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39 – 그녀와의 기억 (4)
“송유나가 울었다고?”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 게다가 너 길거리에서 쓰러졌을 때, 혹시 그때도 당연히 기억 안 나지?”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연하지. 완전 정신을 잃어버렸어.”
“유나 씨가 길거리에서 아주 난리가 났었나 봐.”
“난리가 날 정도였다고?”
김 실장은 비웃음이 아닌, 당시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보였다.
“길거리에서 행인 붙잡고 소리 지르고 난동을 피울 정도였나 봐. 그래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구급차도 부른 모양이야.”
그의 말에도 그 당시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그때 기억이 날 정도면 내가 쓰러지지도 않았겠지.
김 실장은 당시를 재연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생동감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 병원으로 온 다음에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유나 씨가 형 번호 모르지 않아?”
“맞아. 그래서 한국에 있는 유나 씨 매니저를 통해서 연락이 왔더라.”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미안하네. 한국은 완전 밤이었을 텐데.”
“그렇긴 한데, 안 그러면 방법이 없으니까. 네 폰도 잠겨 있고, 내 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나 봐.”
“그러네.”
함께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우리.
김 실장은 이내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대박은 뭔 줄 알아?”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대박이 뭔데?”
“내가 전화 받고 엄청 급하게 병원에 왔거든. 근데 유나 씨가 쓰러진 너 보면서 여기 의사한테 영어로 소리치고 있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유나 씨, 영어도 잘 못 하시던데.”
“막 손짓, 발짓까지 써가면서 소리쳤어.”
김 실장이 주변을 쓰윽 살피며 말을 이었다.
“자기가 수억이든 수십억이든 다 낼 테니까, 빨리 너 고치라고.”
“헐, 정말로?”
그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켜내며 말했다.
“완전 절절하게 소리치고 울었나 봐.”
김 실장은 그런 송유나의 모습이 놀랍고 귀여웠던 모양이다.
“원래 유나 씨가 그런 성격이 아니잖아. 근데 너 쓰러진 거 가지고 난리가 난 게, 너무 신기한 거야. 새롭더라. 그리고 엄청 우니까 마음도 찡하고.”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된 거야?”
김 실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답했다.
“유나 씨가 그렇게 병원에서 진이 빠지도록 울고 난리였는데, 의사가 와서 너 과로라고 하니까 안 믿더라고.”
“그럼?”
“무슨 과로로 사람이 이렇게 쓰러져서 못 일어나느냐, 어떻게든 살려내라고 떼를 쓰더라고.”
김 실장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계속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너 새근새근 자는 거 보면서, 보시라고 수면 부족이라 이렇게 쓰러진 거다. 푹 잠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했지.”
“내가 아픈 것도 아니고, 잠을 못 자서 쓰러진 거라 괜히 미안하네.”
나는 김 실장을 향해 농담을 던졌지만.
“어휴, 너 아픈 거였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튼, 그제야 유나 씨가 안심하고는 여기 옆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더라고.”
“그러고 나서 간 거구나?”
“응, 나는 둘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 몰랐지. 유나 씨는 잘 갔으려나.”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일으키며 말했다.
“유나 씨는 혼자 갔어?”
“어, 내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너 이러고 있는 거 보고도 어떻게 혼자 남겨두냐고. 혼자 가겠다고 하더라고.”
홀로 떠났을 송유나를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영어도 잘 못 하면서… 택시에서 제대로 갔으려나….”
정말로 피로가 누적되어 피곤했던 탓인지.
팔에 꽂혀 있는 링거에서 내려오는 수액 때문인지.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반복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하며, 이곳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내게 벅찬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못할 정도의 피로도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이들과 친분을 쌓고,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모든 일도 내게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듦이었다.
다만, 정말 힘든 부분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정신적인 피로도.
최근 들어 꿈을 자주 꾸는 것.
그리고 항상 그 꿈의 패턴은 비슷했다.
예전처럼 과거의 일들, 새롭게 준비하는 작품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부턴가 항상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과 가슴 찢어질 듯한 절절한 이별을 하는 그 기분을 매 꿈마다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인지 꿈을 꾸고 난 후에는 늘 슬픔이 정신을 지배했다.
바로 어제, 또 그와 같은 꿈을 꾸고 난 후.
오늘 오전에 송유나의 손길을 통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송유나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송유나라는 것을 알아낸 덕인지.
지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병원에 누워 있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너무나도 평온한 상태였다.
아무런 고민, 걱정, 근심도 없는 이 느낌.
이 기분이 너무나 만족할 정도로 행복했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말끔해진 지금.
이 느낌이 얼마나 갈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눈을 스르르 뜨자, 내 앞에는 김 실장이 앉아 있었고.
하품을 하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암… 희성아, 깼어?”
그를 향해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형, 아직도 여기 있었어?”
“그럼. 너 자고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지금 몇 시지?”
김 실장은 내 물음에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8시네.”
나는 서둘러 손을 휘이 저으며 답했다.
“와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형, 나 몸도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퇴원은?”
내가 몸을 일으키자 김 실장이 서둘러 내 어깨를 눌렀다.
“어허, 몸이 괜찮긴. 그래도 오늘은 병원에서 하루 자. 수액도 일부러 천천히 내리고 있어.”
나는 굳은 몸을 풀어 스트레칭을 했고.
“나 진짜 괜찮은데?”
“아니야. 이왕 이렇게 쉬는 거, 마음 놓고 편히 잠 좀 자. 요즘 낮에든 밤에든 잠자고 일어나면 항상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악몽도 많이 꾸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알았어?”
내 말에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다 알지. 가끔 아침에 네 방에 들어가서 깨울 때 한 번씩 보기도 했고. 낮잠은 트레일러에서 같이 자니까 다 알지.”
“아….”
“근데 너 여기서 잘 때는 곤히 잘 자더라. 어쨌든,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퇴원하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 실장의 말에 틀린 건 없었으니까.
그는 곧장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고.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형, 나 내일 퇴원할 테니까, 형은 빨리 숙소 들어가서 자.”
“됐어. 같이 자.”
“진짜로 괜찮아. 형이 여기서 자면, 나 너무 미안해서 안 돼.”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고.
나 역시 그의 말에 설득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형, 정말로 들어가. 나 진짜 혼자 있어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고.
김 실장은 내 확신에 찬 얼굴을 보며 결국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바로 달려올게.”
“응,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형도 하루 내내 병원에서 나 챙기느라 힘들었을 텐데, 가서 좀 푹 쉬어.”
“그럴게.”
***
손톱을 물어뜯으며 휴대 전화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송유나는 진희성의 매니저에게 몇 번의 톡을 보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인 휴대 전화를 쏘아보았다.
그때.
지이잉.
휴대 전화가 울리자,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유나 씨, 희성이 괜찮아요.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유나 씨한테 톡 온 거 보고 답장 드려요. 유나 씨도 오늘 놀라셨을 텐데, 푹 쉬세요.
송유나는 김 실장의 톡에 답장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야, 그럼 진희성 혼자 병원에 있다는 거 아니야?”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겉옷을 챙겼고.
커다란 가방 안에 짐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챙기고 가야 해.”
정신없이 짐을 챙긴 그녀는 몇십 분이 흐르지도 않아 바로 호텔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서둘러 도착한 병원.
진희성의 병실 위치를 알고 있는 그녀는 곧장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똑똑.
조심스레 문을 열자 보이는 진희성의 모습.
송유나는 평온하게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이제는 진짜 괜찮은가 보네.”
그의 곁에 서서 진희성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그 소리에 진희성은 미간을 움찔거리며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어?”
“뭐야, 나 때문에 깼어요?”
송유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고.
진희성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유나 씨가 여기는 왜….”
“그게… 아니, 사지 멀쩡한 남자가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쓰러지니까. 혹시나 크게 쓰러진 건 아닌지 확인하러 왔죠!”
송유나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고.
그 모습에 진희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 쓰러졌을 때, 살려달라고 그렇게 울었던 거예요? 하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진희성을 보며, 송유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피곤한 척은 다 해놓고.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쓰러지니까, 괜히 내 탓 같잖아요.”
그녀의 말투와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까지, 모든 것이 진심이었다.
송유나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진희성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유나 씨.”
진희성 역시 온 마음이 우러나오는 답이었다.
송유나는 그의 답에 마른침을 삼키고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뭐… 걱정은 안 했거든요? 내가 괜히 진희성 씨 쓰러진 거 떠안게 될까 봐 우려한 거지.”
그녀의 말에 진희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혀를 내둘렀다.
“…말을 참 못되게도 한다니까?”
진희성의 말에 송유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곁눈질로 쏘아보며 답했다.
“뭐예요, 그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표정을 풀고 송유나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근데 그 쇼핑백은 뭐예요?”
“아, 이거요?”
진희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뭐야, 제 병문안 온다고 과일이라도 사온 거예요?”
송유나는 눈썹을 찌푸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이거 제 담요인데요.”
“네?”
“내일 퇴원이라면서요.”
“맞아요.”
송유나는 침대 옆 의자에 몸을 털썩 기대며 입을 열었다.
“제가 추위를 많이 타거든요.”
“그게 무슨….”
***
갑작스레 찾아온 송유나는 내 침대 옆, 간이침대에 몸을 기대 누워 있고.
한참 뚝뚝 끊기는 대화를 이어가던 우리는 어느새 이 어색함을 배경 삼고 있었다.
“그래서 희성 씨는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아가네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각자 자리에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저야 뭐, 이제 시작이죠.”
“그래도 시작이 반이잖아요. 영화도 하고 있고, 그 시트콤도 재미있던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답했다.
“오오, 제 시트콤도 봐준 거예요? 한국에서도 바빴을 텐데, 언제 제 시트콤은 또 봤대요?”
내 작품을 봤다고만 해도 놀랄 법한데.
무려 내가 출연한 미국 시트콤을 찾아서까지 봤다는 그녀의 말.
의외의 이야기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고.
“…….”
잠시 그녀가 대답이 없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뭐야, 언제 왜 봤는지 말 안 해줘요?”
여전히 송유나는 입을 꾹 닫았고.
민망함에 입을 열지 못하는 건가 싶어,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유나 씨…?”
그러자 내 시선 끝에는 눈을 스르르 감고 있는 송유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부르던 입을 닫고 말았다.
나를 간호해 준답시고 이 밤중에 병원까지 온 그녀.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그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고.
그럼에도 나를 간호하고 챙겨 주겠다는 마음으로 병원까지 와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LA까지 여행을 와서 이틀이 넘는 시간을 내게 할애하고 있으니까.
새근새근 잠이 든 송유나를 쓰윽 바라보았고.
“뭐야, 추위 많이 탄다고 담요 가져왔다더니. 덮지도 않고, 베개로 쓰고 있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내 침대 위에 있는 담요를 당겨 그녀의 몸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발에서부터 어깨까지 담요를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그 순간이 다시금 떠올랐다.
과거에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사랑했던 사람.
물론 그 사람이 환생해 지금 송유나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송유나라는 걸 깨달았다고 해서 사랑이란 감정이 막 피어오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그녀를 잃었던 아련하고 슬픈 감정만이 되살아나고 있었지.
나는 금세 촉촉해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마음을 깊이 삼켜냈다.
‘설마 내가 송유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보면 한쪽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이런 감정만으로는 내가 송유나를 좋아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일 뿐.
사랑의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곤히 잠든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