겠다.”
“그렇게 해.”
***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 위를 뒹굴며 눈을 감았지만.
잠이 들기는커녕, 너무나 또렷해진 눈망울로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 병원에서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자서인지, 또 잠에 들 리가 없었지.
“어휴, 너무 오래 누워 있기만 했더니, 온몸이 아프려고 하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재로 향해 대본을 바라보았고.
“일이나 하자.”
그렇게 나는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 그대로 대본에 집중해 연기 연습을 했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이제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고.
“하암….”
나는 굳은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일에 하는 일이라고는 휴대 전화를 만지며 한국의 이슈를 보는 것.
그리고 침대 위를 뒹구는 것.
다음 연기를 연습하는 것 그뿐이었다.
이 모든 걸 끝마친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
송유나였다.
휴가를 내어 온 LA 여행에서 내가 여행답게 만들어준 날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더군다나 이틀간 나 때문에 병원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었지.
낮에 고맙다는 연락을 하려고 했으나.
잠을 뒤척였다는 그녀의 주장에 의해, 호텔에서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해 연락을 미뤄뒀다.
한참 시간이 흐른 것을 확인한 뒤.
송유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잠이 깨어 있었는지,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나 씨, 일어났어요?”
-그럼요. 퇴원은 했어요?
“네, 오전에 집에 왔어요.”
-다행이네.
“유나 씨는 호텔에서 뭐 하고 있나 해서 연락했어요.”
그녀는 내 물음에 의아하다는 어투로 내게 물었다.
-저는 그냥 있는데, 왜요?
“그럼 곧 저녁인데, 약속 없으면 같이 저녁 먹을래요?”
내 말에 송유나는 혀를 내둘렀다.
-또 쓰러지려고요? 어휴, 나 두 번은 희성 씨 못 치워요.
“하하, 아니에요.”
-희성 씨 엄청 무거워서 진짜 감당이 안 되던데.
그녀의 말에 나는 미안함을 담아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그때는 너무 미안했어요. 제가 맛있는 저녁 살게요.”
-확실히 길거리에서 안 쓰러지는 거죠? 또 길 한복판에서 그럴까 봐 걱정되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 씨 말고, 희성 씨를 치울 제 걱정이요!
“하하, 그럼 그냥 저희 숙소로 오실래요? 그럼 쓰러져도 제 집일 텐데.”
-네? 집이요?
“예, 영화사 측에서 집을 제공해 주셨는데, 넓고 괜찮거든요. 좁은 공간에 단둘이, 이런 느낌 전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내 말에 송유나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내게 답했다.
-아니에요. 어떻게 남자 집에 가요. 그냥 제 호텔 근처로 희성 씨가 와요.
“알겠어요. 그럼 챙겨서 그쪽으로 바로 갈게요.”
-네.
***
“더 맛있는 데 가도 되는데….”
직원의 서빙으로 나온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보며, 나는 송유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송유나는 나온 음식들을 빤히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왜요, 나는 여기도 좋은데?”
“그래도 LA 구경도 하고, 제가 가봤던 맛집들 데려가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미안하고, 고맙기도 해서.”
내 말에 그녀는 손을 허공에 휘이 저으며 답했다.
“여기 호텔 레스토랑이 맛있다고 유명하대요. 뭐, 여기가 비싸기도 하고?”
그녀는 장난기 섞인 투로 내게 말했고.
“그럼 여기서 마음껏 먹어요.”
나와 그녀는 그제야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렇게 와인과 곁들인 음식을 몇 입 먹어가던 중.
송유나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 씨는 그럼 내일부터 바로 촬영해요?”
“네, 원래 오늘부터 촬영이었는데, 제프리 감독님이 배려해 주셔서 내일부터 촬영 시작할 것 같아요.”
“좀 더 쉬지.”
“에이, 주말까지 이틀 쉬었으면 충분하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테이크를 한 입 먹었고.
그녀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할리우드 와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네?”
“그렇잖아요. 할리우드에서 영화 촬영도 처음인데, 시트콤까지 찍고. 게다가 한국 여기저기서 인터뷰도 엄청나게 했더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제가 인터뷰한 것도 다 보셨어요?”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래요. 같은 회사라 그런지, 하도 이야기가 들어와서 그렇거든요?”
그러고는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며 읊조렸다.
“참나, 걱정해줘도 그러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고.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송유나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좀 쉬엄쉬엄해요. 괜히 과로 때문에 내가 고생했잖아요.”
그녀는 어깨를 높이 들었다 내리며 당시의 힘들었음을 내게 표했다.
“그때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
“할리우드까지 와서 과로가 뭐예요, 진짜….”
송유나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내가 쓰러진 이유는 과로가 아니었다.
물론 늘 여유롭고 체력이 완전 보충된 상태에서 연기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쓰러질 정도의 체력은 아니었지.
시트콤 촬영이 끝난 지도 오래였고.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쓰러진 이유는 분명 ‘꿈’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꿈으로 인해 매일 지끈거리는 두통을 이겨내며 지냈지.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며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힘들었고,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그냥 과로로 쓰러짐을 결론짓기로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는 대화의 주제를 빠르게 환기시켰다.
“유나 씨는 요즘 작품 준비하고 있는 거 있어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화 들어가려고요. 이번 여행 끝나고, 바로 작품 활동 시작할 거 같아요.”
“역시, 유나 씨도 작품 하나 끝나면 시간을 오래 잡아서 휴식하지는 않네요.”
내 말에 그녀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쉰다고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친구들도 만나고… 근데, 유나 씨는 남자 친구 없어요?”
송유나는 내 질문에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왜요,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 주려고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내가 연애를 어떻게 하겠어요. 조금만 붙어 다닌다 싶어도 기사가 나고 난리 날걸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국에서 톱 급으로 자리 잡은 배우였기에.
방송에서 누군가를 언급만 하더라도 기사가 쏟아지고는 했으니까.
하물며 그녀의 남자 친구를 캐기 위해 기자들이 붙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긴… 유나 씨가 연애하면 인터넷이 떠들썩해지겠네요.”
“그러는 희성 씨는요?”
그녀는 똘망똘망하게 뜬 눈으로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빠르게 답했다.
“저는 여자에 관심 없어요.”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 좋아하는 거예요?”
“…예?”
“아니… 뭐, 나도 존중은 하죠. 근데 그렇게 대놓고… 무심하게 툭 내뱉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말을 겨우 이어나갔고.
나는 그녀의 태도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지금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일이 제일 좋다는 말이에요. 하하.”
“아… 난 또 뭐라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와인을 마시며 입꼬리를 옅게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